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가지에 연둣빛 잎이 고개를 내민다. 하나둘 돋아난 이파리가 모여 가지를 칠한다. 여린 잎들이 나뭇가지에 색을 입히고 한껏 기지개를 켤 즈음 우리는 초록을 머금은 나무를 보고 “푸르다”라고 한다. 푸른 것은 자연에만 있지 않다. 청렴한 태도, 차가운 이성을 지키는 인간의 정신 또한 푸르다. 선조들은 푸른 이성을 지키려 끊임없이 학문에 매진하고 수양을 거듭했다. 그런 선비의 숨결이 남아 있는 곳, 영주에서 마음이 가야 할 길이 어딘지 찾고 싶었다. 세상을 바로 보아야 세상의 일부인 자신도 또렷해진다. 선비 정신이 아로새겨진 영주로 향한다. 깨끗한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비추던 선비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속 깊은 곳을 들여다본다.
+ 서울 출발을 기준으로 청량리역에서 KTX-이음을 타고 영주역까지 약 1시간 40분이 걸린다. 풍기역에도 정차한다.
맑은 이상을 좇아, 소수서원
소수서원 앞에 다다르니 울창한 송림이 시선을 빼앗는다. 사람보다 몇 배는 더 살았을 거대한 소나무를 올려다본다. 마침 불어오는 봄바람이 소나무를 간질인다. 시원한 바람결에 솔잎이 너울댄다. 2019년에 한국의 서원 아홉 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은 당당히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소수서원의 이름은 본래 백운동서원이었다. 1542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이 한반도에 처음으로 성리학을 전파한 고려 학자 안향을 배향하기 위해 숙수사 터에 사묘를 세웠다. 이듬해 강당과 정자 등을 짓고 ‘백운동(白雲洞)’이라 이름 지으며 백운동서원이 탄생했다. 교육기관인 향교의 적지 않은 수가 과거 급제에 중점을 두자 교육을 바로잡고 성리학을 널리 퍼트리려는 뜻이었다.
백운동이라는 이름은 주자가 학문을 가르친 백록동서원에서 차용한 것으로 산, 언덕, 강 위까지 흰 구름과 안개가 가득한 주변 풍경을 보고 지었다 한다. 서원의 이름대로 신비로운 물안개를 만들어 냈을 죽계천은 여전히 서원 옆을 흐른다.
소나무 숲을 나오자 죽계천 건너 이황이 터를 닦은 정자 취한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백운동서원이 소수서원으로 탈바꿈한 데에는 이황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이황이 풍기군수로 재직할 때, 교육의 참뜻을 닦으려는 백운동서원의 의미를 알아보고 명종 임금에게 사액을 건의했다. 이에 명종은 1550년에 ‘학문을 다시 이어 닦는다’라는 뜻의 이름 ‘소수(紹修)’와 현판, 서책 등을 하사했다. 백운동서원이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는 순간이었다. 취한대 앞, 청둥오리들이 물질을 하며 장난친다. 서원에서 학문을 공부하던 유생들은 취한대에 앉아 풍류를 즐기며 시를 지었다는데, 유생뿐 아니라 이곳에 온 누구라도 시를 짓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들겠다.
지도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강학당이 제일 먼저 손님을 맞는다. 스승과 제자가 이곳에 앉아 성리학을 공부한 풍경이 생생하다. 강학당 앞마당을 몇 번이고 돌며 서책을 암송했던 유생처럼 신중히 걸음을 옮긴다. 서쪽에는 안향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던 문성공묘(文成公廟)가 있다. 일반적으로 사당에는 ‘사(祠)’를 쓰는데, 왕이나 큰 인물을 모신 경우는 ‘묘(廟)’를 쓴다. 안향이라는 이름이 가진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해 본다. 유생의 생활공간 학구재와 지락재, 안향을 비롯해 주세붕 등의 초상을 봉안한 영정각을 지나 다시 지도문으로 이동한다. 올해 1월부터 개방한 소수서원 둘레길로 가기 위해서다. 푹신한 흙 위를 거닐다 소나무 밑에 핀 현호색과 제비꽃을 눈에 담는다. 소나무 숲 사이에 서 있으니 꼭 유생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주세붕 선생과 숲길을 거닐었다면 “작은 꽃 하나도 살아 내려 안간힘을 쓰는데, 인간인 우리는 도리를 지키며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말했을 것만 같다.
