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에 가까워지자 KTX는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철로가 둘로 나뉘는 것이다. 직전까지 함께한 경부고속선이 오른편에서 빠르게 사라진다. 이제 기차는 동해선을 달린다. 휘어가는 갈림길을 통과했기에 당분간 곧은길이 이어진다. 언젠가 또 휘겠지만 다시 곧게 나아가겠으니, 삶처럼.
솔숲이 감은 비탈의 푸른 향기, 보경사
정오 무렵 포항역에 도착했다. 여기는 이미 초봄이다. 붓질한 듯 파란 하늘에서 이른 계절의 공기가 번져 내려온다. 승강장에 가라앉은 햇살에서 귀로 들리지 않는 소리가 들린다. 움틈을 준비하는 생명의 노래를 마음 기울여 감상했다. 남쪽 대지가 뽑아내는 가락이 머지않아 재회할 계절 같아 다정하다. 지금은 하늘과 햇살 말고는 생각할 것이 없어 그저 걸으며 보고 듣는다. 무엇을 걱정할까. 초봄의 빛이 따듯하고 우리는 안녕하다. 기차 그림자마저 훈훈하게 느껴지는 날, 먼 데서 온 여행객에게 봄을 미리 보여 주는 포항이 참으로 고맙다.
포항역에서 나와 내연산으로 간다. 포항 북단 내연산은 안(內)으로 끌어들인다(延)는 뜻이다. 처음엔 종남산이었다가 신라 시대 진성여왕이 난을 피해 들어와 내연산으로 고쳐 불렀다. 이름 지은 연유를 추측케 하는 이야기인데, 보경사 설화를 더하면 내연이라는 이름이 새로워진다. 7세기 초, 고승 지명이 신비한 거울인 팔면보경을 구했다. 그는 명당에 거울을 묻고 절을 세우고자 했다. 해가 뜨는 땅으로 가서 바닷가를 거니는 동안 오색구름이 뒤덮은 산을 보았다. 열두 폭포가 수려한 산에 큰 연못 하나. 그는 뜻한 대로 연못을 메우고 거울을 묻었다. 그리고 보배로운(寶) 거울(鏡), 보경사를 창건한다.
거울은 비춘다. 좋다고 예쁘게, 싫어서 누추하게 지어내지 않고 반영하기만 한다. 마음 또한 그러할진대 거울은 먼지를 뒤집어쓴다. 아득바득 지어내는 사이에 떨어지는 잔재들이다. 티끌 쌓인 거울 속 모습은 꼭 그만큼 탁하겠으나 보경사 가는 길은 무척이나 맑다. 솔숲이 감은 비탈에 사철 푸른 향기가 고였고, 제때를 기다리는 무릇이 초록 정취를 퍼뜨린다. 소나무 틈에 보이는 보경사 처마 선이 소나무를 닮아 건실하다. 천왕문부터는 내연산 풍경이 경내로 쏟아진다. 송림 가운데 트인 공간, 전각들이 들어선 이 작은 분지는 정말 봄이다. 내연산은 더없이 포근해 봉우리와 능선이 꽃잎이요, 보경사가 꽃받침이다. 바깥을 배회해 오던 시선을 안으로 끌어들여 비추어 본다. 마음이 주위를 가만하게 반영한다. 오래전에 지명은 팔면보경을 구해 묻었다. 그건 거울이었고 마음이었으며 세상이었다. 솔숲 푸른 향기가 밀려드는 보경사에 내연산 풍경이 봄비처럼 내리고 있다.
열두 폭포의 비경, 내연산 청하골
범종각에서 한 걸음 내딛자마자 계곡이다. 내연산 청하골이 이곳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내연산은 예부터 숱한 묵객이 들러 찬탄할 정도로 산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1733년 청하 현감으로 부임한 겸재 정선은 청하골 깊숙이 들어가 ‘내연산 삼용추’를 그렸고, 조선 중기 문신 조경은 시문집 <용주유고>에서 내연산 절경을 칠언율시로 읊었다. 쓰고 그려서 남기려 했던 아득한 순간이 눈앞에서 펼쳐진다. 사위가 고요한 보경사를 소요하고 순식간에 겹겹이 층진 능선을 마주하는 놀라운 조화. 산등성에서 굽이쳐 온 골짜기 위에 기암괴석이 우뚝 솟아 걸을수록 땅이 그윽하다.
