솟아오르는 아침 해, 빛으로 가득한 하늘, 하늘을 향해 탁 트인 바다. 울주의 광막한 자연이 우리를 겸허하게 한다.
분주한 도시를 빠져나온 기차가 산, 들, 강을 헤치며 걷잡을 수 없이 달려 나간다. 남쪽으로 질주하는 KTX 열차의 역방향 좌석만큼 한 해를 반추하기에 적당한 장소가 또 있을까. 되감기 버튼을 누른 듯 빠르게 흘러가는 풍경 앞에서 그간 지나친 시간의 무상함을 생각한다. 12월. ‘벌써’의 당혹스러움과 ‘아직’의 미련 사이, 2024년을 조용히 갈무리하고 2025년을 열어젖힐 여행을 계획하기로 한다. 목적지는 울산 울주. 울산역이 자리한 고장, 한반도에 새 아침을 퍼트리는 땅이다.
간절곶에서 떠오른 해
울주 여행은 지형도를 그리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가지산과 간월산, 신불산 등 해발고도 1000미터 이상의 웅장한 산악군이 펼쳐진 울주의 지세는 동해와 가까워질수록 점차 유순하고 평탄하게 변화한다. 물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른다. 백운산 탑골샘에서 대곡천으로 굽이치던 물길은 머지않아 태화강과 합류해 거대한 바다와 만난다. 아득히 먼 옛날부터 고래가 노닐었다고 하는 저 깊고 푸른 바다.
어스름이 채 가시지 않은 오전 6시 30분, 간절곶 끄트머리에 서서 해를 기다린다. 긴 호흡으로 몰아치는 파도가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바위틈에 부서지더니, 이내 옷깃을 파고든 바닷바람이 새벽잠을 물리친다. 동트기 전이 가장 춥고 어둡다는 말을 온몸으로 실감하는 순간이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귀에 들리고 피부에 닿는 것이 더 생생하게 느껴지던 즈음, 검푸른 수평선 위로 붉은 기운이 퍼지기 시작했다.
간절곶에 해가 뜨고 나서야 한반도에 아침이 온다던가. 울산의 역사와 문화, 행정과 연혁 등을 수록한 <울산읍지>에 등장한 문구 ‘간절욱조조반도(艮絶旭肇早半島)’는 간절곶의 위상을 짐작하게 하는 표현이다. 간절이란 이름은 간짓대에서 왔다. 먼바다에서 바라본 지형이 대나무로 만든 뾰족한 장대인 간짓대를 닮았다는 데서 유래했다. 조선 시대에 간절곶은 간절포, 혹은 이길곶이라고도 불렀다. ‘이길’이란 넓고 길다는 뜻인데, 간절곶 인근의 조선 시대 유적 서생 이길봉수대에 옛 명칭이 연흔처럼 남아 있다.
간절곶 주변은 여느 동해안 지형과 달리 깎아지른 듯한 해안 절벽이 아닌 야트막한 구릉과 평지로 이루어진다. 침식 지형인 파식대 또한 완만한 언덕에 이어져 독특한 인상을 준다. 간절곶 파식대는 이러한 지질학적 의의를 인정받아 울산시가 추진하는 국가지질공원 10대 명소 후보지로 꼽히기도 했다. 넓디넓은 간절곶 언덕 위엔 그림 같은 등대와 조각공원이 자리해 해맞이꾼을 위한 볼거리를 더한다.
동경 129도 21분 50초, 북위 35도 21분 20초. 절묘한 위치 덕분에 한반도 어느 곳보다 빠르게 일출을 볼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간절곶은 ‘새천년’의 해맞이 명소로 거듭났다. 간절곶 표지석 뒷면에 새긴 “이곳을 찾은 분과 그 후손은 새천년에 영원히 번성할 것입니다”라는 문장은 밀레니엄을 앞둔 이들의 기대감을 잘 보여 준다. 이 대목에서 해 뜨는 시각과 관련한 지구과학적 사실이 그리 중요하진 않을 것이다. 간절곶이란 이름에 깃든 간절함 때문일까, 해마다 12월 31일부터 1월 1일에 걸쳐 열리는 ‘간절곶 해맞이 축제’엔 발 디딜 틈 없이 많은 해맞이꾼이 찾아와 일출 못지않은 장관을 이룬다.
