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호가 속도를 줄이더니 영월역에 천천히 정차한다. 기차에서 내리자 유려한 산세가 가장 먼저 눈에 든다. 역 밖으로 나가 주변을 둘러본다. 방금 비가 멎어서인지 꾸물거리는 안개가 산과 강 위를 유영한다. 안개처럼 누벼 볼까, 오묘한 풍경 속으로 발을 딛는다. 가을이 다가오는 즈음, 강원도 영월을 찾았다.
하늘을 볼 수 없는 사람, 김삿갓
예능 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하는 ‘절대음감 게임’을 떠올려 본다. 다섯 글자로 이루어진 단어를 일정한 규칙에 따라 차례로 한 음절씩 힘주어 발음하는 게임인데, 여기에 꼭 등장하는 제시어가 있다. 바로 ‘김삿갓삿갓’이다. 단어를 발음하고 나면 의문이 남는다. 김삿갓은 왜 김삿갓이 되었을까? 이 궁금증을 말끔히 해결해 줄 곳이 난고 김삿갓 문학관이다. 서서히 걷히는 안개 사이로 삿갓 모양 지붕이 드러난다. 의문의 답은 저 문학관 안에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김삿갓의 본명은 김병연이다. 조선 후기인 1807년, 그는 안동 김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당시 안동 김씨 가문은 세도정치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의 삶은 탄탄대로가 예정된 셈이었다. 그러나 1811년, 서북 지방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이 김병연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다.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곳에서 관직을 지낸 김병연의 할아버지 김익순은 목숨을 건지기 위해 난군에 항복하고 적에게 협력하는 대역죄를 저지른다. 본래 멸문지화를 당해야 마땅하나, 김익순만 처형되고 나머지 가족은 멸시를 피해 다니다 영월 산골짜기에 자리를 잡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김병연은 글짓기에 재능을 보이며 무럭무럭 자란다. 스무 살이 되던 해, 그는 과거에서 김익순의 죄를 비판한 시를 지어 급제한다. 하지만 현실은 잔인했다. 김익순이 자신의 할아버지임을 알게 된 그는 괴로워한다. 스스로 조상을 욕되게 한 꼴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후, 차마 하늘을 볼 수 없다는 이유로 큰 삿갓을 쓰고 집을 나서 방랑한다. 방랑 시인 김삿갓의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후세에 천재 시인이라 불린 김삿갓은 57세의 나이로 전남 화순에서 눈을 감는다. 후에 그의 아들 김익균이 묘를 이장해 지금은 영월에 잠들어 있다.
시인의 자취, 난고 김삿갓 문학관
문학관 제1전시실은 김삿갓의 일생과 방랑 여정을 테마로 꾸몄다. 그는 기구한 과거로 양반의 삶을 등졌지만, 빛나는 재능까지 던지지는 않았다. 방랑하며 보고 느낀 것을 써 내려갔고, 때로는 시로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었다. “가련한 행색의 가련한 몸이/ 가련의 문 앞에 가련을 찾아 왔네/ 가련한 이 내 뜻을 가련에게 전하면/ 가련이 이 가련한 마음을 알아주겠지”. 이름이 가련인 이에게 쓴 ‘가련기시(可憐妓詩)’다. 연마다 ‘가련’을 넣어 재치 있게 표현한 시처럼 김삿갓도 분명 유쾌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는 방랑을 하다 마을에 다다르면 서당이나 서원 같은 교육기관을 가장 먼저 찾았다 한다. 낡은 옷, 얼굴이 보이지 않는 큰 삿갓 등 외관만 보고 그를 문전박대하는 이도 많았다. 그럴 때 김병연은 화를 내기보단 시를 지었다. 겉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이들을 시를 이용하는 점잖은 방법으로 비판했다. 김병연의 시만큼 그와 관련한 설화가 무수할 정도이니, 김삿갓이란 이름이 전국에 널리 퍼진 이유도 짐작이 간다.
