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가을, 뭔가 두고 온 듯
뒤를 돌아보게 되는 계절에 무등산 아래 호수를 걷는다.
산처럼 물처럼, 이만큼만 지혜롭고 어질어지길 꿈꾼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했다. 공자가 말하고 2500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회자되는 이유는 그 안에 진리가 들었기 때문일 테다. 덥다는 한탄만 반복하다 어느새 가을, 뭔가 두고 온 듯 뒤를 돌아보게 되는 계절이다. 두고 온 것이 지혜와 어짊은 아닌가 하여 물과 산에 기대기로 했다. 광주, 전남 담양과 화순에 걸친 큰 산 무등산 아래 호수가 있다. 물과 산, 지혜와 어짊이 공존하는 곳으로 떠난다.
싱그러운 생명의 향연, 광주호호수생태원
등급이 없는 산, 등급을 논할 필요조차 없는 산이라는 이름부터 매혹적이다. 해발 1187미터 무등산은 2013년 대한민국 21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약 1000미터 고지대에 형성된 서석대, 입석대의 주상절리는 세계에서도 희귀한 사례라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목록에도 올랐다. 거대한 산은 수많은 생명을 품어 수달, 상제나비 등 멸종 위기종을 포함해 4100여 종 동식물이 살아간다. 산이 머금은 물이 골을 타고 계곡을 이루어 흘러내리니 그 줄기가 호수의 씨앗이 되었다. 자연 호수는 아니고 1976년 댐을 완공해 생긴 광주호다. 1740만 톤을 저수해 광주와 담양 논밭에 물을 대어 우리를 먹여 왔다.
무등산 아래 호수는 풍광을 아까워한 사람들의 노력에 힘입어 2006년 광주호호수생태원으로 거듭났다. 흔한 ‘공원’ 대신 ‘생태원’이라 부를 만큼 사람보다는 자연 생태에 초점을 맞춘 곳이다. 자연이 자연이도록 사람이 다닐 최소한의 덱만 놓고, 밤이 밤이도록 조명을 설치하지 않아 오후 6시엔 문을 닫는다. 빛도, 사람도 없이 그들끼리 오롯이 보내는 밤을 보장한다는 사실이 새삼 감동스럽다.
생태원에 들어서자마자 저 앞의 호수와 더불어 버드나무와 고마리의 향연이 펼쳐진다. 물을 좋아하는 지혜로운 버드나무가 자박한 물을 밟고 서서 몸을 쭉쭉 뻗었다. 자기 개성대로 자란 나무는 단독으로나, 서로 어우러져서나 아름다워 덱을 걷는 속도는 자꾸 느려진다. 검은색 나비가 사람 곁을 스쳐 제집인 양 날아다녀 깜짝 놀랐는데, 생각해 보니 제집이 맞다. 제비나비, 암끝검은표범나비, 네발나비 등 이름처럼 예쁜 나비를 연달아 만났다. 딱따구리와 꾀꼬리에 멸종 위기종인 팔색조도 생태원을 터전 삼아, 철 따라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한편에는 세계 최대 정원 박람회인 영국 첼시 플라워 쇼에서 수상한 황지해 작가가 수상작 ‘고요한 시간: DMZ’ ‘해우소’를 직접 재현해 놓았다. 걷는 동안 자연을 대하는, 나아가 생명과 삶을 대하는 관점을 돌아보게 된다. 풍경 자체로도 먼 데서 찾아올 만하지만, 산과 물이 생명을 키우고 생명은 그 산과 물을 바라보며 생을 꾸리는 모습은 더욱 장관이다. 지혜와 인자함의 실마리를 얻어 가는 기분이다.
+ 무등산생태탐방원 & 생태 탐방 프로그램
국립공원공단은 전국의 국립공원 가운데 아홉 곳에 숙소와 강의실, 강당을 갖춘 생태탐방원을 운영한다. 광주 무등산생태탐방원이 진행하는 생태 탐방 프로그램은 해설사가 동행해 광주호호수생태원을 돌아보고, 환벽당에서 액자를 만드는 체험 등으로 알차게 구성했다. 국립공원공단 예약시스템 사이트를 통해서는 무등산 사무소가 진행하는 ‘천년고찰과 함께하는 숲길 여행’ 같은 생태 탐방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 간편하게 떠나고 싶다면 코레일관광개발과 협업해 마련한 ‘기차로 떠나는 국립공원 생태관광’ 패키지를 살펴보자.