태양을, 우주를 경배하는 마음으로
명선교에서 간절곶으로 이어지는 해안도로인 ‘간절곶 소망길’과 간절곶 서편에 펼쳐진 도로 이름 ‘해맞이로’, 높이 5미터 너비 2.4미터에 달하는 간절곶의 마스코트 ‘소망우체통’까지. 간절곶을 둘러싼 명칭엔 해맞이와 해맞이꾼의 소망이 깃들어 있다.
어둠을 사르고 세상을 빛으로 구원한 태양은 언제나 경배의 대상이었다. 에너지의 근원이자 소망과 희망, 열망의 상징 태양. 그러나 날마다 뜨고 지는 태양의 운행이 진정으로 일깨우는 것은 우리 인간이 우주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일 테다. 묵묵히 솟아오르는 아침 해, 빛으로 가득한 하늘, 하늘을 향해 탁 트인 바다. 울주의 광막한 자연이 우리를 거듭 겸허하게 한다.
물길을 거슬러, 태화강에서 대곡천까지
이제 걸음은 바다에서 강으로, 강에서 계곡으로 이어진다. 울주 땅을 가로질러 동해에 흘러드는 태화강은 길이 47킬로미터, 면적 644제곱킬로미터(약 1억 9500만 평) 규모를 이룬다.
강 중상류인 범서읍 백룡담에 우뚝 솟은 선바위는 예부터 독보적 경관이 널리 알려진 명승지다. 선돌이라고도 불렀으며 높이 약 33미터, 수면에 드러난 둘레가 약 46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돌기둥이다.
선바위 뒤편 벼랑에 올라선 용암정과 선암사, 강당대밭이 자아내는 풍경은 어딘가 도교적인 분위기에 휩싸여 있다. 백룡이 살았다는 전설, 바위 아래에서 빨래하던 여인을 구하려던 스님이 돌기둥에 함께 깔렸다는 애달픈 민담 등 바위를 둘러싼 이야기도 신비로움을 더한다. 눈부신 풍광에 감탄하다 보니 이토록 기이한 바위가 어떻게 형성됐는지 궁금해진다. 연원을 설명하려면 중생대 백악기로 이동해야 한다.
당시 경상분지 대구층에 해당하는 퇴적암 지층이 깎여 계곡면에 절벽을 이루다가, 약한 부분에서 침식이 일어나 암석 일부가 떨어진 채 기둥 모양 바위가 되었다. 이처럼 하나의 돌기둥만 남은 하식애는 극히 드물다 한다.
물길을 거슬러 태화강의 본류인 대곡천에 다다를 차례. 이곳의 옛 명칭은 반구천으로, 울주 사람들은 대곡천만큼 반구천이라는 이름을 오래 사용해 왔다. 반구천이 울주를 넘어 세계에 알려지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70년 12월 24일의 놀라운 발견이다.
당시 스물아홉이던 불교미술사학자 문명대 교수는 신라 시대에 원효대사가 머물렀다는 절 반고사의 흔적을 좇아 반구대를 답사하다가 1000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잠들었던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를 맞닥뜨렸고, 이듬해인 1971년 12월 25일 울주 주민들의 증언에 따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마저 찾아냈다. 선사시대부터 역사시대에 이르는 한반도 사람들의 생활사를 말해 주는 독보적 문화유산이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발견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불과 6년 전인 2018년 6월 반구대 암각화 북동쪽에서 발자국 18개와 꼬리 화석이 발굴됐는데, 주인공은 1600만 년 전 멸종한 파충류 코리스토데라였다. 이 화석은 국제 학술지를 통해 노바페스 울산엔시스, 즉 울산에서 발견된 새로운 발자국이라는 의미를 지닌 공식 명칭으로 알려졌다.
