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자는 죽어서도 별을 품었다. 살아생전엔 별의 뜻을 받들다가,
봉분 아래 누워서는 덮개돌에 아로새긴 별자리를 천년 동안 이마받이했다.
해가 지면 어김없이 별이 뜬다. 검푸른 하늘 위로 총총 밝아 가는 별, 저 별들. 머나먼 과거에도 별빛은 이 땅에 닿았을 것이다. 별이 밤을 관장하던 시절이 있었다. 옛 사람에게 별은 경외와 신비의 대상이었다. 이야기의 소재가 되고, 날씨를 내다보거나 농사 운과 국운을 점치는 도구로 쓰이기도 했다. 천체 운행을 관측하고 제의를 집행하는 이는 지구상 어느 문화권에서든 전능하고 고귀한 인물로 추앙받았다.
죽으면 땅에 묻힐 게 아니라 그저 바람이 되어 자유롭게 떠돌고 싶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경남 함안 말이산고분군의 열세 번째 봉분을 마주하기 전까지 그랬다. 이 무덤에 묻힌 망자는 죽어서도 별을 품었다. 살아생전엔 별의 뜻을 받들다가, 봉분 아래 누워서는 덮개돌에 아로새긴 별자리를 천년 동안 이마받이했다. 하늘의 대리인이 누린 권력이란 그런 것이었다.
무덤 위에 펼쳐진 웅장한 풀밭 생태계
하늘에 별 흐르듯, 말이산고분군의 푸근한 둔덕에 꽃망울이 흐드러진다. 그 모습이 하나의 오롯한 소우주 같다. 1호분 옆 살구나무가 뿜어내는 황홀한 암향에 정신이 아득해지려는 찰나, “살구꽃이 곱기는 하지만, 여기도 좀 봐 주세요. 야생화는 허리를 굽히고 가만히 살펴야 하나둘 보이거든요.” 언덕 위에서 만난 장서영 문화관광해설사가 말을 붙인다. 그는 계절 따라 펼쳐지는 ‘풀밭 생태계’야말로 말이산고분군의 진귀한 면모라고 했다. “봄이면 보랏빛으로 피어나는 조개나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병아리 같은 양지꽃과 청순한 산자고도 지천이죠. 암끝검은표범나비가 제비꽃에 알 낳는 모습은 또 얼마나 신기한지요.” 말이산에서 자라는 온갖 꽃, 풀, 나무를 호명하는 장서영 해설사의 목소리에 봄의 명랑한 활기가 흐른다.
남고북저의 함안 땅 안에서도 말이산이 위치한 가야읍의 지형은 늪에 둘러싸여 있다. 해발고도 40~70미터로 주변보다 고지대인 말이산은 오랜 세월 필부들이 삶을 꾸려 온 터전이다. 콩과 보리를, 호두나무와 대추나무를 심은 흔적이 지금도 드문드문 남은 걸 보면 그 생활상을 얼핏 짐작할 수 있다. 저기 저 1호분 옆 살구나무도 먼 옛날엔 농가를 배불린 과실수로서 제 몫을 다했을 것이다.
후세가 선인들의 무덤과 더불어 살아가는 동안 봉토 대부분은 깎여 나갔다. 더러는 무덤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평평해지기도 했다. 오늘날 이곳엔 150여 개의 봉분이 솟아 있지만, 학자들은 1000기 넘는 고분이 존재할 것이라 추정한다.
말이산이 본격적으로 파헤쳐진 것은 일제강점기다. ‘발굴을 가장한 도굴’이란 소문이 횡행했다. 발굴 조사 당시 출토된 수많은 귀한 유물이 부지불식간에 어디론가 휩쓸려 반출되었기 때문이다. 그 황망한 풍경을 상상하면 슬픈 마음을 달랠 길 없지만, 역설적이게도 당시 봉분의 모습을 담아 둔 사진은 고분군 복원 과정에서 충실한 참고 자료로 쓰였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 목록 심사 중 경관 부문에서 특히 높은 점수를 얻은 이유가 바로 이 ‘근거 있는 복원’이었다. 말이산고분군을 포함한 7개 가야고분군은 올여름 유네스코 세계유산 정식 등재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
+ 서울 출발을 기준으로 서울역에서 ITX-새마을을 타고 함안역까지 약 5시간이 걸린다.
