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역은 어디일까? 옛 서울역은 아쉽게도 정답이 아니다. 1920년에 지은 신촌역은 1925년에 완공한 옛 서울역보다 나이가 많다. 1920년부터 신촌을 지나던 기차. 동요 ‘기찻길 옆 오막살이’에서 “칙칙폭폭 기차 소리 요란해도” 잘도 자는 아기가 자라 어른이 되고, 오두막이 아파트로 변해도 기차는 여전히 역에 정차해 사람들을 태우고 철로를 달렸다. 어딘가로 떠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역을 드나들었을 것이고, 신촌역은 그 아기들이 대학생이 되어 MT를 떠나는 모습도 지켜봤을 것이다. 100년 넘는 시간 동안 꿋꿋한 신촌역에는 현재도 경의중앙선 노선을 따라 전철이 지난다.
교류 속에서 꽃피운 예술
경의중앙선 신촌역에 도착하면 현대적인 역사와 대비되는 구 역사가 눈에 띈다. 한때는 기차를 타려는 사람으로 붐비던 곳이다. 2006년 민자 역사가 문을 열자 자신의 역할을 물려주었고, 지금은 신촌관광안내센터로 변모해 여행객에게 알찬 정보를 전한다. 역사로 들어가자 나무로 꾸민 내부에서 정겨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오른쪽 벽면에는 신촌역이 제 역할을 할 때의 기차 시간표가 붙어 있다. 시간표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기차를 기다리는 여행객이 된 듯하다.
역사 안에는 신촌과 그 일대의 과거 풍경을 담은 사진도 전시해 놓았다. 옛날 신촌로터리와 행촌동에서 바라본 독립문이 흑백사진으로 남아 서울의 모습을 전한다. 현재 서울을 찍은 사진도 훗날 누군가가 본다면 흑백사진을 보듯 ‘옛 느낌이 난다’라고 말할까. 방금 지나간 1초도 곧 과거가 되겠고, 시간이 흐른 후엔 모두 오래전 일이 되어 버릴 테지만 순간을 기록한 것만으로 의미는 충분하다. 구 신촌역이 간직한 그때 향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신다.
서울의 향수를 머금은 신촌역을 등지고 앞으로 향한다. 여러 대학이 인접한 덕분에 신촌은 젊은 기운이 도는 동네로 인식되었다. 지금도 구석구석 살펴볼수록 활기 넘치는 신촌에 예술이 움트는 공간이 있다. 보라색과 파란색 창문이 빛에 따라 아른거려 눈길을 사로잡는다. 스테인드글라스인 양 신비로운 유리 창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간다. 계단을 오르니 오른쪽엔 갤러리, 왼쪽엔 카페로 들어가는 입구가 활짝 열렸다. 3층은 아트 숍과 공방이 채웠다. 겉보기에 주택처럼 생긴 이곳 ‘신촌문화관’은 예술이 응집해 탄생한 곳이다. 공간을 마련한 김수연·임상완 대표는 예술에 꿈을 가진 사람들이 뜻을 마음껏 펼치는 곳을 만들고 싶었고, 그 바람은 현실이 되어 신촌문화관이 되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각자 생각을 펼쳐 영향을 주고받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뮤즈가 되는, 예술이 순환하는 장. 신촌문화관에서는 감정과 영감이 뒤섞여 예술이 탄생한다. 그들에게 받은 기운 때문일까, 당장이라도 무언가를 만들 수 있을 것같이 마음이 들썩인다. 신촌은 여전히 누군가를 가슴 뛰게 하는 곳이란 사실을 느끼며 발걸음을 옮긴다.
푸른 철길, 경의선숲길 공원
경성의 ‘경’, 신의주의 ‘의’를 따 경의선이라 부르는 철도 노선은 일제가 식민 지배를 용이하게 하고 자원을 착취할 목적으로 건설한 철로다. 한국전쟁으로 남과 북이 분단되자 기차는 신의주까지 달리지 못했고, 1953년부터는 서울에서 파주 문산 구간까지만 운행을 이어갔다. 2008년 경의선 지하화 작업 이후 남겨진 지상 철길은 경의선숲길 공원 조성 사업을 거쳐 2016년 푸른 공원으로 재탄생했다.