반구천의 암각화를 만나러 가는 여정엔 크고 영묘한 두 종류의 동물이 동행한다. 하나는 공룡이다. 천전리 암각화와 반구대 암각화 주변엔 평화롭게 산책을 즐기던 공룡의 느긋한 발자국이 군데군데 남았다. 다른 하나는 고래다. 반구대 암각화는 혹등고래와 귀신고래, 범고래와 상괭이, 돌쇠고래와 향고래, 북방긴수염고래 등 최소 일곱 종의 고래를 표현했을 뿐 아니라 사냥과 인양, 해체에 이르는 전 과정을 섬세하게 묘사했다. 암각화 한편엔 가면 쓴 사람이 제를 올리는 모습도 있다.
울산암각화박물관에서 만난 장혜경 문화관광해설사는 여기 얽힌 이야기를 이렇게 부연했다. “탐험하고 사냥하는 인간, 나누어 먹고 감사하는 인간의 모습이 드러난 거예요.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생각하게 하는 그림이죠.” 수천 년 세월이 흘렀어도 자연에 경이를 느끼고 감사를 표하는 인간의 모습만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우리와 다르지 않은 옛사람들의 자취가 묘한 위로를 안겼다.
언양록석을 찾아서, 벼룻길에서 만난 벼루장
반구대 암각화를 찾아가는 길 중턱엔 ‘울주 대곡리 연로개수기’라는 표지판을 둔 바위와 명문이 자리한다. ‘연로’는 벼룻길을, ‘개수기’는 이 길의 개수 공사 내력을 뜻한다. 벼룻길은 흔히 강으로 통하는 벼랑길을 의미하지만, 이곳엔 여러 가지 유래가 얽혀 있다. 벼루처럼 미끄러운 바위가 많은 곳, 벼루를 즐겨 쓰던 사대부들이 자주 지나다니며 시를 읊던 곳···.
놀랍게도 벼루장 유길훈은 이곳에서 벼룻돌을 주웠다. 먹이 사그락사그락 잘 갈리는, 단단하고 푸른 돌. 이름하여 ‘언양록석’을 발견한 것이다. “1990년대 한․중 수교 이후 값싼 중국산 문방사우가 수입되면서 한국 필방 업계는 위기에 처했습니다. 당장 먹고살 일이 깜깜했지만, 벼루장의 명맥을 잇겠다는 일념으로 고문헌을 뒤져 경북 안동과 경주 등지를 전전하며 벼룻돌을 구했지요.” 울주 언양의 대곡천까지 흘러든 그는 우연히 물속에서 손바닥만 한 벼룻돌을 찾아냈다. “망치로 두드리니 소리가 맑고 경도가 높았습니다. 빛깔도 일반적인 벼룻돌과 달리 검거나 붉지 않고 은은한 푸른빛을 띠어 특별했지요.”
돌 하나만 보고 거처와 작업실을 이곳으로 옮긴 그는 오직 벼루 제조하는 일에 삶을 바쳤다. 돌만 봐도 배부른 심정이었지만, 길게는 수개월이 걸리는 공정 때문에 큰 이윤을 남기지는 못했다. 생계를 위해 틈틈이 반구대 암각화를 모티브로 한 목걸이와 장신구를 만들어 팔았을 정도다.
그의 작품 세계는 2016년 무형문화유산 전수조사를 통해 간신히 세상과 만날 수 있었다. 전통 제작 도구로 해와 달을 새긴 일월연, 매화와 소나무와 대나무를 조각한 삼우연, 다섯 마리 용을 생생하게 표현한 오룡연 등이 예술성을 인정받아 2017년 무형문화유산에 지정된 것이다. “힘들수록 기분이 좋아요. 어려운 공정을 마무리하고 뒷면에 낙관을 새길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벼루장의 눈동자가 푸른 벼룻돌처럼 형형하게 빛났다.
다시 바다로, 명선도의 밤
회야강은 울주의 또 다른 강이다. 온산읍과 서생면을 지나 동해에 유입되는 물길로, 강 하구에는 백악기 퇴적암으로 이루어진 섬 명선도와 진하해수욕장이 펼쳐진다. ‘매미가 우는 섬’이라는 뜻을 지닌 명선도. 사람이 살지 않아 ‘맨섬’이란 별칭도 지닌다. 과거에는 뭍에서 섬으로 이어지는 사주가 종종 잠겨 물때를 맞춰야 했지만, 최근 진입로를 설치해 언제든 드나들게 되었다.
