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의 은총이 함께했던 10월이 가고, 쉴 틈 없이 일상에 복무해야 할 11월이 왔다. 범사에 충실한 생활도 좋지만 일터에서, 교실에서, 집 안에서 이 계절을 다 흘려보내기엔 하늘과 바람과 날씨가 사치스러울 만큼 아름답지 않나. 이즈음 머릿속을 가득 메운 여행지는 대구 군위다. 팔공산 북쪽 자락에 날개를 걸친 모양으로 자리한 <삼국유사>의 고장. 누군가는 대구와 군위를 붙여 쓴 것이 여전히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대구는 지난 5월 팔공산이 스물세 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는 기쁨을 누렸고, 7월에는 군위군을 새 식구로 들이는 겹경사를 맞이했다. 걸음걸음에 축하하는 마음을 담아 대구가 된 군위를 천천히 산책하기로 했다.
#한 걸음
그림엽서 속 화본역
곱게 빛바랜 사진처럼 시간이 멈춘 듯한 산성면 화본마을. 조림산 아래 펼쳐진 이 자그마한 산간벽지가 넓은 세상과 만날 수 있었던 건 바로 철도 덕분이다. 1936년에 완공해 1938년 영업을 시작한 화본역은 오랜 세월 화본마을 사람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시대가 변하고 교통 환경이 정비되면서 하루 여섯 번만 열차가 정차하는 운전간이역으로 책무가 가벼워졌으나,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간이역’에 꼽힐 만큼 사랑스러운 역사는 지금도 많은 이의 발길을 모은다. 뾰족한 지붕, 예스러운 글씨체로 ‘화본역’이라 써넣은 입구, 철도청 시절부터 사용한 도장, 1971년 12월 21일에 승인해 갱지에 인쇄한 ‘선로이상통지서’까지. 화본역과 화본마을의 유구한 역사가 이 작은 역사에 고스란하다.
철길 너머에는 증기기관차의 흔적을 짐작하게 하는 급수탑이 우뚝 솟았다. 증기기관차에 물을 대던 급수탑은 1950년대에 디젤기관차가 등장하면서 제 역할을 잃고 가동을 멈추었다. 증기기관차는 사라졌지만 급수탑은 지금도 이 자리에 남아 옛일을 소환한다. ‘석탄 정돈 석탄 절약’이라는 문구를 적어 둔 급수탑 안엔 창문에 팔을 괸 소녀와 고양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백마 조각상이 놓였다. 그 모습이 꼭 과거와 현재, 미래가 교차하는 순간 같아서 어쩐지 오묘한 기분이 든다.
시간 여행은 역 바깥에서도 이어진다. 옛 산성중학교 건물을 활용해 1960~1970년대 학교 생활을 재현한 화본마을 체험 학교 ‘엄마 아빠 어렸을 적에’는 화본역에 방문한 여행자가 경유하기 좋은 코스다. 화목 난로와 풍금과 주판이 놓인 교실, LP를 쌓아 둔 다방의 뮤직 박스, 복도에 늘어선 온갖 자질구레한 그 시절 물건들…. 아련한 미소, 애틋한 향수를 부르는 시간이다.
#두 걸음
돌담길 따라 걷는 한밤마을
타임머신의 시계를 매만져 시간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간다. 이번엔 고려 시대다. 화본마을에서 부흥로를 타고 가다가 부계 교차로를 지나 한티로에 오르면, 10분여 만에 소담한 소나무 숲과 비석군, 솟대가 나타나 또 다른 마을 입구에 다다랐음을 알린다. 팔공산 북쪽 자락에 자리해 맑은 기운이 가득한 부계면 대율리 한밤마을이다. 950년경 부림 홍씨 입향조 홍란이 마을을 꾸린 이래 밤이 긴 두메산골이란 뜻에서 ‘대야(大夜)’라 불렀으나, 후대에 ‘한밤(긴 밤)’과 음이 같은 ‘대율(大栗)’로 바뀌었다. 물론 의미는 다르지만 어감만 보면 알이 꽉 차 함박 벌어진 밤송이가 떠오르는 이름인데, 가을빛이 완연한 마을의 첫인상도 그처럼 아늑하고 풍요롭기 그지없다.
