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야겠다 생각했다. 스스로 돌이켜 올해 무엇을 했느냐는 물음 앞에 궁색해지는 이로서는 그럴싸한 답 하나 서둘러 마련할 방법이 걷기라고. 따로 놀던 몸과 마음이 길 위에서 맞닿아 서로 보조를 맞출 때 느끼는 희열 또한 걷는 이의 것이니, 한 해를 마치는 이즈음 걸으면서 몸과 마음의 속도를 정비하고도 싶었다. 세상천지 많은 길 가운데 고른 곳은 문경새재. 오랜 시간 무수한 사연을 품은 길인 데다 그만큼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길에 걸음을 얹는다. 옛길이 오늘 여행자에게 어떤 이야기를 건넬까. 귀를 열고 신발 끈을 묶는다. 기쁜 소식을 듣는다는 문경(聞慶)이란 지명에 한층 설렌다.
나라가 조성한 길, 사람에게 사랑받은 길
길 초입, 새재 제1관문인 주흘관을 중심에 둔 성벽이 날개를 펼치고 섰다. 멀고 가까운 산이 겹겹이 웅장한 배경을 이루어 ‘눈맛’이 시원하다. 그 옛날 부산 동래를 출발한 이가 아흐레째 되는 날 마주했을 풍경이다. 문경새재는 조선 시대에 영남 지방과 한양을 잇는 영남대로의 일부로 태종 대에 개척했다. 험난한 소백산맥을 지나기 위해 해발 1076미터 주흘산과 1017미터 조령산이 몸을 낮추는 고개에 나라가 주도해 길을 낸 것이다.
새재는 일찌감치 사랑받았다. 일단은 최단 거리여서다. 부산에서 한양까지 죽령은 15일, 추풍령은 16일 걸리는데 새재를 이용하면 14일 만에 도착해 시간을 아껴 주었다. 거기다 이름에 ‘경사’ ‘기쁨’이 들어간 고개라, 큰 각오 하고 먼 길 떠나는 이가 위안 삼기 좋았겠다. 그들에게는 오늘날의 속도가 순간 이동이나 다름없을 터. 비록 주차장에서 출발한 여정이지만 나머지는 선인과 똑같이 걸으려 한다. 1관문부터 3관문에 이르는 6.5킬로미터 거리를 정직하게, 오로지 두 발만 써서.
입성하기 전 주흘관 주변을 둘러본다. 세월이 느껴지는 성벽, 그 옆의 계곡과 수문, 해자 등 꼼꼼하게 살필 거리가 다양하다. 이는 새재의 중요성을 대변한다. 임진왜란 당시 새재를 지나 단시간에 진격한 왜군을 보고 선조가 1594년 현재의 제2관문을 만들었고, 숙종 대에 제1·3관문과 성을 완성해 방비를 강화했다. 전시가 아닌 지금은 유구한 세월이 전하는 아름다움만 즐길 수 있어 고맙다. 주흘관 성문과 수구문의 홍예, 그 무지개 모양 아치가 얼마나 유려한지 과거의 기술과 예술성에 찬탄이 나온다.
걷는 자에게 길이 선사하는 감격
이제 새재로 들어선다. 왼쪽엔 계곡을 끼고, 고른 흙길이 이어진다. 맨발걷기 열풍 훨씬 전에도 새재는 신발 벗고 걷는 곳으로 이름났다. 지구와 사람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 맨발을 내딛는 이들 표정이 홀가분하다. 여러 사극에 등장한 문경새재오픈세트장, 관리가 묵어가던 조령원 터를 지나는 동안 숲을, 계곡을, 독특한 바위를, 소원 돌탑을 들여다보느라 걸음이 계속 느려진다. 좋은 길이 지닌 힘이다. 옆에 붙은 계곡이 내는 소리에 귀가 모처럼 즐겁게 일한다. 도시의 소음과는 완벽히 차별화된 자연의 음악이 청량하다.
곧 교귀정이다. 조선 시대엔 경북과 충북 경계인 새재에서 경상감사 교대식이 열렸다. 관인을 주고받는 일을 교귀라 하는데, 과연 이런 행사를 열 만큼 주변 경치가 일품이다. 옛 수장과 새로운 수장이 인사하고 격려하고 축하하던 이곳에 잠시 앉아 시간의 교대식을 생각한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하는 교대. 어제의 나는 어떤 결산서를 내놓을 수 있나. 무슨 말을 전해야 할까. 길이 제시하는 답을 들으러 다시금 무릎에 힘을 넣는다. 영․정조 대에 세웠다 추정하는 순한글 ‘산불됴심’ 비석, 햇살이 파고드는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나무와 이파리 색 등이 쉴 새 없이 즐거움을 안긴다.
