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YAL PALACES
경복궁
1395년 창건, 백악산을 배경으로 광화문-흥례문-근정문-근정전이 이어지는 웅장한 구조
창덕궁
1405년 이궁으로 건설, 전각과 후원이 상대적으로 잘 보존되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창경궁
1483년 대비 세 분을 모시는 궁궐로 건립, 명정전은 5대 궁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
덕수궁
1897년 선포한 대한제국의 황궁, 전통 양식과 서양식 건축물이 어우러진 독특한 풍경
덕수궁
조선의 왕,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이 나라의 자립과 번영을 꾀하려 건립한 돈덕전. 대한제국의 영빈관이 돌아왔다.
고종의 꿈이 담긴 전각 돈덕전이 올가을 문을 열었다. 19세기 말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심한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나라의 심장이라 할 궁궐에 서양식 건물을 지음으로써 변화의 의지를 표명했다. 1895년 단발령을 내렸을 때 백성의 반응을 생각하면 양식 건물 신축이 얼마나 커다란 사건이었을지 짐작이 간다. 500년 역사를 지닌 찬란한 나라가 위태로운 처지에 놓이고, 고종은 대한제국을 자립 가능한 중립 국가로서 세계에 인식시키고자 했다. 고종 즉위 40주년을 맞는 1902년에 각국 인사를 초대해 대형 예식을 열기로 계획하고 돈덕전을 지었다. 그들에게 대한제국의 건재함을 보여야 하는 만큼 화려하고 정성스러운 건물이었다.
예식은 콜레라가 유행하는 등 여러 사정 때문에 계획대로 치르지 못했고, 건물마저 일제강점기에 사라졌다. 현재 덕수궁에 남은 석조전보다 이른 시기에 건축한 데다 대한제국과 고종의 절절한 기원을 품었다는 역사성을 기려 재건한 돈덕전은 옛 사진을 고증한 외관부터 눈에 띈다. 붉은 벽돌과 민트색 장식이 어우러진 벽에 원뿔형 지붕이며 테라스가 아름답다. 내부는 즉위 40주년 기념 칭경 예식을 상상해 재현한 미디어아트, 대한제국의 외교와 과거의 돈덕전을 알려 주는 전시 등으로 채웠다. 고풍스러운 가구로 꾸민 자료 열람실과 휴게실은 편안히 시간을 보내기도, 사진을 찍기도 좋다. 대한제국의 꿈을 120여 년이 지난 오늘 다시 만난다. 해방된 자유로운 나라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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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에서 한 발짝 더
경희궁공원
그 유명한 덕수궁 돌담길을 20여 분 걸으면 경희궁이 나온다. 고종 시절 덕수궁과 경희궁은 홍교라는 다리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광해군이 창건한 궁은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상당 부분 훼손되어 원래의 위용을 잃었으나, 인왕산을 배경으로 선 숭정문과 숭정전의 장엄함은 여전하다. 지형을 살려 층층이 올라선 전각의 기와지붕이 저 멀리 현대의 도시와 한눈에 들어오는 장면도 경희궁을 둘러보는 즐거움을 더한다. -
덕수궁에서 이건 꼭
한국 전통 양식 건축과 서양식 건축이 공존하는 풍경은 덕수궁만의 매력이다. 낮에도 좋지만 조명이 켜지는 밤의 궁궐은 일부러 찾아가 감상할 만큼 아름답다. 석조전은 침실‧거실‧서재 등을 복원해 놓았으며, 석조전 서관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으로 개방한다. 현재 한국인이 사랑하는 화가 장욱진의 <가장 진지한 고백>전을 개최하고 있다.
경복궁
세종은 세자가 나라에 빛 같은 존재가 되길 바라며 계조당을 지었다. 재건한 계조당이 문을 열었다.
조선의 역사는 길다. 500년 세월 동안 궁궐이 같은 모습이었을 리 없다. 정치 공간이자 생활공간은 필요에 따라 건물을 짓고 허물고 변형해 사용해 왔다. 올가을부터 관람객을 맞은 계조당은 세종이 후에 문종이 되는 세자를 위해 1443년 건립했다. 세자 출신이 아닌 세종은 개국 초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번영을 이끌면서 아마도 후계를 제대로 준비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학문에 힘쓰되 현실 정치를 알고 잘 적응하기를, 신하에게 존중받는 존재로 우뚝 서기를 바라는 마음.