+ 가야고분군
경남 함안 말이산고분군을 비롯해 고성 송학동고분군, 김해 대성동고분군, 창녕 교동과 송현동고분군, 합천 옥전고분군, 경북 고령 지산동고분군, 전북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고분군 등 7개의 가야고분군은 2019년 1월에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 목록에 올랐고, 2020년 9월 최종 등재 신청 대상이 됐다. 유네스코는 올여름 가야고분군의 최종 등재 여부를 결정한다.
별이 된 이름, 아라가야와 말이산고분군
52만여 제곱미터(약 16만 평) 구릉지대에 펼쳐진 말이산고분군은 1500년 전 함안 일대를 지배했던 왕국 아라가야의 문화적 위용을 증거하는 거대한 박물관이다. 말이산은 흔히 머리산이라고도 불렸다. 아라가야의 머리, 즉 수장이 잠들어 있어서다.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엽, 아라가야의 전성기에 집중적으로 조성된 고분은 2킬로미터의 말이산 주능선과 서쪽의 완만한 가지능선을 따라 포진한다. 북쪽부터 일련번호를 매겼기 때문에 고분군 최북단에 1호분이 있고, 남쪽 끝에 37호분이 있다. 다만 지금까지도 발굴 조사가 진행 중이라 능선 중턱에서 터무니없이 큰 숫자가 부여된 고분을 만나기도 한다. 2, 3호분 아래 자리한 45호분과 12호분과 나란한 75호분이 그런 경우다.
아라가야의 존재감은 그간 금관가야와 대가야에 가려져 있었다. 한때 주변국에서 ‘형님 나라’로 모셨을 만큼 탁월한 외교술을 펼쳤다는 역사적 진실은, 현재 남은 사료가 부족한 탓에 미처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문화 수준도 상당했다. 질 좋은 흙으로 높은 온도에서 구워 낸 토기엔 불꽃무늬로 투공한 흔적이 있었고, 수레바퀴 형상이나 고개를 돌린 사슴의 동세를 섬세하게 표현한 제기가 말이산에서 가장 큰 고분인 4호분에서 발견되었다. 2019년에는 45호분에서 집, 배, 등잔, 동물 모양 토기가 출토되어 또 한 번 놀라움을 안겼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유물이 이합집산하는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한국관에도 아라가야의 그릇받침이 한 자리 차지한다니, 이들의 미감이 얼마나 독창적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기마 문화도 화려했다. 도항리 아파트 신축 공사장의 새로운 고분에서 정교한 만듦새의 말 갑옷이 발견됐다. 안장과 방울 등 여러 가지 말갖춤 유물이 출토된 이 고분은 오늘날 마갑총이라 불린다.
아라가야의 존재감은 그간 금관가야와 대가야에 가려져 있었다.
말이산고분군은 1500년 전 아라가야의 문화적 위용을 증거하는 거대한 박물관이다.
앞서 말한 ‘별자리 덮개돌’로 이름난 13호분은 1918년 일본인 학자의 주도로 처음 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 100주년을 맞은 2018년, 재정비하기 위해 봉분을 다시 헤치고 나선 학자들은 그제야 다섯 번째 덮개돌에 새겨진 남두육성을 맞닥뜨렸다. 궁수자리의 별 6개를 가리키는 남두육성은 한국과 중국에서 사용해 온 별자리의 이름이다. 덮개돌은 정확히 피장자의 눈높이에 위치했고, 그 위에 새긴 홈의 크기는 실제 별 밝기에 따라 제각기 달랐다. 암각화 고분이라는 별칭을 가진 35호분 옆에 자리한 도항리 고인돌에도 성혈이 그려진 것을 보면, 아라가야인의 과학 지식과 건축 기술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모든 것이 오랜 세월에 걸쳐 명맥을 이어 온 전통과 유산이다.
봄바람에 휘날리는 수천 개의 낙화, 직접 보지 않고는
그 상서로운 움직임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을 못다 헤아릴 것이다.