제2관문 조곡관에 이르러서는 길 폭이 좁아지고 숲은 깊어지며 분위기가 한결 호젓해진다. 쭉쭉 뻗은 나무 아래 바위가 의자처럼 점점이 놓였다. 거기 앉아 길과 숲의 칭찬을 누리는 여행자 얼굴에서 여유, 행복 같은 단어가 보인다. 그 긍정의 공기를 호흡하고 제3관문을 향하는 길은 오르막이다. 낙동강 발원지인 초점, 전설이 어린 책바위를 지날 즈음엔 우거진 숲속 오랜 세월 쌓인 낙엽이 폭신하게 밟히고 다리에도 ‘오늘 좀 걸었구나’ 하는 감각이 든다
마침내 고갯마루, 제3관문 조령관이 나타난다. 아, 반가워라. 그 옛날 먼 길 가는 선비, 관리, 봇짐장수와 같은 마음을 공유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걸은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환희다. 조령관 너머는 충북 괴산 땅. 이곳에 오는 비는 바람 방향에 따라 낙동강으로 또는 남한강으로 흘러간다. 남해와 서해의 운명이 갈리는 분수령에 선 기분이 오묘하다. 워낙 많은 이가 이용한 길이라, 곳곳의 시비에서 김시습·류성룡·서거정·이이·이황 같은 당대 문사의 시를 읽기도 했다. 민초는 문경새재아리랑을 남겼다. 길이 선사한 생각과 감흥을 몇 글자에 담기가 가능하랴. 이제 내려갈 시간이다. 저 위에서 고운 낮달이 배웅해 황송하다.
간이역의 다정한 변신, 카페가은역
잘 걷는 일만큼 중요한 것이 잘 멈추는 일이다. 오늘의 뿌듯한 걸음을 기념하며 가은역에서 잠시 멈추었다 가기로 했다. 가은역은 과거 대한민국을 따뜻하게 데워 준 탄광 도시 문경을 기억하는 곳이다. 400킬로미터에 달하는 갱도에서 캐낸 석탄을 싣고 기차는 부지런히 달렸다. 일하러 온 타지 사람과 주민이 섞여 가은읍이 은성했던 시절, 이 자그만 역사도 북적거렸다. 광업이 사양산업이 되고 뒤이어 문 닫은 역사에 다시 불이 켜진 때가 2017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어여쁜 역을 아까워한 주민이 뜻을 모아 카페를 차렸다. 박공지붕과 역명 간판, 민트색 창틀까지 그대로인 ‘카페가은역’에 앉으면 역을 간절히 살리고 싶어 한 주민의 마음이 이해된다. 사방이 산으로 싸인 가운데 자리 잡은 역은 아늑한 둥지 같고 다정한 고향 같다. 문경 특산물 사과와 오미자를 이용한 음료, 디저트 메뉴도 신경 쓴 흔적이 역력하다. 문경에서 안전하고 정성스럽게 농사짓는 농부 세 분에게서 받아 오는 사과로 메뉴를 만들고, 가은 출신 청년들이 매장을 돌본다. 간이역과 딱 어울리는 따스한 정서가 카페에 가득하다.
사과버터를 바른 스콘과 사과쿠키크림라테로 배를 채우고 내부를 둘러본다. 사람들은 역무원 제복을 입고 모자를 쓴 채 까르르 웃는다. 마지막 역무원 황동철 선생이 기증한 제복, 통표, 차표 펀칭기, 옛 기차표 덕분에 카페가 더욱 풍성해졌다. 밖에는 철길이 있어 간이역 여행 온 느낌 물씬 난다. 반대편 승강장을 거닐다 역과 철길과 문경의 산세를 한 컷에 담았다. 오른쪽으로 역 지붕보다 훌쩍 키 큰 느티나무까지, 완벽하게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길의 제자가 되어 배운 것
길은 선생이다. 걷는 이는 자연히 학생이 된다. 먼 옛날 누군가 애써 길을 내고, 오랜 시간 많은 이가 다니고 가꾸었기에 새재 길이 살아남아 지금 우리가 건강이니 배움이니 힐링이니 말하며 이 길을 걷는다. 내가 심지 않은 나무를, 짓지 않은 정자를, 돌 하나 얹은 적 없는 성벽과 담을 누린다. 제1관문을 출발해 끝내 제3관문을 만나는 감격을 맛본다. 그곳에 존재해 고마운 간이역도 물론이다. 자연뿐 아니라 사람, 그러니까 이전 시대를 산 이를 포함해 허다한 사람에게 의지하여 내 한 몸이 섰음을 깨닫는다.
산을 넘어가야 하는 순간이 온다. 오르막도, 내리막도 속수무책 닥친다. 일단 한 걸음 떼는 일이 시작이었다. 어찌하든 길에 올려놓은 발은 다음 걸음으로 나아갔다. 한 번에 한 걸음씩만 내딛으면 충분했으며, 어려워 보이는 길도 한 걸음은 더 갈 수 있었다. 먼 곳은 걸을수록 가까워졌다. 고단해도, 걸어온 만큼 내 것이었다. 문경새재가 길 위의 학생에게 그렇게 알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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