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스크 피니시로 완성한 풍미
“발베니는 윌리엄 그랜트 가문이 글렌피딕 증류소를 세우고 6년이 흐른 뒤 1893년에 설립한 증류소입니다. 증류소 주변에 위치한 동명의 고성에서 이름을 땄죠. 두 증류소는 위스키 역사에서 특기할 만한 업적을 남깁니다. 글렌피딕이 싱글 몰트 시장을 열어젖힌 개척자라면, 발베니는 캐스크 피니시 제조법을 최초로 사용해 복합적인 풍미를 완성한 선구자입니다. 발베니의 몰트 마스터 데이비드 C. 스튜어트가 개발한 캐스크 피니시는 위스키를 두 가지 오크통에 옮겨 담는 연속 숙성 방식을 뜻합니다. 이렇게 제조한 위스키는 보다 깊은 향미와 입체적인 질감을 지니게 되지요. 엘리자베스 2세는 이 공로로 그에게 훈장을 수여했습니다.”
위스키의 맛을 알게 해 준 위스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발베니는 더블우드 12년입니다. 달콤하면서도 고유의 풍미가 적절히 어우러진, 좋은 밸런스를 지닌 위스키죠. 언제 마시더라도 더블우드 12년에서 느껴지는 건과일의 향내, 꿀처럼 은은한 달콤함이 저를 기분 좋게 하거든요. 고백하건대, 바텐더라는 직업에 갓 입문한 시절엔 ‘위스키가 맛있나?’라는 의문을 품었습니다. 2010년대 초반만 해도 많은 이가 위스키를 소주처럼 즐기는 경향이 있었어요. 제가 처음 근무했던 바조차 노징 글라스가 없어서 샷 글라스에 내곤 했으니까요. 그러다 우연히 발베니를 맛보았고, 부드럽게 넘어가는 달콤함에 매료됐습니다. 그때부터 위스키를 음미한다는 게 어떤 감각인지 깨쳤달까요. 그 후로 고객님께도 자신 있게 발베니를 소개하며 추천했습니다. 자연히 맛과 향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 상황도 왕왕 있었는데, 발베니의 라벨이 요긴하더군요. 제조 과정과 풍미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를 표기해 공부하기에도, 판매하기에도 유용했습니다.”
여름밤을 위한 발베니 레시피
“좋아하는 친구들과 근사한 식사를 마치고 위스키를 디저트로 즐기는 순간, 행복이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저는 요즘 발베니에 약과를 곁들이곤 해요. 달콤함에 달콤함을 더하는 격이라 우울하던 기분도 순식간에 끌어올릴 수 있지요. 발베니는 오직 발베니만으로 오롯하지만, 색다른 맛을 찾아 헤맬 애주가를 위해 몇 가지 레시피를 소개합니다. 스카치위스키를 기주로 하는 칵테일입니다. 발베니 더블우드 12년에 스위트 베르무트·오렌지 주스·체리 브랜디를 넣어 ‘블러드 앤 샌드’로, 스위트 베르무트와 앙고스투라 비터스를 더해 ‘로브 로이’로 맛보시길 권합니다. 하이볼로 마신다면 발베니 캐리비안 캐스크 14년이 좋습니다. 아메리칸 버번 캐스크에서 숙성 후 캐리비안 지역에서 럼을 숙성했던 캐스크에 넣어 다시 서너 달 숙성한 위스키죠. 그 덕에 럼 특유의 스파이시한 맛이 올라오는 매력적인 술이에요. 여기에 진저 비어와 소다를 반반 섞어 마셔 보세요. 레몬 껍질을 살짝 비틀어 올리면 더 화사하고 향긋한 맛이 날 거예요.”
빙하기가 와도, 발베니
“발베니의 위상을 짐작하게 하는 상징적인 장면도 있습니다. 지구에 빙하기가 덮친 재난을 그린 영화 <투모로우>의 대단원에서, 스코틀랜드 기상관측소의 발전기 연료가 끝내 소진되자 누군가가 발베니 더블우드 12년을 찾아내 이를 연료로 써 보자고 제안합니다. 기상관측소 소장은 “그건 12년 스카치야!”라고 일갈하곤, 발베니를 건배주로 사용합니다. 영국을 위해, 인류를 위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위해 건배하는 이들의 얼굴에서 미소가 가시자, 이윽고 펼쳐지는 지구 최후의 순간. 발베니만큼 인류의 마지막 존엄을 지키기에 완벽한 술도 없지 않을까요.”
강동희 헤드 바텐더
2021년부터 웨스틴 조선 서울 라운지앤바 헤드 바텐더로 근무하고 있다. 복잡하고 어려운 맛보다 직관적으로 쾌감을 일깨우는 맛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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