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박 벌어진 벚꽃 아래 서 있다. 흩날리는 꽃비 맞으며 걸음을 옮긴다. 이 드넓은 왕궁 터에 봄빛이 흘러넘친다.
여백을 좋아한다. 일상에 스며드는 무위의 시간은 삶을 관조하게 하고, 대화 끝에 찾아오는 정적은 앞서 지난 말을 곱씹게 한다. 여백이 있는 여행은 언제나 근사하다. 이를테면 허허로운 들과 낡은 돌을 밟고 서서 옛일을 그리는 여정. 궁궐, 사찰, 성곽이 스러지고 남은 빈터를 즐겨 찾은 이유다. 그 처연하고도 눈부신 풍광 앞에 넋 놓았던 기억을 떠올리다가, 하염없이 걷고 마음껏 상상하는 여행을 계획해 본다. 목적지는 전라도의 관문, 백제의 옛이야기가 고스란히 잠들어 있는 거대한 여백의 땅, 전북 익산이다.
돌과 돌 사이를 걷다
서울 용산역에서 출발한 KTX 열차가 익산역 승강장에 닿는다. 1시간 30여 분 만이니, 설렘을 미처 다스리지 못한 채다. 달뜬 걸음으로 왕궁면 왕궁리로 향한다. 왕궁이라는 지명을 두 번이나 품은 지체 높은 고장. 이때 왕궁은 익산에서 나고 자란 백제 유일의 왕, 무왕이 축조했다고 알려진 궁궐이다. 무왕은 익산 땅에 백제왕궁을 짓고 난 뒤 전무후무한 초대형 사찰 미륵사를 창건했다. 그러니 역사를 순방향으로 따를 요량이라면 왕궁리 유적을 먼저 만나 보아야 한다. 미륵사지가 익산의 얼굴이라면, 백제왕궁은 익산의 첫 번째 이정표다.
그 전에, 잠시 숨을 고르며 경유해야 할 곳이 하나 있다. 고도리의 작은 개천인 옥룡천을 사이에 두고 우뚝 선 한 쌍의 석상이다. 흔히 고도리 석불입상이라 부른다. 고려 시대에 만들었다고 짐작하는 이 석조여래입상은 약 4미터 높이의 거대한 위용을 자랑한다. 학사모처럼 생긴 커다란 보개(寶蓋)를 쓰고 있어 영험한 기운도 풍긴다. 화강암 기둥을 두드려 투박하게 깎아 낸 두 구의 석상은 한쪽이 남성, 한쪽이 여성이라고 알려졌으나 역사적으로 기록된 바는 없다. 다만 서쪽 석상에 수염으로 추정되는 장식 때문에 ‘할아버지’라는 별명이 붙었다. 물론 동쪽 석상은 ‘할머니’다. 설화에서는 두 석상이 해마다 섣달그믐 자정이면 얼어붙은 옥룡천을 건너 해후한다고 전한다. 회포를 푼 둘은 새벽닭이 울 때에야 비로소 제자리로 돌아갔단다. 아침 햇살이 묻은 두 석상을 바라보는데, 어쩐지 입가에 웃음기가 서려 있는 것 같다.
+ 서울 출발을 기준으로 용산역에서 KTX를 타고 익산역까지 1시간 30여 분이 걸린다.
백제의 역사는 이곳에서 한 꺼풀 막을 벗긴 했어도 여전히 짙은 안개에 싸여 있다.
왕궁리 오층석탑 앞 벚나무 아래 섰다. 흩날리는 꽃비 맞으며 걸음을 옮긴다. 가로 245미터, 세로 490미터, 해발 40미터 구릉 위 드넓은 왕궁 터에 봄빛이 흘러넘친다. 먼 옛날, 백성들은 궁성 바깥에서 이곳을 올려다보았을 것이다. 높은 곳에 자리한 건물의 위엄이란 두말할 나위 없었을 테다. 모든 건물은 위상에 따라 구획된 공간에 차곡차곡 들어섰다. 남쪽에는 정전을 비롯한 주요 정무 시설이, 북쪽으로는 후원이 자리했다. 한편에서는 공방과 화장실로 추정되는 유적이 발견되었다. 훗날 신라 시대에 이르러 궁 일부는 사찰로 개축했다. 왕궁 터에서 유일하게 현존하는 건축물인 오층석탑이 그 증거다.