선비처럼 당당하고 힘차게 걸음을 내딛는다.
흙길을 걸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흥취를 돋운다.
시간을 재현하다, 선비촌
개나리꽃 만개한 천변에서 죽계교를 건너면 선비촌이 펼쳐진다. 영주 곳곳에 있는 고택 열두 채를 재현해 모아 놓은 곳이 선비촌이다. 자신을 수양하고 집안을 올바르게 가꾸는 ‘수신제가’, 사회에 진출해 이름을 드높인다는 뜻의 ‘입신양명’, 삶에 있어 편한 것만 추구하지 말라는 ‘거무구안’, 가난 속에서도 바른 삶을 중요히 여긴다는 ‘우도불우빈’을 테마로 네 구역을 조성했다. 한복 입기, 목공예, 한지공예 등 갖가지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어 활기가 느껴진다. 대장간 간판을 건 초가로 들어가자 이면규 장도장이 직접 만든 장도를 내보인다. “한국의 은장도는 칼집과 칼자루를 소뼈로 만든 게 많습니다. 물소 뿔로 만들기도 하는데, 한국에는 소가 흔하잖아요. 이렇게 소뼈로 만든 장도를 사골장도라고 합니다.” 상아색을 띠는 사골장도, 수라상에 독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사용한 은장도 등 늘어놓은 장도가 반짝인다. 장도의 향연에 빠지니 조선 시대로 시간 여행을 온 듯하다. 대장간을 나서 선비처럼 당당하게 걸음을 내딛는다. 흙길을 걸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흥취를 돋운다. 선비촌에서 규모가 가장 큰 안동 장씨 고택 앞에서는 “이리 오너라!”라고 외치고 싶고, 담장 너머 핀 산수유를 보면서는 시를 읊을까 괜히 머릿속을 뒤적인다. 골목 모퉁이를 돌면 보따리를 실은 나귀가 터벅터벅 걷고, 한복을 차려입은 이들이 분주히 돌아다닐 것만 같은 실감 나는 풍경이 계속된다.
선비촌에 재현한 초가는 경상북도 지역에서 흔히 보이는 까치구멍집 구조가 대부분이다. 이곳의 가옥은 ‘ㅁ’ 자 구조인데, 이런 집은 온기가 쉽게 빠져나가지 않도록 설계되어 환풍이 어렵다. 그래서 지붕에 공기가 드나드는 구멍을 만들어 환기가 원활하도록 했다. 지붕 위에 불룩하게 솟은 구멍이 까치집을 닮아 실제로 까치가 그 구멍으로 드나드는 일도 잦았다고 하니, 누군가가 까치집을 보고 영감을 얻어 구멍을 낸 것이라는 상상이 들어도 무리는 아니겠다. 까치구멍집 김구영 가옥은 선비촌 안 작은 도서관인 ‘선비글방’으로 개조했다. 선비가 글을 읽고 마음을 닦은 것처럼 선비글방에서 쉬어 가며 책을 읽는다. 집과 책, 나무로 만든 것이 가득한 곳에서 자연에 감사한 마음이 피어난다. 자연을 이웃처럼 가까이하고 존중하던 옛 시절과 달리 지금은 자연을 종종 아프게 하기도 한다. 그러다 산이나 바다에 가까워질 때 문득 자연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겸손해지는 것이다. 함께하는 삶이 우리와 이토록 멀었던가. 새삼스레 선조의 삶과 지금을 비교하며 공존의 의미를 되새긴다.
