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멀리 연달아 이어지는 산이 평야를 보호하듯 감싼 대지엔 계절이 가득이었다. 봄에는 봄을, 여름에는 여름을, 가을 겨울에는 또 가장 그 계절다운 풍경을 자연이 꼭꼭 담아 두는 그릇 같은 곳. 마침 호남선 연산역이 곁에 지나 사람과 물자가 들고나기 편리했다. 기찻길 옆 커다란 곡물창고 다섯 동은 채워지고 비워지며 논산의 풍요를 전국에 전하는 호시절을 보냈다. 세월이 지나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이 있으니, 변하지 않은 것은 여전히 논산이 수많은 특산물을 자랑하는 도시라는 점이고 변한 것은 곡물창고가 쓰임을 다해 원래 역할을 잃었다는 점이다. 어감마저 스산한 폐창고가 다섯 동. 그곳이 화사한 문화창고로 거듭났다고 했다. 재생, 어제를 안고 재해석해 다시 태어난 공간을 축하하러 논산행 KTX에 올랐다.
사람을 모으는 건 곡식만이 아니다. 특별하고 재미있으면,
잘 놀게 하면 사람이 온다. 시간과 문화를 채워 넣은
기찻길 옆 문화창고가 조용한 동네에 새 기운을 불어넣는다.
산업화 시대의 소중한 생활 유산
지금도 기차가 다니는 연산역 앞에 창고 다섯 동이 옹기종기하다. 1970년대를 전후해 지은 네 동과 2003년에 건축한 한 동이다. 약 330제곱미터(약 100평) 규모의 창고는 나란히, 혹은 마주 보고, 또는 기역 자로 들어섰다. 쓰임을 다한 건물이 어떤 쇠락 과정을 겪는지 우리는 흔히 목격한다. 먼지가 쌓이고 쓰레기가 버려지고 귀퉁이가 떨어져 나가더니 몸체가 부서지고 흉물 취급을 받다 결국 철거된다. 과거 언젠가는 다른 어디도 아닌 여기에 반드시 필요하다 해서 세웠건만, 필요 없다고 돌아선 뒤 건물의 운명이란 비슷비슷하다.
일용할 양식을 채웠던 창고, 논산 사람이 논산 땅에 땀과 정성을 쏟아 기른 농산물을 저장하고 판매해 가족을 건사하던 고단하고도 뿌듯한 기억을 다 지나간 이야기 취급해야 할까? 창고는 깨끗하게 밀어버리고? 논산시와 건축가 황순우 총괄기획자를 비롯한 뜻있는 이들이 머리를 맞댔다. 인천아트플랫폼으로 도시 재생의 힘을 증명한 황순우 감독은 창고를 “20세기 산업화 시대의 모습을 간직한 ‘생활 유산’”이라 정의하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접근했다. 논산시도 같은 생각이었다. 사람을 모으는 건 곡식만이 아니다. 특별하고 재미있으면, 잘 놀게 하면 사람이 온다. 곡식 대신 문화 예술로 사람을 모으고 소통하게 하자 기획했다. 전국에 곡물창고가 무수하다 해도 야트막한 야산과 논밭, 간이역과 기찻길, 100여 호 규모의 마을이 어우러진 연산의 곡물창고는 오로지 연산면만의 풍경이다. 수십 년 연산과 함께한 기억을 안은 폐창고가 마침내 지난 3월 1일 문화창고로 문을 열었다.
1동은 다양한 문화 예술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담쟁이예술학교, 2동은 공유주방인 연산부엌과 술 공방, 커뮤니티룸, 루프톱 등으로 이루어진 커뮤니티홀, 3동은 카페, 4동은 여러 가지 활용이 가능한 다목적홀로 개관했고 5동은 장차 ‘기찻길 옆 예술놀이터’로 운영할 예정이다. 논산시와 황순우 감독은 이번 프로젝트에서 창고의 쓰임을 정할 때 주민 의견을 최우선해 들었다. 수개월 동안 공들여 주민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기억과 소원을 물었다. 주민과 방문객 모두에게 사랑받고 유용한 공간을 조성하고 싶어서다. 그 결과가 과거의 기억과 오늘의 소원, 내일을 만드는 가치가 담긴 다섯 동이다.
