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뱉은 숨이 뿌옇게 흩어진다. 따뜻한 몸속에서 토해 낸 온기가 찬 공기와 맞닿자 금세 수증기로 변했다. 얼어붙은 강을 지나는 바람이 이불인 양 쌓인 눈을 보드랍게 훑었다. 가지마다 잎눈이 달리고 흙에서는 새싹이 고개를 들지만, 철원은 여전히 겨울에 덮인 채다. 숨처럼 흩날리는 눈이 얼음 위를 달음질친다. 날리는 눈을 따라 풍경을 살피자 한탄강 절벽 위로 해가 느릿느릿 올라오는 중이다. 그 아래 붉은 태봉대교가 한탄강 물윗길 트레킹의 출발점을 지키고 서 있다. 억겁 세월이 만든 자연에 들어간다. 앞서간 바람이 길을 안내하는 것처럼 등을 민다. 바람과 눈의 안내를 따라 걸음을 내딛었다. 큰 여울을 뜻하는 한탄강, 이름답게 탁 트인 넓은 강이 여행자를 품는다.
걸음을 뗄 때마다 쿵 하는 묵직한 소리가 고요한 강을 채운다. 얼음에 금이 가면서,
또는 얼음과 얼음판이 부딪히면서 나는 울림이 물윗길을 걷는 사람에게 말을 건넨다.
시간은 흔적을 남긴다
물윗길, 말 그대로 물 위를 걷는 길이다. 두껍게 언 강에 부교를 띄워 길을 냈다. 서리가 내린 부교 위로 조심스레 올라섰다. 걸음을 뗄 때마다 쿵 하는 묵직한 소리가 고요한 강을 채운다. 얼음에 금이 가면서, 또는 얼음과 얼음판이 부딪히면서 나는 울림이 물윗길을 걷는 사람에게 말을 건넨다. 신선은 물 위를 걸어 다닌다 하던데, 신선이 자연과 대화를 나누는 방법은 어땠을까.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며 저 얼음처럼 메아리로 이야기했을까. 소리를 내는 강에 신선이 된 기분으로 인사를 건넨다.
태봉대교를 뒤로하고 얼마 후 거뭇한 절벽이 숨긴 보물, 주상절리가 드러난다. 과거에 묽은 용암이 몇 번이고 분출해 이 일대를 덮었다. 흘러내린 용암이 식어 쪼개진 채로 머무르다 조금씩 떨어져 나갔다. 침식으로 난 틈에 물이 흘렀고, 물길이 나자 더 많은 암석이 깎여 결국 강이 흐르고 협곡이 생겼다. 일정한 형식 없이 마구 수축하고 갈라진 주상절리가 위로 솟았다. 하늘을 향해 뻗은 돌이 모여 거대한 절벽을 이룬다.
+ 철원 한탄강 물윗길 트레킹
2020년 유네스코가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한 한탄강 위를 걷는다. 매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만 공개하는 물윗길은 약 8킬로미터 코스로 구성된다. 시간이 빚은 한탄강의 자연이 신비롭다.
먼 옛날, 송도 사람인 세 형제가 이곳에 놀러 왔다. 형제는 비취색 강과 현무암이 어우러진 풍경에 반해 절벽 위에서 노닐었다. 이 절벽 밑에는 이무기가 살고 있었다. 포악한 이무기는 세 형제를 죽일 기세로 달려들었고, 이무기와 싸우다가 두 사람이 물려 죽었다. 나머지 한 사람이 사투 끝에 결국 이무기를 잡았다. 이런 전설에 따라 이곳을 송도포(松都浦)라 불렀고, 지금에 와서 송대소(松臺沼)가 되었다. 형제가 이무기와 싸울 때 흔적이 남은 것인지 검은 절벽에 흰색, 붉은색, 주황색 점이 군데군데 보인다. 서양숙 지질공원해설사가 주황빛 점을 가리킨다. “세월이 흐르며 돌에 핀 곰팡이에요. 분출한 용암의 성질에 따라 색이 층층이 다르기도 하지만, 주황빛이 도는 점들은 곰팡이랍니다. 시간이 지나면 돌에도 곰팡이가 피니까요.” 이렇게 시간은 단단한 것에도 흔적을 남긴다. 때로는 돌에 곰팡이를, 장소에는 전설을, 스치는 순간 속에는 이야기를 남기고야 만다. 송대소 뒤편으로 은하수교가 반긴다. 두루미가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모습에 덩달아 하늘을 올려다본다. 부굣길에 이어 은하수교 아래로 바윗길이 펼쳐진다.
이야기가 담긴 다리, 승일교
스르르 흐르는 소리가 귓가를 두드린다. 바위가 강 위로 머리를 듬성듬성 내밀었다. 마침 내려온 햇빛이 물에 닿아 윤슬이 생긴다. 반짝이는 물결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돌에 이리저리 부딪혀 생긴 파동이 잔물결을 만든다. 크고 작은 바위가 이어지다 구들장같이 넓은 마당바위가 드러났다. 누군가 마루로 쓰려고 자른 듯 평평한 바위 위로 올라섰다. 마당바위에 앉아 쉬며 한탄강을 바라본다. 옆에는 물이 오랫동안 흘러내려 바위 표면을 깎아 만들어진 돌개구멍이 숭숭하다. 구멍에 손바닥을 대 본다. 느릿하지만 성실히 흘러내렸을 물길을 생각한다.
