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 문이 열리자 얼굴로 불어오는 산바람과 눈을 감싸는 정오의 빛살, 승강장 분위기를 살랑살랑 흔드는 환한 사람들. 구석까지 파란 하늘에선 따듯한 기운이 가득 내렸다. 잠시 서성이는 사이에 우리가 탔던 KTX가 울산역을 빠져나갔다. 사람도 대부분 떠난 승강장에 바람과 빛살이 남았다. 샘솟는 계절의 공기로 몸을 축이며 걸었다. 기분 좋은 고요가 철로에서, 벤치에서 흘러왔다. 울산이 제 풍경을 역에서부터 은근히 내놓는 것이었다. 1962년 한국 첫 공업 지구로 지정된 울산은 산업도시의 명성을 지켜 왔다. 변함없이 구슬땀 맺히는 울산에서 얼마 전에 소식이 전해졌다. 미술관을 세우고 출렁다리를 놓았으며 바다는 여전히 아름답다는. 그렇게 시작한 여행은 햇살 어린 역처럼 곱디고운 장면들을 울산의 새 기억으로 더해 주었다.
+ 서울 출발을 기준으로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울산(통도사)역까지 2시간 15분 정도 걸린다.
과거와 조화하는 미래, 울산시립미술관
지난 1월 6일, 태화강 북쪽 원도심에 울산시립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광역시 승격 25년 만에 처음 지은 공공 미술관이니만큼 반응은 뜨거웠다. 개관한 지 석 달도 안 돼 총관람객 8만 명을 넘었으니 매일 1000명씩 방문한 셈이다. 예술을 만나러 인근 도시에 가거나 멀게는 서울로 향하던 시민이 나들이하듯 모여 작품을 감상한다. 원도심 거리와 함께 둘러보기 편해 여행객에게도 반가운 일이다.
미술관은 조선 시대 관아인 울산동헌과 객사 터를 양옆에 둔 역사적 공간에 몸을 웅그려 앉았다. 얼핏 보아서는 지상 3층, 지하 2층 규모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나직하다. 경사가 완만한 언덕길에 꼭 맞게 감긴 미술관 윤곽선을 눈으로 좇는다. 곧게 뻗은 선이 어느 순간 끝나고 동헌 출입문인 가학루와 동헌 안 나무가 그리는 곡선이 나온다. 미술관 직선은 침범하거나 억누르려 하지 않고 동헌의 곡선에 다음 차례를 넘긴다. 단절과 불화가 아닌 연결과 조화의 풍경이다. 오늘을 돋보이게 하자고 어제를 뭉개 버린다면 결국 무엇으로 삶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지. 울산시립미술관은 넓히고 높이려 기교를 부리는 대신에 옛것과 어울림을 궁리했다. 순하게 이어지는 선들을 보는 동안 미술관에 드는 발걸음이 절로 차분해진다.
+ 지난 1월에 개관한 울산시립미술관은 울산 최초의 공공 미술관이다. ‘미래형 미술관’을 목표로 3개 전시실과 XR랩에서 미디어 아트 중심의 전시를 진행한다. 문의 052-211-3800
암흑한 전시실 흐드러진 빛에 포개지는 계절의 풍경들.
울산동헌과 객사 터를 양옆에 둔 울산시립미술관은
문화유산과 어울리는 동시에 시대의 예술을 펼친다.
실내에선 유리창 너머로 도심과 동헌이 동시에 내려다보인다. 하얀 벽에 튀긴 빛의 알갱이가 사방을 밝히는 테라스 안쪽으로 푸른 계절이 밀려든다. 먼 빌딩 숲, 가까운 동헌을 다 눈높이로 조망하도록 한 절묘한 높이가 또 하나의 작품인 양 감동적이다.