유서 깊은 고택과 야트막한 돌담길이 자아낸 고즈넉한 정취에 ‘내륙의 제주도’란 별명도 생겼다. 예부터 물난리 등 자연재해를 막기 위해 쌓았다는 돌담은 오늘날 집과 집, 길과 길, 풍경과 풍경을 잇는 표지가 되어 여행자의 발길을 재촉한다. 눈 밝은 이들은 일찍이 마을의 아름다움을 발견해 출사지로 아껴 왔고, 끝내는 영상 매체로도 담았다. 지난 상반기에 방영한 드라마 <나쁜 엄마> 촬영지가 바로 이곳이다. 모자간의 화해, 이웃 간의 정을 그린 선한 이야기가 수수하고 소박한 마을 구석구석에 스며든 듯하다.
송림과 보호수를 따라 마을 어귀에 접어든다. 주민들이 평상에 모여 앉아 한담을 나누는 슈퍼가 보이고, 그 뒤로 양조장·방앗간·미용실·보건소 등 정감 어린 간판이 길 옆으로 죽 이어진다. ‘카페 호두나무’와 ‘뮤지엄 스테이’에 이르러 맞은편 골목인 한밤5길에 들어서니 남천고택과 대율리 대청 등 옛 건물이 모인 마을의 중심부에 닿는다.
남천고택은 부림 홍씨 문중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집이다. 후손들이 여러 차례 중수한 흔적이 남아 조선 시대 건축양식 전반을 엿보게 한다. 이 건물과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자리한 대율리 대청은 조선 초기에 세운 학사로, 지금은 마을 광장 역할을 하는 장소다. 어떤 방향으로 돌담길을 산책하든 대율리 대청을 이정표 삼는다면 지도 없이 발 닿는 대로 마을 구석구석을 거닐 수 있다. 때마침 햇살이 쏟아지는 돌담 위로 발갛게 익은 단감과 산수유 열매, 샛노란 들녘과 푸른 팔공산 능선, 하얀 뭉게구름과 높디높은 하늘이 저마다의 색으로 형형하다. 한가을, 한밤마을이다.
#세 걸음
석굴암보다 100년 앞선 삼존석굴
한밤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운 비경이 있다. 군위 아미타여래 삼존석굴이다. 팔공산 북쪽 기슭 깎아지를 듯한 절벽에 석굴을 조성하고 삼존석불을 모셨다. 통일신라 시대에 제작했다고 추정하는 삼존석굴은 한때 ‘제2석굴암’이라는 명칭으로 널리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경북 경주 석굴암 석굴보다 약 100년 앞섰을 뿐 아니라 석굴암 건축에 큰 영향을 주었다.
삼존석굴까지 가는 길엔 관음전과 범종각,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모전석탑이 줄지어 참배객을 마중한다. 울긋불긋하게 물든 나뭇잎이 머리 위로 드리우고, 청아한 시냇물은 절벽을 휘감아 흐르며 낮은 소리로 졸졸졸 노래한다. 석굴 가까이 다가갈수록 영묘한 기운이 온몸을 감싼다.
마침내 본존불인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을 알현한 순간. 온화한 미소와 평안한 자태가 중생을 위로하니, 가슴이 환해지고 번뇌가 씻긴다. 이토록 자비로운 찰나를 허락한 우연과 운명에 감사하며 손을 모아 기도한다. 돌멩이와 풀 포기 하나까지, 이 땅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오래도록 안녕하기를.
+ 내추럴 대구가 안내하는 군위 여행
대구의 생태 자원을 탐방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여행 프로그램 ‘내추럴 대구’를 제안한다. 군위군 대구 편입과 팔공산국립공원 승격을 기념해 생태 자연 테마를 중심으로 군위의 주요 관광지를 잇는 ‘함께하는 군위 한마당 코스’를 운영한다. 프로그램은 동대구역–군위 삼존석굴–중식(순두부 또는 산채비빔밥)–한밤마을(군위 남천고택 등)–화본역–엄마 아빠 어렸을 적에 체험–동대구역 순서로 이어진다. 문의 053-740-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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