지역을 놓치지 않으려는 의도가 곳곳에서 눈에 띈다. 지역 아이들이 몸짓으로 마음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는 ‘몸의 학교’를 수강하고, 평생 미술이라고는 남의 나라 얘기로 여긴 어르신이 ‘판화 학교’ 학생이 되어 작품을 창작하는 기쁨을 누린다. 문화 예술이 삶을 얼마나 풍부하게 하는지 주민이 먼저 체감하고 있다. 2동 커뮤니티홀에 전시한 청년 농부의 제품은 품질이 믿음직하고 디자인이 예뻐 호기심이 간다. 단순히 연산을 구경하는 관광을 넘어 지역에 좀 더 가깝게 다가가서 들여다보고 알아 간다.
폐창고의 화사한 변신, ‘다시 봄’
연산문화창고 개관 기념 프로그램은 전시 <다시 봄, 다시: 봄>이다. 3동 카페와 4동 다목적홀, 5동이 전시장이다. 벽을 널찍하게 터서 개방한 카페는 앞에 연못을 내어 바라보는 맛이 시원하다. 손님들은 휴대전화와 사진기를 손에서 떼지 못한다. 박방영 작가의 대형 매화 그림이 카페에 화사함을 더한다. 작가 특유의 생동감 넘치는 붓글씨가 매화와 조화를 이루어 봄기운을 북돋는다. 연못에는 강용면 조각가의 작품이 눈길을 끈다. 수많은 작가가 서울로 갈 때 지역을 고집해 40여 년을 걸어온 조각가다. 공공 조각으로 익숙한 그의 작품 탄생지는 군산의 옛 곡물창고를 개조한 작업실. 같은 ‘창고 출신’으로서 연산문화창고와도 맞아떨어지는 작품 배치다.
4동 다목적홀 전시는 동서양과 장르를 아우른다. 국내외에서 행한 ‘태그맨’ 퍼포먼스로 유명한 박경종, 경쾌한 색의 로봇 시리즈가 추억과 새로운 감각을 자극하는 찰스장, 개인사에서 아픔을 겪은 뒤 여성의 고통을 공감하고 위로하는 작품 세계를 펼치는 낸시랭, 논산 지역의 이호억·김창겸 작가 등이다. 평생 실경산수화를 그린 신태수 작가는 논산에서 작업한 신작을 내놓았다. 1년간 실제 머무르면서 관찰한 구석구석을 화폭에 옮긴 스케치와 대작이다. 손바닥만 한 스케치에서 출발해 가로 5미터 65센티미터의 대작 ‘금강’이 되기까지 작가는 이곳을 몇 번이나 방문하고 머릿속에 떠올리고 가슴으로 음미해 손끝에 실었을까. 작은 씨앗이 뿌리내리고 큰 나무로 자라게 한 시간과 정성, 솜씨를 생각한다. 작가의 그림 속 논산의 다른 곳도 궁금해진다.
‘풍화’ ‘묘화’ 두 작품을 설치한 5동의 ‘풍화, 아세안의 빛’은 화룡점정이다. 어두컴컴한 실내 저편, 백열전구 216개가 번갈아 점등하며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묘화’를 배경으로 점멸을 반복하는 풍등 105개가 오르내린다. 바닥엔 수조를 조성해 은은한 불빛을 반사한다. 고요한 음악이 흐르고, 불은 켜졌다 꺼졌다 하고, 풍등은 천천히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풍경을 홀린 듯 감상한다. 신비롭다. 누구나 탄성을 터뜨리고 사진과 동영상을 찍은 다음에도 오랫동안, 정말 한참을 바라본다. 빛을 테마로 한 감각적 작품을 선보여 전시마다 화제를 모은 사일로랩의 이 작품은 2019년 ‘한-아세안 수교 30주년’을 기념해 처음 설치했다가 호평에 힘입어 부산, 담양, 서울, 필리핀 전시를 거쳐 이번에 논산에 왔다.