과시하기보다 가만가만 투영하는 공간이기에 작품은 더욱 빛난다. 울산시립미술관은 울산의 정체성과 연계한 미디어 아트를 선보이겠다고 약속했다. 증강현실을 활용한 〈블랙 앤드 라이트: 알도 탐벨리니〉를 개관전으로 선정한 이유다. 미디어 아트 전용관 XR랩에 들어갔다. 전시실은 어둠에 잠겼으나, 작품이 시작되고 빛이 등장하는 찰나부터 이미지의 향연이 펼쳐진다. 바깥에서 마주한 햇살이 잔영이 되어 감상을 고조한다. 암흑한 전시실 흐드러진 빛에 포개지는 푸른 계절의 풍경들. 5월에는 정연두 작가의 <오감도> 전시가 울산의 꿈을 은유한다. 미술관을 나와 조화하는 선들을 돌아봤다. 울산이 마음에 쌓여 간다.
돌 무리의 바다, 대왕암공원
대왕암에 닿기 위해서는 송림을 통과해야 한다. 100여 년 전 일제가 군사시설을 숨기려 심은 소나무들이 자라 울창한 숲을 이룬 것이다. 조선 시대에 나라가 운영하는 군마 목장이던 곳을 빼앗긴 역사가 생생한데 송림은 아름답다. 세찬 바닷바람을 적당하게 걸러 주는 바람막이이자 아름드리 그늘을 건네는 쉼터, 갯내 날아드는 운치 그윽한 걷기 길로 울산의 대표 여행지가 되었다. 애처로운 옛일과 황홀한 경관은 따로 두면 역설이지만 감내하고 보살핀 노력을 함께 헤아릴 때 둘은 맞닿아 갸륵한 세월을 드러낸다.
갈림길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자 일순 시야가 트인다. 울산 동쪽 끄트머리 대왕암공원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가장자리 어디서든 동해와 마주할 수 있다. 창창한 소나무 숲 너머 남김없이 파란 바다를 향해 간다. 수평선에서 몰려오는 광활한 정경이 단비처럼 가슴을 적시는 길, 하늘에 걸친 듯 기다란 다리가 소나무들 틈에 나타난다. 일산해수욕장이 바라보이는 오목한 해변 위로 양쪽 절벽을 잇는 출렁다리다. 지난해 7월 개장한 다리는 최대 높이 42미터, 총길이는 무려 303미터에 달한다. 상공을 가로지르는 모습이 이미 아찔해 다리가 후들거린다. 조심스레 올라타니 출렁대는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격한 움직임에 온몸의 감각이 곤두선다. 중간쯤 갔을까. 고개를 돌려 바다를 보았다.
다리 밑 바다도, 앞에 가득한 바다도 모두 아스라한 높이 수십 미터 하늘에 파도 소리가 스친다. 한 걸음이 아까워 자꾸 멈춰 서서 시선을 여기저기 던졌다. 상상이 미치지 못할 만큼 큰 바다가 한눈에 잡히는 순간이 벅차 가슴 한편도 요동친다. 만족스러운 여정에 입이 절로 달뜬 미소를 긋는다. 그러나 이게 다가 아니다. 대왕암이 가까워지고 있다. 맞은쪽 절벽에 이르러 다시 송림을 지나 울퉁불퉁한 기암괴석 길을 걷는다. 해안 인근 바다를 모조리 뒤덮은 거대한 윤슬 어디쯤에 섬 몇 조각이 어슴푸레 떠오른다. 비탈을 오르고 내려 섬으로 다가갔다. 마침내 도착했다. 바다에서 솟구친, 혹은 바다에 뿌리박은 돌 무리 대왕암이 눈앞에 기기괴괴한 형상을 내보인다. 땅이 어떻게 터지고 갈라졌기에 대왕암만 외따로 떨어진 것인지 알 길은 없다.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 맹세한 신라 시대 왕비가 저 돌덩이 아래에 묻혔다는 구전이 사실인지 그 또한 끝내 확인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누구나 전설 한 자락 뽑아 낼 법한 신비로운 분위기만은 이토록 명백하다. 다리를 건너 대왕암에 들었다. 다부진 산자락 같은 기암괴석을 타고 정상에 올라 해무 낀 수평선을 응시했다. 날것 그대로의 갯바람이 몸을 훑고 뭍으로 흘러간다. 영원히 지금이고 싶다.