수도권 전철 홍대입구역에 다다르자 경의선숲길 공원의 탁 트인 잔디밭이 시야에 들어온다. 경의선숲길 공원을 본격적으로 걷기 전, 한 고층 건물 테라스에 올라 공원을 내려다본다. 삼삼오오 모여 거니는 모습들이 평화롭다. 건물 옥상에 서니 공원이 한눈에 펼쳐진다. 그 모습이 마치 장난감처럼 보인다. 철길은 사라졌어도 이리저리 굽은 길 모양을 살피면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 풍경을 본 사람에게 “아무도 없는 새벽엔 길을 따라 동요 속 장난감 기차가 지난다”라고 말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 같다.
엉뚱한 공상에 빠졌다가 공원을 걷기 위해 나선다. 옷에 볕이 닿아 금세 온기가 스며든다. 산책 나온 아이와 엄마, 맑은 날씨를 즐기는 반려견과 보호자, 음악을 들으며 달리는 사람 등 저마다 공원을 누린다. 공원 양옆에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가게가 줄지어 들어섰다. 어느 주택 담벼락에 금색 철판이 반짝인다. 철판에는 귀여운 참새 그림이 그려져 있다. ‘연남방앗간’이라고 적힌 간판 앞을 기웃거리다가 작은 정원을 지나 주택으로 들어가자 지역 특산물로 만든 먹거리가 제일 먼저 반긴다. 한 박자 느리게 퍼지는 커피 향이 안쪽으로 안내한다. 국내산 깨를 짜내 고소한 참기름, 엿기름이 들어가 달달한 식혜 등 방앗간이라는 이름처럼 정겨운 식품이 가득하다. 식품뿐 아니라 작가가 손수 제작한 공예품도 공간 한편을 빛낸다. 투박한 매력의 접시, 반대쪽에는 깔끔한 디자인의 머그잔 등이 어우러져 작은 전시를 보는 듯하다. 지역 특산물로 만든 먹거리와 공예품을 구경하다 연남방앗간의 시그너처 음료인 참깨라떼를 손에 쥐고 카페를 나온다. 참기름 크림에서 고소한 냄새가 올라온다. 고소한 냄새에 입맛을 다시는 것을 보면, 사람 역시 방앗간을 찾는 참새와 다를 바 없다는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구름 사이로 내리는 따스한 햇살을 만끽하고, 커피를 손에 든 채 여유로운 산책을 이어간다.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사람이 드문드문 보인다. 작은 독립 서점에 들러 책 내음을 맡는다. 여행 에세이, 시집, 소설 등 제각기 다른 매력을 지닌 책이 자신을 읽어 주길 바라며 책장에 놓여 있다. 책을 하나씩 들어 품은 이야기를 톺아본다. 책에서 풍기는 종이와 잉크 냄새, 글의 향연에 빠져 한동안 문장의 바다에서 헤엄친다. 한 장씩 천천히 넘기다 보니 점점 얇아지는 남은 책장이 아쉽게 느껴진다.
한창 독서가 이어지던 무렵, 어디선가 기차 지나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귀로 흘러들어 온다. 호기심에 읽던 책을 덮고 기차 소리를 따라 다시 걷는다. 숲길 공원 끝과 이어지는 경의중앙선 위로 기차가 바쁘게 달린다.
물결 이는 수색역
다음을 재촉해 보지만 재빠른 전철은 이미 저 멀리 흐릿하다. 전철이 지나간 길을 따라 걷자 어느덧 한가로운 분위기가 감도는 수색역에 다다른다. 수색역은 경의선이 처음 개통했을 때부터 자리를 지킨 역이다. 신촌역처럼 구 역사가 남지는 않았지만, 수색(水色)이라는 이름을 형상화한 듯 넘실거리는 승강장 지붕을 가진 지금 역도 인상 깊다. 물결 같은 지붕 사이로 열차가 도착한다. 열차에서 사람들이 내리고 탄다. 각자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재촉한다.
열차를 타고 차창 밖 풍경을 감상하는 여정만큼 열차가 달린 길을 천천히 걷는 여정도 감미롭다. 걷지 않았으면 발견하지 못했을 풍경을 되새김질한다. 서울의 역사를 품은 건축물, 관계 속에서 피어나는 예술 공간, 로컬 식재료가 빚어낸 가게와 고요히 독서를 즐긴 책방까지. 도착지를 정해 놓지 않아도 발걸음 닿는 그곳이 목적지였다. 느린 여정이었으나 돌아보면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만큼 설레는 과정이 따르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마음속 서랍에 두고 종종 꺼내 볼 오늘의 여정을 소중히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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