전시장을 나오는 사람들 표정이 한결같다. 좀 전에 본 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는 얼굴. 소중한 사람에게 소개할 거리를 챙긴 얼굴. 밖은 환하고 하늘은 그 무엇보다 넓다. 창고가 크다지만 이 창고들 삼각 지붕 위, 논밭과 마을 위, 기차역 위 하늘은 더욱 벅차게 넓고 높다. 연산의 시간과 문화를, 평화롭고 청정한 풍경을 눈으로 양껏 베어 문다. 문화창고의 삼각 지붕이 만든 스카이라인이 사랑스럽다.
번갈아 점등하는 백열전구를 배경으로 점멸을 반복하는 풍등이
천천히 오르내린다. 아래엔 수조의 물이 빛을 반사한다. 홀린 듯 오랫동안 감상한다.
소중한 사람과 같이 보고 싶은 풍경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돈암서원 전시의 감동
돈암서원에서도 <다시 봄, 다시: 봄> 전시가 이어진다. 놀라운 일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1634년 창건해 400여 년 역사를 지닌 서원이 오늘의 문화 예술에 자리를 빌려주었다. 서원 강당 중 최대 규모인 데다 양옆에 눈썹지붕을 단 독특한 양식의 응도당, 2층 누각인 산앙루, 양성당 앞마당, 장판각 등이 모두 전시장으로 변모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이 혼란한 시기에 예학을 정립해 시대를 바로 세우고자 한 사계 김장생 선생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고 김집·송시열·송준길 선생 같은 대학자를 배향한 서원은 규모가 일러주듯 많은 스승과 제자를 길렀다. 그들의 사상사가 곧 조선 후기 철학사의 큰 줄기다.
그곳에 강용면·낸시랭·민병헌·박방영·신태수·이자연·찰스장 작가의 21세기 작품을 전시한 풍경은 충격이고 감동이다. 김장생 선생이 주자의 <가례>를 해설해 지은 <가례집람>이 꽂혔던 서가에 로봇 그림을 설치하고, 유생이 공부하고 잡담을 나눴을 기숙사에는 민병헌 작가가 오래 응시해 필름 카메라로 찍고 인화한 흑백사진을 걸었다. 과감한 시도에 가슴이 뛴다. 그냥 잘 지은 한옥에서 여는 전시가 아니다. 세계가 인정한 유서 깊은 공간과 오늘의 예술이 만난 현장이다. 과거 선비들도 글씨와 그림, 문장을 사랑했으니 서원은 좋은 전시장이다. 과거와 현재, 역사와 예술의 조화와 팽팽한 긴장이 즐겁다.
문화를 채워 넣은 창고를 즐기다
이 여행은 연산역이 지척이라는 점이 매력을 더한다. 연산역은 2007년부터 운영한 철도 체험 프로그램이 입소문 난 테마 기차역이다. 기차를 개조한 전시관에서 기차를 알아보고 두 팔 벌려 기찻길을 걷고 레일바이크를 타고 KTX 포토 존에서 사진을 찍는다. 토끼 농장 또한 아이들이 신나 하는 필수 코스. 1911년 건축한 급수탑은 한국에 남은 가장 오래된 급수탑이라 가치가 높다.
기차가 사람과 물자를 잇고, 창고를 있게 했다. 사람들은 기차 타고 와서 문화 예술로 재탄생한 연산문화창고를 즐긴다. 문화가 사람을 모은다. 인근 마을의 어르신도, 나들이 나온 아이도 시간과 문화를 채워 넣은 창고에서 논다. 몇 시간이고 훌쩍 그렇게 보낸다. 내 안의 곳간도 그만큼 차오른 기분이다. 풍요로운 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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