+ 울산 동편 끝자락에 위치한 대왕암공원은 해송 1만 5000여 그루와 기암괴석이 동해와 어우러지는 대표 여행지다. 문의 052-209-3738
봄에 귀 기울이는 길
길은 남쪽 슬도로 이어진다. 풍경을 더듬어 가는 동안 파도가 줄지어 땅을 쓸고 빠진다. 장구한 흐름이 빚은 매끈한 해안선에 물결 소리가 부드러운 선율을 덧댄다. 나긋하다, 유순하고 싱그럽다. 다그칠 일은 애초부터 세상에 없었다는 듯이 온통 평온한 길. 해안을 넘어온 물결 소리가 묵은 시름을 파내 아득한 곳으로 날려 보낸다. 자연은 슬도에 다다를 무렵 쉬어 가라며 유채꽃밭을 내어 준다. 방치된 땅을 매입한 울산 동구가 2020년에 조성한 유채꽃밭이 제철을 만나 노랗게 무르익었다. 달가운 표정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진을 찍는다. 사람은 예쁘고 꽃과 바다는 사랑스럽다. 이리 고운 장면을 어찌 잊을까. 꽃들 사이에 오늘의 기억을 책갈피로 끼운다.
온 길을 되밟아 해안을, 대왕암을 지난다. 윤슬 뒤덮인 파도가 해안 몽돌에 부딪힌다. 대왕암을 훑은 갯바람은 뭍으로 번져 송림을 흔든다. 아까 보았어도 자연은 또 새롭다. 부단하게 변화하는 대지에서 지금이 아니라면 들을 수 없는 이 순간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땅과 바다에 귀를 기울인다. 도란거리는 물결, 돌 무리에 눈길을 얹는다. 다른 건 다 잊기로 하고 오직 봄이다.
생명의 땅, 태화강 국가정원
해가 조금씩 떨어지지만 아직은 헤어지고 싶지 않다. 도심으로 길을 잡는다. 빌딩과 도로가 늘어선 도시 복판에 태화강 국가정원이 놓였다. 울산을 관통하는 태화강이 휘감은 이곳은 순천만에 이어 2019년 두 번째로 국가정원이 되었다. 83만 5400여 제곱미터(약 25만 평) 규모의 정원에 대숲이 울창하고 철마다 꽃이 피는 곳. 과거 태화강은 오·폐수 방류로 쓰레기가 부유하는 오염된 강이었다. 그리고 생명 떠난 강을 살리려 시민이 힘을 모은 지 10여 년 만인 2007년에 1급수가 되었다. 우리는 기억한다. 자연을 헐어 버리기도, 자연과 함께 살기도 하는 인간은 언제든 선택할 수 있다. 어느 날 자그마한 선택이 일군 결실로 들어간다. 대나무 그림자가 몸을 식힌다. 들숨에 스미는 개운한 공기는 마음을 맑혀 준다. 초록 잎사귀에서 시원스러운 바람이 우수수 쏟아진다. 강물이 하늘을 비추고 꽃은 잎을 활짝 열었다. 자연의 정취가 너울진 태화강 국가정원이 화사하게 생동한다. 더없이 울산다운 풍경을 앞에 두고 다음을 약속한다. 햇살 어린 역, 푸른 계절이 밀려드는 미술관, 바다에서 솟은 돌 무리에서 만나자고. 울산에서 다시.
+ 83만 5400여 제곱미터(약 25만 평) 면적의 태화강 국가정원에서는 생태, 대나무, 수생 등 6개 주제 아래 조성한 20여 개 테마 정원을 만날 수 있다. 문의 052-229-3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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