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삶에 간섭하지 않은 이는 행복하다. 역사가 일상을 좌우하지 않은 삶은 행운이다. 김수영은 어느 지친 날 이런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이와 동떨어져 사는 사람은 없겠으나, 시류를 타고 인생을 역전한 경우도 많겠으나, 1921년생인 김수영에게 시대의 격랑은 너무도 자주 잔혹하게 깊이 불쑥 삶을 흔들었다. 태어나니 일제강점기였고, 스물다섯에 해방을 맞았지만 극심한 이념 대립이 지속되다 서른에 한국전쟁이 발발해 2년을 포로수용소에서 지냈다. 마흔에 4·19혁명이, 이듬해엔 5·16군사정변이 일어났다. 몸과 마음을 추스를 시간 여유조차 없이 몰아친 사건들이 그의 생애를 관통했다. 그럼에도 인간으로서 존재해야 했다. 자신을 찾고 자기 삶을 살아야 했다. 김수영은 시를 썼다. 존재의 몸부림이었다.
8남매 맏이로 집안의 기대를 떠안고 자란 그는 아버지 뜻에 따라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떠난다.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그가 빠진 것이 연극. ‘장남의 길’을 벗어난 그는 가족이 이주한 만주로 가서도 연극 활동을 하다 해방 이후 서울로 돌아와 잡지 <예술부락>에 ‘묘정의 노래’를 발표하고 시인의 길에 들어선다.
시가 밥을 먹여 주지 않으니 시인은 영어 학원에서 강사 생활을 하고 번역을 하면서 생계를 잇는다. 신문물과 사조가 넘치게 밀려온 해방정국의 예술계는 은성하고도 혼란했고, 좌우 이념 대립이 치열한 가운데 서로 모이고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어느 쪽에 소속되기를 마다하고 일단 공부하며 사유의 깊이와 넓이를 확장하려 하던 중 전쟁이 발발했다. 신혼 2개월 만이었다. 피란을 못 간 시인은 인민군 의용군에 끌려가 군사 훈련을 받다 목숨을 걸고 탈출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서울로 오지만 이번엔 경찰에 체포돼 거제 포로수용소에 억류된다. 사방이 죽음이었다. 자고 나면 어제 산 사람이 오늘 시체가 되는 곳, 정식 처형도 아니고 마구잡이 증오와 구타가 살인으로 이어지는 곳. 103655라는 포로 번호가 붙은 시인은 민간인 피억류자로 2년을 보낸다.
“인간이 아니었”다 기록한 시절을 겪고 그는 달라진다. 과거와 같은 김수영이라 해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자신은 매일 죽음·비인간성과 마주하다 나왔는데, 하늘에 해가 뜨고 비가 내리고 배고프다 밥을 먹고 농담을 하고 아이들은 밖에 나와 노는 평범한 일상이 대체 어떻게 보였을까. 이제 ‘자유’라는 단어를 두고 ‘새’를 떠올리기란 불가능했다. 그 단어에 묻은 피, 처절함, 서러움. 시인은 사물 하나, 단어 하나를 그냥 쓰지 못하고 온몸으로 끝까지 밀어붙인다. 돈, 헬리콥터, 팽이 같은 것에서도 서러움을 읽었고 피 같은 시가 맺혔다.
고상한 척과는 평생 거리가 멀었고, 세상사 쉽게 돌아서 가는 법은 아예 몰랐다. 시인으로 주목받으면서도 그는 꼿꼿하고 고독했다. 혹시 자신이 문장을 팔아먹는 사람이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 1955년 생계를 위해 병아리 열한 마리를 사고 직접 철망을 만들어서 꾸린 양계장이 750여 마리 규모로 커졌을 때도 시인은 “나의 검게 타야 할 정신을 생각”하고 “밭고랑 사이를 무겁게 걸어”가며 시를 썼다. 생애 최고 흥분을 선사한 4·19혁명의 기운이 5·16군사정변으로 스러졌을 때도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라고 시를 썼다. 김수영의 시 덕분에 우리는 절망하고 희망하는 가장 아름다운 언어를 얻었다.
불온한 관찰자 김수영은 불과 마흔여덟 살인 1968년 6월 16일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시집 한 권, 문학상 한 번 수상, 총 180여 편의 시. 이후는 김수영의 시대였다. 시대 상황이 그를 불렀을 것이다. 시와 산문 선집과 전집이 연달아 나오고, 저서와 논문이 쏟아졌다. 1981년에는 그의 이름을 딴 문학상이 제정되었다. 지금도 김수영은 유효하다. 서럽고 예민한 양심, 바닥까지 파고 내려가는 투철한 자세, 혁명과 자유와 사랑을 꿈꾸는 정신은 1970·1980년대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인간이 인간답게 살려면 반드시 필요하므로.
시인이 한때 거주하고 묻힌 서울 도봉구에 그를 기념한 김수영문학관이 있다.
친필 원고와 수첩, 책상, 만년필 등 가슴 뛰게 하는 전시물을 정성스레 모았다.
문의 02-3494-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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