계조당에서 세자는 신하들의 조회를 받고 사신을 접견했으며 생일 축하 예식을 벌였다. ‘계조(繼照)’라는 이름처럼 세종의 빛을 이어 성군으로 성장해 나갔다. 문종의 유지를 받든 단종이 건물을 허물었고 조선 후기에 고종이 재건한다. <고종실록>에서는 “세종대왕 때에 가장 융성하였다”라는 고종의 전교와 함께 계조당을 언급한다. 그토록 오래된 이야기를 가져올 만큼 고종도 절실했던 듯하다.
애써 지었다가 일제강점기에 사라진 건물을 이번에 새로 올렸다. 못을 쓰지 않고 나무와 나무를 맞물려 맞추는 등 전체 과정을 장인이 손으로 수행했다. 단청 작업을 하려면 나무가 말라야 하기에 아직 나뭇결 그대로고 현판도 달기 전이다. 지금은 ‘신축’ 느낌이 강하지만, 자연 재료 특성상 시간이 지날수록 아름답게 세월을 머금겠다.
경복궁에서 이건 꼭
경복궁에는 보물로 지정된 굴뚝이 무려 2개다. 연기를 빼는 그 굴뚝이 왜 문화재인지 자경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궁궐에 들어온 여인은 외출이 지극히 어려웠고, 여인의 공간을 ‘꽃단장’해 마음을 달랬다. 수놓은 듯한 담장부터 마루의 난간 장식까지 자경전은 어여쁘다. 굴뚝에도 장수를 기원하는 십장생을 새겼다. 일대 전체가 작품 같은 이곳에선 어떻게 찍어도 인생 사진이 나온다.
경복궁에서 한 발짝 더
국립민속박물관
궁궐이 왕가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면 바로 옆 국립민속박물관은 백성의 삶을 알려 준다. 농사를 짓고 달을 보며 소원을 빌고 김장을 담그고 다듬이질을 한 선조의 하루하루가 손에 잡힐 듯 펼쳐진다. 대청마루에 앉아 대형 미디어아트 속 마을의 1년을 감상하는 시간이 하이라이트. 새 지저귀고 꽃비 날리다 귀뚜라미 울고 눈 내리는 영상이 소소하고도 확실한 행복을 안긴다.
동궐로 떠나는 여행
경복궁 동쪽의 창덕궁과 창경궁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붙어 있어 동궐이라 묶어 불렀다. 계절을 완상하기 좋은 궁궐이다.
창덕궁
한국에서 가을에 어디를 갈지 물을 때 첫손에 꼽을 만한 장소다. 숲과 정자, 연못의 어울림이 감탄을 자아내는 후원 덕분에 창덕궁이 더욱 빛난다. 수많은 왕과 왕족이 살았던 만큼 영조가 과거 시험을 주관한 곳, 정조가 신하들과 재치 어린 문답을 나눈 곳, 효명세자가 책을 읽은 곳 등 이야기가 생생히 전한다. 궁궐 입구 금천교는 1411년에 놓고 지금껏 한자리를 지켜 왔다. 태종 이후 우리가 아는 수많은 왕이 이 다리를 건넜다 생각하니 왠지 가슴이 뭉클하다. 이런 감동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위원이라도 모를 것이다.
창덕궁에서 한 발짝 더, 서울우리소리박물관
소리가 주는 위안. 한옥 박물관에서 전통 소리를 듣는다. 논 매는 소리, 멸치잡이 노래, 세상을 떠난 이를 보내는 노래, 입에서 입으로 전해 온 하나하나가 어찌나 다정한지 심신이 스르르 풀어진다. “아침 비는 해님 눈물, 저녁 비는 달님 눈물, 우리 애기 잘도 잔다”. 소리가 마음을 어루만지는 시간, 창밖으로는 창덕궁이 들어온다.
창경궁
성종이 왕실의 어르신인 대비 세 분을 모시려 건립한 궁은 건물 배치도 좀 더 자유로운 느낌이다. 통명전 옆 언덕에 서면 아래로는 궁궐 전각이, 멀리로는 남산서울타워가 함께 들어오는데 한양에서 출발한 대도시 서울을 사랑하게 하는 풍경이다. 후원에는 연못 춘당지와 나무가 조화롭고, 이 땅 최초의 서양식 온실도 사진기를 켜게 한다.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었다 1616년 다시 지은 홍화문은 5대 궁궐 정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라 의미가 깊다. 덕수궁과 더불어 상시 야간 관람이 가능하다.
창경궁에서 한 발짝 더, 종묘
일제가 끊어 놓은 창경궁과 종묘 연결 공사를 지난해 여름 마쳐, 두 소중한 공간이 이어졌다. 조선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사당인 종묘는 엄숙한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정문 밖이 곧바로 복잡한 종로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위엄 어린 건물과 우거진 숲이 대도시의 바쁘고 지친 영혼을 위로하고 사색의 시간으로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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