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패터슨>은 미국 뉴저지주 패터슨에 사는 버스 운전사 패터슨의 조용한 삶을 그린다. 말하자면 ‘패터슨 씨의 패터슨시’랄까. 카메라는 패터슨이 버스를 모는 거리, 일 끝나고 들르는 동네 술집, 산책을 즐기는 공원 등 일상의 공간을 잠자코 좇아간다. 심심하면서도 반짝거리는 이 영화를 감상하고 나면 패터슨이란 도시가 자못 궁금해진다. 패터슨의 동선대로 패터슨을 여행하는 상상도 해 본다.
미국에 패터슨이 있다면, 한국엔 문경과 진주가 있다. 이들은 주인공의 이름이자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도시이며 영화 제목이기도 한, 신기하고도 아름다운 우연을 공유한다. 게다가 두 영화는 약 한 달간 시차를 두고 출현했다. <문경>은 8월 말 개봉해 지금 극장에서 관객과 만나는 중이고, <진주의 진주>는 8월 말을 끝으로 상영을 마무리했다. 여행하는 영화, 소도시를 조명하는 영화의 연이은 등장이 반갑기만 하다.
<문경>은 직장 생활에 지친 문경의 일탈과 짧은 여정을 담은 로드 무비다. 아끼던 후배의 고향인 경북 문경으로 떠난 문경은 도로에서 사고를 당할 뻔한 강아지 길순, 그런 길순을 돕고 반려인을 찾아 주려는 스님 가은과 의도치 않은 동행을 시작한다. 셋은 문경의 눈부신 산천을 함께 거닌다. 대야산 자락에 숨은 선유동계곡은 무릉도원 같고, 기암괴석 위에 올라앉은 주암정은 아득한 고사의 무대처럼 유려하다. 흥미로운 것은, 이따금씩 길순의 시점으로 문경을 비추는 장면이다. 색약에 가까운 강아지의 낮고 넓은 시야가 오솔길을 걷는 두 인간의 맨발을 가만히 응시할 때, 서로를 보듬는 존재들의 선한 온기가 화면 가득 어른거린다. 이들을 한데 끌어안는 문경의 넉넉한 품에 어깨를 기대고도 싶어진다. <문경>을 만든 신동일 감독은 부친의 고향인 경북 문경에 대한 남다른 애정으로부터 영화가 탄생했음을 밝힌 바 있다.
영화감독 진주의 고군분투를 다룬 <진주의 진주>는 무심코 사라지는 귀한 것들을 붙드는 영화다. 촬영을 예정했던 카페가 갑자기 문을 닫으면서 난처한 상황에 빠진 진주는 선배의 도움을 받아 경남 진주에서 새로운 촬영지를 물색하기로 한다. KTX에 올라 산 넘고 물 건너 진주에 도착한 진주. 내친김에 진주 로케이션 투어를 시작한다. 기와지붕이 근사한 진주역, 도시의 상징인 남강과 진주성, 복닥복닥한 진주중앙시장을 지나 간신히 발견한 예스러운 카페 ‘삼각지 다방’. 문제는 이곳 또한 철거를 이틀 앞두고 있다는 점이다. 반세기 동안 지역 문화계 사랑방으로 자리매김한 삼각지 다방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괴짜 예술가들은 진주를 설득해 철거를 저지하고 이곳의 역사를 보존하려 한다. 진주는 우여곡절 끝에 발견한 ‘진주’를 지켜 냈을까?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로 촉석루에 선 그의 표정이 한동안 잊히질 않는다. 영화 밖 현실에 존재하는 진짜 삼각지 다방이 아직 건재하다는 사실에 겨우 가슴을 쓸어내린다.
주인공과 도시가 동명인 영화라면, 충남 금산에 사는 노년의 신사 모금산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도 빼놓을 수 없다. 암을 선고받은 금산은 서울에 기거하는 영화감독인 아들 스데반을 불러 자신의 시나리오대로 영화를 촬영해 달라 요청한다. 이야기의 주무대는 물론 금산이다. 이발사인 금산의 금산 읍내 출근길, 아들 스데반이 귀향길에 들른 인삼랜드 휴게소, 금산이 찰리 채플린 분장을 하고 열연을 선보이던 부리면 적벽강까지. 금산 출신 임대형 감독이 정성껏 담아낸 지역 곳곳의 풍광이 영상의 깊이를 한층 더한다.
이쯤에서 영화를 따라가는 여행을 계획해 길을 나서면 어떨까. <변산>에 등장하는 전북 부안 작당마을의 너른 갯벌, <춘천, 춘천>의 구심점이 되는 강원도 춘천의 청평사,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의 주인공들이 누볐던 고색창연한 전북 군산의 근대문화유산마을···. 영화와 목적지의 목록이 끊임없이 이어지기를, 그리하여 더 많은 도시가 조명받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어디든 떠나기 좋은 계절, ‘영화’로운 여정이 당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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