속이 깊은 청하골엔 폭포가 자그마치 열두 개나 놓였다. 해발 710미터로 높은 산은 아니어도 930미터 향로봉, 775미터 천령산, 792미터 동대산에 둘러싸인 산맥이 장대해서 계곡물이 종종 아래로 흐름을 바꾼다. 그렇게 보경사에서 도보 20여 분 거리의 상생폭포를 기점으로 보현・삼보・잠룡・무풍폭포가 연달아 나오고, 청하골의 백미인 관음・연산폭포가 뒤를 이어 등장한다. ‘내연산 삼용추’가 바로 청하골 폭포의 장관을 담았다. 기암괴석에서 튀어나와 갖은 모양새로 낙하하는 물줄기, 얌전하다가 이따금 휘몰아 꽂는 심산유곡을 정선은 죽죽 그어 내리는 수직준을 통해 묘사했다. 수백 년 전 일이건만 감흥에 겨워 붓을 든 당시가 오늘 선명하다. 여전히 내연산 청하골은 산이되 산보다 높고, 계곡이되 계곡보다 유장하다. 겹겹이 층진 능선의 땅과 더불어 지금을 쓰고 그린다. 붓끝에서 피어오르는 순간이 점점 깊어진다.
청하골 트레킹을 마치고 보경사에 왔다. 품이 큰 내연산이 거듭 여행객을 이끈다. 보경사에서 1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자락에 내연산치유의숲이 자리한 것이다. 내연산치유의숲은 전국 45개 치유의숲 중 하나로 2021년 문을 열었다. 스트레스 해소 등 산림이 몸과 정신에 주는 혜택을 프로그램에 녹여 소개하는 덕분에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자연에 살던 사람이 편의를 쫓겠다고 빠져나간 역사가 길지언정, 자연은 너그러워 계속 보호하고 내놓는다. 얼마나 다행인지. 숲에 돌아온 사람을 반갑게 맞는 내연산치유의숲 울창한 산림에서 평안을 누린다.
기암괴석에서 튀어나와 갖은 모양새로 낙하하는 물줄기, 얌전하다가도 휘몰아 꽂는 심산유곡.
내연산 청하골은 산이되 산보다 높고, 계곡이되 계곡보다 유장하다.
자연의 은덕, 내연산치유의숲
이곳 체험 프로그램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바라만 봐도 충만해지는 숲길에서 초등학생이 휴대전화 없이 놀이하듯 산책한다. 부모는 배 속 아이에게 태담을 건네고, 부부와 자식은 오순도순 모여 볕을 쬔다. 어르신은 체조를 하며 나른한 몸을 활짝 편다. 혼자이거나 함께하거나 알찬 시간이다. 가지려 아등바등하는 게 익숙하고 내어 주는 일은 낯선 때에 마냥 베푸는 숲은 귀하고 또 귀하다.
이날 우리는 숲에 앉아 티베트 전통 악기인 싱잉볼 소리를 들었다. 산림치유지도사가 싱잉볼을 두드리니 낮은 음파가 잔잔하게 퍼진다. 파동은 내리 맴돌아 얼굴을 도닥이고 가슴을 달랜다. 축복 같은 편안함이 오래도록 머물러 사람과 자연이 아늑해진다. 센터에서는 족욕을 했다. 족욕은 참여 인원, 날씨에 따라 센터 전용 공간에서 진행한다. 편백 향 흐드러진 자그마한 방에 들어 온기 어린 물로 몸을 쉬었다. 아래에서 올라온 기운이 마음에 닿는다. 따듯하다. 포항에서 보낸 여정이 모두.
기차는 휘었다가 곧게 나아갔고 우리는 포항에 왔다. 이것이 오늘의 전부가 되었다. 늘 길을 걸어도 이 길이 어디로 이끌어 주는지 영영 알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어디가 나은 길일까’ 고민하는 동안 갈림길은 스쳐 지나간다. 모르는 것이 많은데 이제 아는 사실이 있다. 내연산 계곡은 깊어서 아름답고 숲은 너그럽게 내어 준다. 보경사에는 내연산 풍경이 봄비처럼 내린다. 질문을 버려 온몸으로 맞이한 포항은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포항이었다. 답은 갈림길에서 찾는 게 아니라 그 너머에 존재해서 여기가 바로 그곳이다. 돌아가는 KTX가 다시 휘었다가 곧게 나아간다. 이보다 나은 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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