백제의 역사는 이곳에서 한 꺼풀 막을 벗긴 했어도 여전히 짙은 안개에 싸여 있다. 1989년 시작된 왕궁리 유적 발굴 조사에 따르면 무왕이 당시 서울인 사비(지금의 부여)에서 이곳으로 천도하기 위해 궁성을 구상했다는 설이 유력하지만, 별궁 용도로 만들었다는 설을 포함해 여러 야사가 공존하는 상태다. 그저 출토된 담장의 돌, 건물에 쓰인 판석, 정원과 곡수로 등을 통해 궁성의 규모와 건축 기술의 정교함, 그리고 이곳에서 생활을 꾸렸을 무수한 궁인의 삶을 짐작할 뿐이다. 지금도 왕궁 터 근처에 사람이 모여 산다. 동네 이름은 탑리마을이다. 백제왕궁박물관 옆으로 이어지는 마을길을 따라 걷다 보면 백제 역사 이야기를 그려 놓은 알록달록한 벽화를 마주친다. 봄볕에 달궈진 길 위에도, 여행자의 가슴팍에도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 새롭게 단장하기 위해 휴관 중이던 백제왕궁박물관이 5월 중 빗장을 푼다. 8월에는 왕궁 터와 탑리마을 일대에서 사흘간 익산 문화재 야행 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문의 063-859-4631(백제왕궁박물관), 1577-0072(익산 문화재 야행)
무왕은 백제 중흥의 꿈을 실어 이곳에 거대한 절을 지었으나, 지금은 크고 아름다운 두 기의 탑만이 남아 과거의 영광을 증명한다.
마른 벌판, 무너지다시피 한 옛 탑에서 이 아름다운 것들이 쏟아져 나왔을 순간을 상상한다. 가슴께가 저릿저릿하다.
주먹만 한 호리병에 온 마음을 빼앗긴다. 연꽃과 인동초를 그려 넣은 표면을 눈으로나마 살살 쓸어 본다. 미륵사지석탑의 심주석에서 발견했다고 알려진 사리호다. 함께 출토된 금구슬과 유리구슬, 자수정도 하나씩 들여다본다. 어떤 수사도 빛을 잃고 마는 영롱한 색이다. 국립익산박물관에 가면 이 땅에서 향유해 온 미감의 총체를 확인할 수 있다. 대부분 백제의 것이기는 하나, 사람 얼굴을 새긴 수막새나 봉림사지 석조삼존불을 닮은 손 조각처럼 백제 멸망 후 만들어진 유물도 모두 미륵사지에 한데 묻혔다. 마른 벌판, 무너지다시피 한 옛 탑에서 이 아름다운 것들이 쏟아져 나왔을 순간을 상상한다. 가슴께가 저릿저릿하다.
왕의 꿈을 따라 걷다
영원히 마주 보고 선 미륵사지의 두 탑, 섣달그믐마다 재회하는 한 쌍의 석상,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노래를 지어 불렀던 왕. 익산은 아무래도 꿈과 낭만의 도시다. 이쯤에서 꿈결 같은 설화 하나를 더해 본다. 무왕이 부인과 함께 미륵산 자락의 사자사로 행차하다가 연못에서 현현한 미륵삼존불을 마주쳤는데, 이를 상서롭게 여긴 부인이 무왕에게 절을 세워 달라고 청해 하루 만에 그 커다란 미륵사를 툭 하고 만들었다는 이야기. 부인의 정체를 두고 선화 공주냐, 귀족의 딸이냐 갑론을박이 이어졌지만 백제라는 나라에 얽힌 대부분의 설이 그러하듯 뚜렷이 밝혀진 건 없다. 크고 아름다운 두 기의 탑만이 남아 과거의 영광을 증명할 뿐이다.