제2전시실에서는 김삿갓의 시를 읊고 쓴다. 벼룩, 고양이를 주제로 한 시 등 언어를 자유자재로 다루어 쓴 작품을 한 글자씩 곱씹는다. 김삿갓의 시 중 마음에 드는 구절을 선택해 터치패드에 시구절 쓰기, 김삿갓 시로 창작한 국악 듣기 등 체험거리도 다양하다. 소박하지만 알찬 문학관에서 시를 읊고, 쓰고, 음미하며 그의 생애를 톺아본다. 김삿갓이 방랑을 시작한 곳도 영월, 죽어서 묻힌 곳도 영월이다. 김삿갓의 시작과 끝에는 영월이 있었다.
고민이 있을 땐 밤하늘을 올려다보거나 전국을 돌며 방랑한 김삿갓처럼 무작정 여행을 떠나 보자.
삶의 이유를 찾으며 헤매는 과정이 여행이자 삶일 것이다.
하늘과 가까운 곳, 별마로천문대
김삿갓이 한평생 보지 않았던 하늘과 맞닿은 곳으로 올라간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가면 별마로천문대 앞에 도착한다. 별마로는 ‘별’과 ‘마루’, 고요할 ‘로’의 합성어로 별을 보는 고요한 정상이란 뜻이다. 이름처럼 천문대 주위가 고요하다. 해발 799.8미터라 서늘한 기운도 감돈다. 천문대에 들어서자 한순간에 분위기가 바뀐다. 새까만 내부에 어리둥절했으나 어둠에 익숙해지니 여기저기서 무언가가 신비롭게 반짝인다. 흰 천에 빔 프로젝터로 영상을 쏘아 은하수를 표현한 ‘녹스의 물결’이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고, 우주의 탄생을 형상화한 미디어 아트 ‘카오스의 틈’이 1층 너른 벽면을 채웠다. “우아!” 영상을 보는 사람들이 탄성을 멈추지 않는다.
우주로 공간 이동을 한 것 같은 부푼 마음을 안고 지하 천체투영실로 내려간다. 좌석에 앉고는 버튼을 눌러 등받이를 젖힌다. 잠시 후 조명이 꺼지더니 천장의 돔 스크린에 별로 가득 찬 밤하늘이 펼쳐진다. 곧이어 천문해설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별마로천문대 천체투영실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지금부터 저와 함께 별자리 여행을 떠나 볼까요?” 여행을 마다할 이유는 없다. 힘차게 “네!”라고 대답한다. 계절 별자리를 찾는 법, 별자리에 얽힌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니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간다. 이번엔 주관측실과 보조관측실이 있는 4층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별마로천문대를 방문할 땐 ‘천문대는 밤에 가는 곳’이라는 생각은 넣어 둬도 좋다. 낮에는 태양의 흑점과 홍염을 관찰하고, 밤에는 성운과 성단, 태양계의 행성과 달 등 여러 가지 천체를 관측해 언제든 하늘을 들여다볼 수 있다.
천문해설사가 설명하며 덧붙인다. “수없이 많은 별 사이에 태양과 지구가 있고, 지구에는 우리가 살고 있답니다.” 별을 세고 있자니 광활한 우주에 비해 우리가 보잘것없는 존재는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작은 것 하나라도 존재하는 이유는 분명히 있다. 고민이 있을 땐 밤하늘을 올려다보거나 전국을 방랑한 김삿갓처럼 여행을 떠나 보자. 존재 이유를 찾으며 헤매는 과정이 여행이자 삶일 것이다. 어느덧 하늘에 어둠이 내린다. 밤이 찾아와도 괜찮다. 우리의 여행은 이제 시작이니까.
<KTX매거진>×MBC 라디오 <노중훈의 여행의 맛>
강원도 영월에 다녀온 <KTX매거진>이 MBC 표준FM <노중훈의 여행의 맛>을 통해 독자, 청취자 여러분과 만납니다. 기자의 생생한 목소리로 취재 뒷이야기, 지면에 미처 소개하지 못한 여행 정보를 함께 들려 드립니다.
본방송 2022년 9월 3일 오전 6시 5분(수도권 95.9MH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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