+ 매년 5월 초 소수서원과 선비촌, 한국선비문화수련원 일원에서 선비문화축제가 열린다. 올해는 5월 5일부터 8일까지 전통 공연과 다양한 문화 예술 프로그램이 펼쳐진다. 문의 054-630-8703
삶의 공간, 무섬마을
가만히 바라만 보아도 감성이 차오르는 곳이 있다. 무섬마을이 바로 그런 곳이다. 당장이라도 마을을 배경으로 서정적인 소설 한 편을 써 내려가고 싶을 정도다. 예부터 양반집이 많은 반촌이었던 무섬마을은 지금도 옛 숨결이 생생한 고택 43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내성천이 삼면을 휘감아 과거에는 외나무다리를 건너야만 마을로 들어갈 수 있었다. 산등성이를 이어 놓은 양 기와집과 초가가 처마를 맞댄 모습이 정겹다. 고택 체험을 하러 온 여행객들이 재잘대는 소리, 주민이 내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마을 골목을 채운다. 소박하고 편안한 분위기에 미소가 지어진다.
+ 무섬마을은 산과 물이 태극 모양으로 돌아 나가는 형상이 마치 물 위에 뜬 섬과 같다 하여 무섬(물섬)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정이 흐르는 마을
어느덧 만죽재 고택에 다다른다. 만죽재 고택은 무섬마을에서 처음 지은 집이다. 병자호란 후 출사를 단념하고 무섬마을에 들어온 박수가 1666년에 지은 집이 시초였다. 색 바랜 대들보,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기왓장을 하나하나 살핀다. 기둥 네 개가 받치고 있어 집이 공중에 떠 있는 듯한 형태가 독특하다. “무섬마을은 수해가 잦았어요. 홍수를 대비해 바닥과 닿지 않도록 사이를 내서 지었지요.” 류명희 문화관광해설사가 공중에 뜬 집을 보며 설명한다. 그러고는 퀴즈 하나를 낸다. “무섬마을에는 세 가지가 없어요. 어떤 것인지 아세요?” 서정과 옛 정취로 가득한 이곳에 없는 것이 있다니 무엇이란 말인가. 그가 잔잔한 목소리로 마을 이야기를 풀어 준다. “강 때문에 마을에 외부인이 거의 출입하지 않았죠. 마을 사람 모두 이웃이어서 대문이 없었어요. 둘째로는 담장이 없었다고 해요. 지금은 여행객을 위해 각 고택을 구분하는 담장을 쌓았어요. 마지막으로는 ‘풍수지리적으로 마을이 마치 물 위에 뜬 연꽃과 같다’ 하여 우물을 파면 마을이 가라앉는다고 믿었기에 우물도 없었답니다. 마을 사람들은 강변에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 고인 깨끗한 물을 마셨다고 하지요. 무섬마을은 대문, 담장, 우물이 없던 곳이랍니다.” 대문, 담장 없이 정답게 살던 마을. 왠지 그 시절 선조들이 부러워진다. 이웃은커녕 자신조차 돌볼 시간이 없는 일상이 외로워서인지도 모르겠다.
무섬마을의 다정함을 안은 채 외나무다리로 향한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가 다리를 비춘다. 조심스레 다리 위로 올라 강을 건넌다. 다리 중간, 건너편에서 오는 사람과 마주쳤을 때 양보할 수 있도록 마련한 나무판에서 마을의 정을 느낀다. 곧은 마음, 겸손한 태도와 배려하는 자세까지. 결국 선비의 삶은 나 자신을 찾는 것이었음을, 시간이 흘러도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보살펴야 하는 것만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다. 이제는 마음이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 알 것 같다. 붉은 해는 산 너머로 아스라이 사라지지만, 마음속에는 푸른 달이 둥실 떴다.
+ 무섬마을에는 고택 체험이 가능한 가옥이 있다. 옛 정취와 서정이 가득한 마을에서 하룻밤 묵는 경험은 특별한 추억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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