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개방형 수장고
빙산의 일각. 박물관은 유물을 고심해서 선별하고 전시장에 내놓지만, 공간의 제약 같은 여러 여건 때문에 우리가 만나는 유물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공개된 유물보다 몇 배에 달하는 엄청난 수가 수장고에 고이 모셔진 상태. 1976년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 인류학박물관이 개방형 수장고라는 발상의 전환을 시도한 이래 이 흐름이 세계로 퍼졌고, 국립민속박물관도 동참했다. 유물 17만여 점, 아카이브 자료 102만여 점을 보유한 박물관이 파주에 개방형 수장고를 조성한 것이다. 입구에 발을 딛자마자 10미터 넘는 거대한 높이의 수장고 세 개가 시선을 압도한다. 한 점 한 점 전시한 박물관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 긴 세월에 걸쳐 같은 땅을 공유한 사람들의 흔적, 시간의 켜를 한눈에 본다. 수장고에 들어가 유물을 가까이 감상할 수도 있다. 유물 번호를 키오스크에 입력하면 설명이 나와 관람하기도 수월하다. 역사책에서 읽은 태항아리, 지금은 사라진 소주 됫병, 상여에 치장한 꼭두, 손으로 빚어 조금은 비뚤어진 모양새가 사랑스러운 백자 병. 높으신 분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의 유물에 어린 희로애락과 지혜가 오늘의 관람객을 다정하게 어루만진다.
02 민속아카이브
2004년 KTX가 개통하면서 기차 속도는 두 배 빨라졌다. 그 속도가 불러온 변화는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 정도다. 인류 역사가 세탁기, 칫솔, 스마트폰 같은 물건의 탄생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면 30년 전, 50년 전, 100년 전에서 우리는 얼마큼 멀리 왔고 또 어떤 부분은 여전할까. 2층의 민속아카이브에서 옛 사진을 보며 생각한다. 일부는 디지털 액자라 다이얼을 돌려 가면서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같이 전시하는 비디오테이프도 반갑다. 누군가는 이걸 평생 처음 만져 보겠다. 영상 속 회갑, 돌잔치가 정감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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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보이는 수장고 7
박물관은 수장고 열다섯 개 가운데 열 개를 공개한다. 7번 수장고는 새로 수집한 자료를 보관하고 등록하는 곳. 운이 좋으면 학예사가 실제 자료를 붙들고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렇지 않더라도 한쪽 벽면에 설치한 커다란 화면에서 흥미진진한 영상이 나오니 꼭 들러야 한다. 내용은 자료 입고‧측정‧등록부터 대여 과정까지, 우리가 모르는 박물관 업무 이야기. 직원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웃음을 자아내고, 여기에 미니어처 직원들을 그림으로 덧입혀 영상의 깜찍함이 그만이다. 옆의 보존과학실 체험도 재미 만점. 시간을 모은 공간 박물관에서는 시간 가는 줄 도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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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소장품 정보실
벽면 가득 소장품 사진이 흘러간다. 화면에서 궁금한 유물을 선택하면 사진이 커지면서 이름과 보관 위치 등 정보가 나온다. 빛에 약해 수장고형 박물관에서도 개방이 안 되는 종이류 유물인 편지를 터치했다. “우리 큰사위 진정한 군에게/ 먼저 귀여운 딸을 순산하고, 모녀가 건강하다는 전화 진심으로 축하하네. (중략) 진즉 축하 편지 낸다는 것이 내가 몸이 좋지 않아(독감) 좀 늦어져서 미안하네. 무척 기다렸지?” 1984년만 해도 장인이 사위에게 저렇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40년 사이에 소식을 전하는 방법도, 속도도 이만큼 달라졌다. 물론 마음은 같을 것이다. 박물관에서 새삼 실감한다. 오늘이 모여 역사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에 남는 유물 6
인상 깊은 유물이 한두 가지 아니지만, 특별하게 말을 건넨 유물 여섯 점을 골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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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양각장생문육각병
넉넉한 호박 같은 아래쪽과 좁고 기다란 위쪽에 모두 각이 살아 있는 조선의 육각 백자는 물이나 술을 담은 용기다. 해, 대나무, 소나무, 거북, 학, 사슴, 구름, 불로초를 양각했는데 각이 약간 틀어진 모양에서 하나하나 손으로 제작하던 시절이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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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울추
처음엔 지뢰인가, 수통인가 갸웃거렸다. 키오스크가 정확한 이름 ‘저울추’를 알려 준다. 디지털 저울이 널리 퍼진 지금은 생소해졌다지만, 그 이전 세대엔 생활필수품이었을 것이다. “저울추가 기운다”처럼 관용적 표현으로만 남은 물건을 실제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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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살, 다식판
곡식 귀한 때 간식이란 얼마나 특별했을지. 떡과 다식을 예쁘게 빚어 먹고 싶은 마음에 이런 떡살과 다식판을 만들었을 것이다. 목숨 수(壽), 복 복(福) 자나 출세를 기원하는 물고기 문양을 새겨 넣었다. 어느 물고기 문양에서는 이중섭 화백 그림도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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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항아리
높이 32센티미터 항아리에 빽빽한 문양이 정성스럽다. 과거 왕가에서는 아이를 낳고 나서 태를 봉해 길한 땅에 묻었다. 세력 있는 가문에서도 이를 행했다 한다. 병원에서 출산하는 오늘날엔 거의 사라진 풍습이나, 생명은 언제든 고귀하다. 이 태항아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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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밀이
독특한 모양이 눈길을 끌기에 키오스크에 번호를 입력하니 “뜨겁게 달구어 배 위에 올려 문지르는 기구”라 설명한다. 흙으로 빚어 구운 배밀이는 손잡이가 달려 있어 아픈 배를 오래오래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었겠다. 말하자면 조선 시대의 약손, 찜질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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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병
수장고엔 별별 유물이 다 있다. 곰이 야구방망이를 잡은 그림의 OB베어스 기념 컵, ‘Seoul Korea(서울 코리아)’가 쓰인 항아리 등. 아직 술이 남은 이 병은 서울의 한 중국 음식점이 폐업하면서 기증한 것이다. 평범한 일상도 시간을 입어 익으면 역사가 된다.
국립민속박물관 파주에서 한 걸음 더!
뮤직스페이스 카메라타
아나운서 출신 황인용 대표가 고향 파주에 연 클래식 음악 공간이다. 클래식 음악에 빠진 선생의 관심은 스피커로 이어졌고, 그 결과물이 앞쪽 벽을 차지하고 있다. 1930년대 유성영화 시대에 치열한 연구로 이름을 얻은 미국 웨스턴일렉트릭을 비롯해 독일의 클랑필름 등 1950년 이전에 제작한 엄청난 스피커들이 황홀한 향연을 펼친다. 음악과 음질 모두 감동. 지금도 황인용 선생이 무대 옆 보드에 곡목을 직접 쓰곤 한다. 입장료에 음료가 포함돼 있으며, 전시와 공연도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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