밤하늘에 띄워 보내는 꽃 떨기, 낙화
지켜 내야 할 또 다른 유산이 말이산고분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밤을 수놓는 불꽃의 향연, 괴항마을의 함안 낙화놀이다. 낙화놀이는 숯가루를 광목천에 말아 타래를 만든 후에 그것을 밤하늘에 태워 올리는 풍습이다. 조선 시대 선비들이 뱃놀이하며 즐기던 유희 중 하나인데, 이곳에서는 선조 때 한강 정구가 백성의 안위를 바라며 시작했다. 함안 낙화놀이가 벌어지는 장소는 괴항마을 언덕바지에 자리한 무진정 연못이다. 해마다 부처님 오신 날이 되면 마을 사람들이 못에 작은 뗏목을 띄우고 미리 만든 낙화 타래를 철사에 매단다. 이때 걸어 올리는 타래는 대략 2000개, 많으면 3000개에 달하니 ‘놀이’라기엔 제법 고된 일이다.
어둠이 내린 후 드디어 점화를 시작한다. 미리 달아 둔 타래에 불을 붙이니 낙화가 날개를 단 듯 솟아올라 검푸른 밤하늘을 밝힌다. 봄바람에 휘날리는 수천 개의 낙화, 직접 보지 않고는 그 상서로운 움직임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을 못다 헤아릴 것이다.
함안면 괴항마을은 이 풍습을 계승하는 단체인 ‘함안괴항낙화마을 협동조합’을 만들어 운영 중이다. 1980년대부터 이곳에서 낙화놀이를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2020년에는 마을 어귀에 공공 미술 프로젝트 일환으로 낙화놀이의 주요 소재인 숯, 불, 물을 테마로 한 전시관과 기록관을 꾸몄다. 불꽃으로 흩어지는 타래를 형상화한 설치미술 작품, 낙화놀이하는 사람들을 표현한 알록달록한 타일 벽화를 골목골목에서 만날 수 있다. 함안을 찾는 여행자에게 낙화놀이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려는 시도다.
무진정이 자아내는 비경과 이야기는 그저 눈부시다.
불 밝힌 무진정과 그 물그림자가 만개한 벚나무처럼 환하다.
무궁무진한 비경, 무진정의 밤
어느덧 마을이 어둠에 휩싸인다. 낙화놀이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무진정을 걷는다. 무진정 연못은 그 아름다움이 지극한 까닭에 많은 이의 입에 오르내리며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려 왔다. 다만, 모두 정식 명칭은 아니다. 가장 널리 퍼진 이름은 이수정이다. 옛 함안 사람들은 일대에 5리 간격으로 커다란 나무를 심었는데, 그 두 번째 나무가 드리운 정자를 가리켜 ‘이수정(二藪亭)’이라 했다. 훗날 이것이 와전되어 ‘이수정(二水亭)’, 즉 두 갈래 물이 만난 정자로 알려졌다. ‘충노담(忠奴潭)’이라는 별칭도 존재한다. 이는 함안 조씨 문중에서 충직한 노비 대갑에게 내린 ‘충노대갑지비(忠奴大甲之碑)’에서 온 이름이다. 대갑은 정유재란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주인 조계선을 따라 명을 달리한 인물이다.
못의 이름을 무어라 부르든, 무진정이 자아내는 비경과 이야기는 그저 모두 눈부시다. 조명을 밝힌 건물과 그 물그림자가 만개한 벚나무처럼 환하다. “온갖 경치가 모두 모였으니 진실로 조물주의 무진장이라 하겠다.” 함안 출신의 조선 중기 문신 주세붕은 <무진정기>를 지어 무진정의 비경을 노래했다. 생육신 조려의 손자인 조삼 선생이 지어 올린 무진정은 어지러운 세파를 벗어나 유유자적하고자 했던 선비의 마음이 깃든 건물이다. 조삼은 단출하면서도 소박한 멋이 느껴지는 이 정자에 자신의 호를 따 무진정이라 이름 붙였다.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 무진정 지붕 위에 떠오른 별 하나가 자꾸 눈에 밟힌다. 1500년 전 밤하늘에서 출발한 우리의 걸음은 여전히 저 영묘한 별 아래 있다. 시간 여행자의 밤이 깊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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