문의 reservation.knps.or.kr, www.korailtravel.com
풍경을 사랑하여 짓다, 환벽당과 식영정
광주호호수생태원에서 도보로 몇 분 거리에 환벽당이 있다. 푸름을 둘렀다는 이름이 호기심을 부른다. 배롱나무를 줄지어 심어 자미탄이라고도 불렀다는 창계천 옆 언덕에 들어선 정자는 16세기 중반에 사촌 김윤제가 지었다. 노년에 접어든 선생이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해 고른 터는 제법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야 한다. 그래 봐야 오늘날의 현란한 전망대와 비교는 불가능하나 계단을 거쳐 만난 전경은 과연 옛 선비가 이걸 두고두고 누리고 싶어 했구나 하는 감탄이 나온다.
백발의 선비가 정자 마루와 아담한 방에서 글을 읽고 쓰다 문득 눈을 들어 산과 물을 감상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오늘, 건너편 무등산은 꼭대기에 구름을 얹었다. 오늘은 그랬다고, 언제는 맑았다고, 눈이나 비가 내렸다고 매일 달라지는 산을 시로 읊었을 것이다. ‘환벽당’ 현판 글씨는 17세기에 우암 송시열이 썼다. 사촌 선생을 이어 정자를 돌보았을 이를 손이 찾아와서는 서로 생각을 나누고, 글씨를 청하고, 부탁을 받아들여 붓을 잡는 모든 과정을 환벽당 마루에 앉아 상상한다. 지금은 거의 멸종했다 할 이런 이야기가 얼마나 좋은지, 가을바람이 통과하는 마루에서 내내 웃음이 샌다.
여기서 또 몇 분 걸으면 환벽당과 비슷한 시기에 지은 식영정이다. 가는 길엔 짤막한 충효교가 광주와 담양을 가른다. 이는 행정상 편의를 위한 경계선일 뿐 일대가 같은 생활권이라 수많은 인사가 환벽당, 식영정, 소쇄원 등을 넘나들며 교류했다. ‘쉴 식(息)’에 ‘그림자 영(影)’. <장자>에서 따온 이름인데, 그림자란 사람에게 늘 따라붙는 욕심을 의미한다. 그늘에 깃들여야 그림자가 사라지므로, 양지만 좇아 뛰지 말고 그늘에서 탐욕을 쉬게 해 본질을 궁리하라는 뜻이다.
욕심을 내려놓은 작은 세계, 식영정 마루에 앉아 무등산과 그 아래 호수, 무성한 숲을 감상한다. 터를 내어 주고 빌리고, 생의 조건을 주고받고, 함께 어울려 생태계를 이루는 현장이다. 지구가 아름답다는, 생명은 지혜롭고 어질다는 증거가 장엄하게 펼쳐진다. 선인들도 이 조화를 목격했기에 욕심을 접어 넣고 다만 ‘식영정 20영(詠)’ 같은 시를 썼겠다. 전통 건축의 백미가 차경이라는 말을 증명하듯, 네모난 문을 액자 삼은 경치도 으뜸이다. 마루에서 몸을 일으키기가 한세월이었다.
푸르고 커다란 품에 안겨
환벽당 마당 한쪽 가장자리에는 벽오동나무가 우뚝하다. 이름처럼 나무껍질이 오묘한 옥색을 띤다. 자연의 푸름을 둘렀다는 환벽당에 벽오동나무라! 심은 이가 누군지는 몰라도 그 덕분에 오래도록 즐거워할 기억이 남았다. 멀고 가까운 모든 곳이 푸를 벽(碧)으로 가득 차 사람도 싱그럽게 물든다. 하루 동안 물과 산을 양껏 담았다. 차분히 사색해야 할 이 계절에 이만큼만 지혜롭고 어질어지기를 꿈꾼다. 등급 없는 산, 무등산이 꿈꾸는 사람을 차별 없이 안아 주었다.
+ 무등산 평촌명품마을
무등산국립공원 내 동림·담안·우성·닭뫼 등 네 개 마을을 묶어 평촌명품마을이라 부른다. 수달과 남생이, 반딧불이가 서식하는 생태 환경이 우수하고, 무등산과 함께하는 경관이 아름다워 가히 명품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마을이다. 2013년 국립공원공단이 명품마을로, 2015년 환경부가 생태 관광 지역으로 지정했으며, 광주호호수생태원·환벽당·식영정과 가까워 일정을 계획하기 좋다. 이 지역 농산물로 조리한 자연밥상은 보약이나 다름없다. 생태 숲길 걷기, 도예 체험, 수확 체험 같은 프로그램 또한 풍성하게 준비했다. 무등산을 한 바퀴 도는 51.8킬로미터의 옛길, 무돌길이 마을을 지난다.
문의 blog.naver.com/bandi3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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