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에서 1887년에 걸쳐 영국, 아일랜드의 모든 증류소를 방문해 기록한 학자 앨프리드 바너드는 명저 <영국의 위스키 증류소>에서 썼다. “이 증류소는 가파른 기슭에 자리를 잡았다. 지역에서 가장 호전적인 물줄기가 흘러 물레방아 여러 개를 너끈하게 움직인다. 강 주위엔 아주 오래된 건물들이 놓였다. 그중 하나가 작업 공간이다. 보리 헛간, 방앗간, 발아 시설이 전부 건물 하나에 들어섰다. 그나저나 풍경이 아름답다. 언덕 정상에 올라 계곡을 내려다보니 시선 닿는 데마다 전원의 서정이 가득하다.” 그때도 에드라두어 증류소는 무척 작았고 또한 아름다웠던 것이다. 터멜강이 세차게 흐르는 영국 스코틀랜드 하일랜드 피틀로크리 기슭, 아주 오래된 건물과 작다는 말이 부족한 규모가 그대로이며 여전히 좋은 위스키를 내어 놓는 그곳.
작은 증류소, 큰 위스키
경제학에 ‘규모의 경제’ 개념이 있다. 생산량을 높이면 이윤이 늘어난다는 의미다. 생산 여부와 관계없이 기업은 고정비용을 지출하는데, 제품을 출시하지 못하더라도 시설을 유지하고 세금과 보험료를 납부한다. 다른 변수는 제외해서 간단하게, 고정비용은 말 그대로 고정되어 있으니 매출이 증가할수록 그 차액인 이윤이 덩달아 커진다. 더욱 간단하게 말해 다다익선, 많이 생산해야 많이 번다. 에드라두어는 홈페이지에 이런 문구를 게시했다. “직원이 부족합니다. 직원과 수출 사업을 보호하기 위해 증류소 투어를 중단합니다.” 숱한 위스키 증류소가 인력을 따로 두고 투어 프로그램을 실시한다. 입장권 판매 수익이 쏠쏠할뿐더러, 증류소를 찾아와 둘러보고 시음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충성도 높은 고객이 된다. 스코틀랜드에는 투어 프로그램을 모아 소개하고 고객과 증류소를 연결하는 전문 업체가 존재한다. 그러나 에드라두어는 기한조차 정하지 않고 중단했다. 직원이 두 명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위스키부터 만들어야 하니까.
19세기 초, 혹은 그보다 전에 피틀로크리 농부들은 협동조합을 결성했다. 끼닛거리에 쓰고 남은 보리로 위스키를 주조해 보자는 아이디어였다. 나중에 이들은 스카치위스키 본산 격인 하일랜드의 증류 선구자로 불리게 되지만 구성원이 몇 명이었는지는 자료가 모자라 알 수가 없다. 한 세기 넘게 세 명이 일했다 주장한다는 점에서 추정컨대 수십 명은 아니었다. 자료가 그렇거니와 직원 수 역시 과거 셋이나 최근 둘이나 매한가지로 부족하다. 규모의 경제는 논외로 치더라도 영업, 유통, 홍보는 증류소를 비롯한 업체가 해야 하는 일이다. 에드라두어의 넘치는 명성을 떠올릴 때, 농담하느냐고 묻고 싶어져도 에드라두어는 정말 그랬다. 서정 가득한 전원에서 셋 또는 둘이 오직 위스키였다.
각설하고, 조합 설립 무렵에 영국과 스코틀랜드는 갈등했고 이에 영국이 스코틀랜드 증류소에 징벌에 가까운 세금을 부과했다. 계곡에 숨어든 사람들은 밀주를 빚어 저항했다. 피틀로크리 협동조합도 감시의 눈을 피해 비밀스럽게 증류소를 운영했다. 그러던 중 더 글렌리벳이 스코틀랜드에서 최초로 증류 면허를 취득하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발판 삼아 1825년, 마침내 에드라두어가 무대에 등장한다. 물론 꾸준하게 밀주를 주조했기에 중고 신인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손으로, 몸으로 만드는 한 방울
에두라두어의 역사는 상승과 하강을 반복했다. 1841년 협동조합이 몰락한 다음 12년 뒤에야 다른 농부 둘이 인수했고, 경영난에 시달리다 1884년 존 매킨토시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 그는 죽어 가던 증류소를 재건하고 상표를 혁신해 에드라두어를 대중이 주목하는 위스키 목록에 올렸다. 앨프리드 바너드가 <영국의 위스키 증류소>를 저술하기 위해 들른 그 시절이다. 미국 금주법 시행, 세계공황으로 업계 분위기가 밑바닥에 떨어진 20세기 초에는 능력을 인정받은 주류상을 영입해서 어려움을 타개해 갔다. 소규모라고 말하기에도 멋쩍은 증류소가 참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그러던 1930년대, 기묘한 상황이 벌어진다. 미국의 거물 마피아가 에드라두어 증류소를 매입했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파다해졌다. 훗날 영화 <대부> 주인공 돈 비토 코를레오네의 모티프가 되는 그는 실제로 위스키 애호가였다. 특히 에드라두어를 얼마나 자주 마시는지, 일일이 구입하기 귀찮아 증류소를 샀다는 우스갯소리가 나돌았다. 진실은 저 너머에 존재할 테나, 1930년대 소문을 포함해서 몰락하고 번창한 에드라두어의 이야기는 흥미를 잡아끌기에 충분할 만큼 매력적이다.
이는 200여 년 역사의 전반기였다. 그 후 현재까지 역사는 에드라두어 증류소의 위스키 주조 방식이 말해 준다. 만약 앨프리드 바너드가 2023년에 방문했다면 이렇게 썼겠다. “시설이 전부 건물 하나에 들어섰다. 컴퓨터만 빼고.” 자동화 시스템이 불가결한 지금은 위스키 증류소에서도 재료 동선 관리와 가열, 분쇄 공정을 컨트롤 패널을 조작해 편리하게 해결한다. 당연히 최신 설비를 구축하는 곳이 많아지고 있다. 반면에 에드라두어 증류소의 경우 50년 된 워시 백(발효 용기)은 사람으로 치면 청년에 불과하다. 110세인 매시 툰(당화 용기) 등 인간문화재와 진배없는 설비가 굳건한 공간에서 작업을 손만으로 진행한다. 땀방울 흘려 가며 부딪혀 밀고, 물러나 당긴 끝에 탄생하는 에드라두어 한 방울.
역사가 증명하는 맛
지금은 조금 늘어났다지만, 에드라두어 연간 생산량은 9만 리터였다. 대규모도 아닌 평범한 증류소가 일주일간 생산하는 양과 똑같다. 끈질기게 살아남는 동안에 그들은 다른 무엇을 보았고, 그것을 붙잡아 올라갔다. 오늘날 저 위에 선 에드라두어는 말한다. “여기는 전통을 이은 주조 기술과 그것을 예술로 승화한 우리의 정신이 대량생산에 승리하는 현장이다.” 에드라두어를 마신다. 집념과 끈기의 영롱한 방울들이 향을 마음에 새긴다. 맛을 가슴에 각인한다. 한 잔 더, 그들이 계속 승리하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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