어둠이 내린 명선도는 낮과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형형색색의 경관 조명과 미디어아트가 섬을 초현실적 공간으로 거듭나게 했다. 역설적이게도, 화려한 섬에서 건너다보는 육지 풍경은 어느 때보다 고요하고 아름답다.
신석기시대의 고래 사냥꾼, 반구대에 머물렀다는 원효대사, 벼룻돌을 찾아 헤맨 벼루장의 지난했을 생애가 마냥 아득하고 신비롭게 느껴지는 것처럼. 반복적인 일상과 고단한 삶도 한 발짝 떨어진 채 바라보면 이전과는 다르게 다가올지 모른다. 낯설게 보기. 여행이 우리에게 안기는 마법 같은 경험이다.
울주에서 여기도 가 보세요
즐길 거리
간월재
영남알프스의 험준한 능선이 이곳에 다다라 완만하게 굽이친다. 간월재는 상북면 이천리와 등억알프스리 사이에 펼쳐진 평원으로, 가을부터 초겨울까지 억새꽃이 구름 결처럼 일렁이며 장관을 이룬다. 배내골 사람들과 밀양 사람들은 언양 장터에 가기 위해 이 고개를 넘었고, 빨치산과 토벌대의 교전이 여기서 벌어지기도 했다. 등억온천단지에 자리한 영남알프스 복합웰컴센터를 들머리 삼아 2시간가량 걷다 보면 어렵지 않게 간월재에 닿는다. 영남알프스의 장엄한 풍광이 한눈에 펼쳐지는 전망대에서 오래도록 여운을 음미한다.
문의 052-204-1727
외고산 옹기마을
1950년대부터 도공들이 질 좋은 가마 흙을 찾아 이곳에 모여들어 오늘날 한국 최대 옹기 집산지인 외고산 옹기마을을 이뤘다. 진흙을 구워 질박하게 만든 옹기는 한국 전통 식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고추장, 된장, 간장, 김장김치 등 발효 음식을 담아 두는 장독대가 바로 옹기다. 여섯 차례 도전 끝에 제작한 기네스 인증 최대 옹기를 비롯해 제작 과정과 생활사를 전시한 울산옹기박물관이 옹기에 깃든 의미와 가치를 살뜰하게 설명해 준다. 흙을 만지며 옹기를 빚고 싶은 이라면 옹기아카데미관의 프로그램을 살핀다.
문의 052-237-7894
먹거리
호피폴라
아이슬란드어로 ‘빠지다’라는 뜻을 지닌 상호처럼, 울주 앞바다에 당장이라도 몸을 던지고 싶을 만큼 시원스러운 전망이 펼쳐지는 카페다. 야자수와 돌하르방을 두어 흡사 제주도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하는데, 음료와 디저트의 재료 또한 댕유자와 한라봉 등을 사용해 제주도의 풍미를 살렸다. 유자 크림을 채워 넣은 댕유자롤, 한라봉과 망고 원물의 질감과 본연의 향이 그대로 느껴지는 한라망고에이드가 이곳의 대표 메뉴. 간절곶 해맞이 축제 당일에는 주차장을 무료 개방하고, 예약제로 일출 감상 행사를 운영할 예정이다.
문의 052-238-2425
소소숲
언양불고기를 즐기는 새로운 방법을 제안한다. 가지산 아래 자리한 ‘소소숲’은 언양의 식재료와 언양불고기 레시피를 활용한 한식 브런치 식당이다. 산뜻한 초록색이 인상적인 감태불고기김밥과 궁중떡볶이 세트, 제철 겉절이와 불고기를 먹음직스럽게 얹어 낸 언양불고기비빔밥, 싱그러운 채소를 곁들인 언양불고기 콥샐러드 등 메뉴 면면에 언양의 전통과 현대적 아이디어가 녹아 있다. 음식과 같이 마시기 좋은 차와 향기로운 콜드브루 커피도 마련해 뒷맛까지 책임진다. 건물 주변을 에워싼 풍경을 감상하며 산책하기에도 좋다.
문의 0507-1475-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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