연둣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들판, 하늘을 비추는 말간 연못, 바람결에 흔들리는 풍경 소리만으로 이미 마음은 넉넉하다.
잦은 전투로 국력이 쇠하기 시작한 백제 말기, 무왕은 중흥의 꿈을 실어 탑 셋, 금당 셋, 회랑 셋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절을 짓는다. 백제의 위세를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니까 12만여 평, 40만 제곱미터 가까운 땅을 미륵사가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두 석탑 사이엔 거대한 목탑도 있었다.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아 몇 번이고 되뇌어 실감해 본다.
영화로웠던 시간은 이제 아득하기만 하다. 동탑 감실에 들어앉아 서탑의 허전한 머리를 올려다보는데, 문득 초현실주의 회화처럼 기묘한 감흥이 느껴진다. 무너진 모습 그대로 복구한 서탑, 서른여섯 개 풍경까지 재현한 동탑. 두 탑의 복원 결과를 두고 이런저런 세간의 평가가 오갔다만, 구태여 말을 보태고 싶지 않다. 이제 막 연둣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들판, 하늘을 비추는 말간 연못, 바람결에 흔들리는 풍경 소리만으로 마음이 온화해지니까.
바위를 그늘 삼아 잠시 걸음을 쉬어 가도 좋을 것이다. 우수수, 우수수 새어 나오는 대숲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면서.
우리의 걸음은 이제 왕대나무의 북방 한계선을 통과한다. 이곳은 미륵산 자락의 작은 촌락 구룡마을이다. 5만여 제곱미터(약 1만 5000평)에 걸쳐 자생한 대나무 중 상처 나거나 냉해 입은 것을 솎아 내어 지금의 모습이 됐다.
발 닿는 대로 걷다
‘대솔한증막’을 들머리 삼는다면 명상의 길, 소통의 길 등 산책하기 좋은 오솔길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길 중턱에는 드라마와 영화 등 사극 영상물에 여러 차례 등장했다고 알려진 우물 터가 나타난다. 여기서부터 이정표를 잘 살피며 걷다 보면 선사시대부터 마을신 역할을 해 왔다는 영물, 뜬바위를 맞닥뜨린다. 한때 이 주변엔 바위 여럿이 모여 있어 백제 석공들이 가져가곤 했는데, 뜬바위만은 신묘한 기운 때문인지 이곳에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이 바위를 그늘 삼아 잠시 걸음을 쉬어 가도 좋을 것이다. 우수수, 우수수 새어 나오는 대숲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면서.
숲을 나와 걷다가 미륵산성을 안내하는 팻말을 마주친다. 아예 대숲에서 사자암을 거쳐 미륵산 정상까지 오른 뒤에 미륵산성 방향으로 하산하는 산꾼도 적지 않다. 약 1.3킬로미터에 걸쳐 이어진 미륵산성의 최초 기획자가 누구인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고조선 시대 기준왕이라거나, 마한의 여러 나라 중 한 곳의 왕이라거나, 심지어는 백제 무왕이라는 설도 전해지지만 이쯤이면 누가 만들었는지는 그리 중요치 않다.
뉘엿뉘엿 떨어지는 놀을 바라보며 미륵산성의 돌계단을 하나씩 오른다. 멀리 금마저수지와 서동공원을 굽어본다. 한반도 모양을 닮았다고 알려진 금마저수지엔 사랑의 상징인 천연기념물 원앙이 서식한다고 한다. 사랑이야말로 천연기념물처럼 느껴지는 시절, 이 고장에선 그 귀한 감정이 여전히 펄떡이고 있다. 익산의 여백을 메우는 건 꿈과 사랑이다.
+ 미륵산성 동문지로 가려면 ‘베데스다 기도원’ 주차장 쪽 등산로로 15분 정도 올라야 한다. 여기서부터 미륵산 등반을 시작해도 좋다. 문의 063-859-5792
익산의 또 다른 볼거리
-
춘포역
1914년에 세운, 한국에서는 가장 오래된 역사로 기록돼 있다. 처음에는 대장역으로 영업을 개시했고, 1996년부터 춘포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2011년 5월 폐역이 된 후 지금은 춘포면과 전라선의 역사를 추억하기 위한 작은 전시 공간으로 남아 있다.
문의 063-853-5789 -
익산 항일독립운동기념관
일제가 곡물을 수탈하기 위해 만든 대교농장 터에 항일운동기념관이 들어섰다. 총 3개 전시관에서 1919년 이리 장날에 일어난 4·4만세운동의 흐름과 역사를 소개한다. 건물 앞 광장에는 운동을 주도한 문용기 열사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문의 063-843-3339
-
익산근대역사관
1935년 중앙동에 지은 옛 삼산의원은 한때 은행과 관공서로 사용되었고, 훗날 요릿집으로까지 쓰였다. 처음 삼산의원을 세운 이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했던 김병수다. 그 자체로 익산의 근대사를 함축한 이 건물이 2019년 익산근대역사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사료를 토대로 건물을 지을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다. 갈대밭 속 동네라고 해서 ‘속리’ 또는 ‘솜리’라 불렸던 고장, 이리와 이리역의 구구절절한 이야기가 2층 규모의 전시실에 빼곡하다. 1층 전시실 한편에는 은행 시절의 금고가, 건물 뒤편 담벼락에는 식당으로 사용하던 시절 붙여 놓은 타일이 그대로 남아 있어 흥미롭다. 익산문화예술의거리와 함께 둘러보면 더 좋다.
문의 063-837-3545 -
익산의 맛있는 먹거리
-
반야돌솥밥
익산시가 선정한 대물림 맛집으로, 돌솥밥에 얹어 내는 건나물을 하나하나 볕에 말리고 덖어 준비할 만큼 모든 재료를 정성껏 마련한다. 메뉴는 단 네 가지로 단출하다. 가장 기본이 되는 반야돌솥밥, 여기서 부재료로 변주한 인삼돌솥밥과 치즈돌솥밥, 곁들이로 즐기기 좋은 반야빈대떡이다. 구운 더덕, 시원하고 달콤한 물김치, 보드랍고 고소한 달걀찜 등 밑반찬도 알차기 그지없다.
문의 063-841-1011 -
새마을치킨
익산 남부시장에 가면 고소한 튀김 냄새가 코끝을 간질인다. 치킨 특화 거리에서 뿜어내는 향내다. 이곳의 터줏대감 중 하나인 ‘새마을치킨’은 2대 청년 사장이 아버지가 20대부터 운영하던 가게를 이어받은 곳으로, 50여 년의 업력을 자랑한다. 신선한 닭에 카레 가루 섞은 튀김옷을 입혀 튀겨 낸 뒤 검은깨를 솔솔 뿌려 풍미를 더했다. 시장의 또 다른 명물, ‘솜리맥주’와 함께하면 더 맛있다.
문의 063-854-8282
-
정순순대
피순대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순댓국 가게다. 여러 가지 채소와 견과류를 넣은 이곳 순대는 씹어 넘기는 재미가 쏠쏠하다. 순댓국에는 피순대와 함께 머릿고기·오소리감투·염통·소창 등 돼지고기 부속을 아낌없이 투하하는데, 그때그때 도축한 신선한 고기만 사용해 잡내 없이 깔끔하다. 국물에 들깻가루를 넣지 않아 맑고 깊은 맛이 두드러진다. 순대국수, 막창국밥, 내장국밥도 별미다.
문의 063-854-0922 -
<KTX매거진>의 모든 기사의 사진과 텍스트는 상업적인 용도로 일부 혹은 전체를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링크를 걸거나 SNS 퍼가기 버튼으로 공유해주세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