짧은 휴식을 마치고 걷는다. 갈대인지 억새인지 모를 풀이 흔들거린다. 강변에 난 풀이 궁금해 서양숙 지질공원해설사에게 묻자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갈대와 억새는 산 정상에 사는 친구였다고 해요. 산 아래가 궁금하던 이들은 고민 끝에 내려가 보기로 하는데, 이때 갈대가 먼저 가겠다고 하죠. 금방 돌아오겠다던 갈대는 강과 호수 풍경에 반해 그곳에 자리를 잡았어요. 이름처럼 성격이 굳건한 억새는 갈대가 궁금했지만 산 위에서 내려오지 않았어요. 저는 이 이야기 덕분에 갈대와 억새가 헷갈리지 않더라고요.”
얽힌 이야기가 있으면 기억하기 쉽다. 승일교는 남한과 북한의 이야기가 어린 다리다. 중앙을 기준으로 남한이 공사한 쪽은 모서리가 둥근 사각형, 북한이 공사한 쪽은 아치형이다. 철원은 한국전쟁 후 남한에 편입된 수복 지구다. 전쟁 전 북한이 기초 공사와 교각 공사를 했고, 전쟁이 발발한 뒤에 철원을 편입한 남쪽이 마무리 공사를 했다. 당시 남한과 북한의 수장인 이승만과 김일성에서 한 글자씩 따 승일교라고 부른 것이 다리 이름이 되었다. 승일교 뒤엔 차가 다닐 수 있는 붉은색 한탄대교가 자리한다. 과거에 만든 승일교와 현재에 만든 한탄대교가 함께한다.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가 얽힌 곳이다.
+ 물윗길 출발지인 태봉대교와 가까운 역은 철원 백마고지역이다. 현재 경원선 동두천역~연천역 구간은 전철화 공사로 열차 운행을 중단해 동두천역에서 대체 운송 수단인 직행버스를 타고 백마고지역으로 갈 수 있다.
거대한 바위가 가까워진다. 거인이 와서 밀어도 꿈쩍 않을 고석바위가 외로이 자리를 지킨다.
고석정 한편의 우람한 바위와 그 위에 자라는 나무들을 바라본다.
녹아내리며 드러나는 것
어느새 해가 머리 위를 비춘다. 바윗길이 끝나고 다시 물 위를 걷는다.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체중이 부교에 전해져 길이 출렁인다. 얼음 풀린 강물이 아름다워 한참 물만 감상하며 걷다 길에 드리운 그림자를 마주하고 퍼뜩 앞을 본다. 거대한 바위가 가까워진다. 거인이 와서 밀어도 꿈쩍 않을 고석바위가 외로이 자리를 지킨다. 바위를 지나 고석정에 오르자 예스러운 분위기가 그득하다. 고석정 한편의 우람한 바위와 그 위에 자라는 나무들을 바라본다. 하나하나 세기도 어려운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가면 고석정이 있는 공간까지 바위로 가득했겠다. 이토록 부드러운 공기의 흐름이 쌓이고 쌓여 단단한 암석을 부수고 또 세우기도 한다. 고석정에 머물렀다는 신라와 고려의 왕은 누각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바위를 바라봤을까, 임꺽정은 어떤 도술을 썼기에 바위 틈으로 몸을 피했을까 상상하며 고석정을 나선다.
한층 겸손해진 마음으로 순담계곡을 향한다. 조선 정조 때 김관주라는 사람이 요양할 곳을 찾다가 일대의 풍경이 아름다워 거처를 정하고 연못을 팠다. 그 근처에 순약이라는 약초를 재배해 먹었더니 지병이 나았다 하여 순담계곡이란 이름이 붙었다. 또르르 가볍던 물소리가 곧 힘차게 울린다. 천천히 녹아 흘러온 물이 쏟아진다. 잔잔하게 흘러왔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힘이다. 바위 끝에 매달린 얼음이 보석처럼 영롱하다. 바위 위 눈이 녹아 밑으로 흐르다 어는 과정에서 여울과 맞닿아 보석 모양으로 맺혔다. 순약초뿐 아니라 바위 끝에 매달린 얼음 수정과 힘찬 순담계곡 풍경이 그의 병을 낫게 한 것이리라. 얼음이 녹으면 지금과는 다른 풍경이 감탄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눈이 녹아 봄이 되듯 한탄강에 열린 얼음 수정이 물로 되돌아가는 그날, 간지러운 봄기운이 몰려오겠다. 아름다운 설경에 작별 인사를 고하며 트레킹을 마쳤다. 따뜻한 기운이 피어오른다.
● 물윗길의 부교는 매년 다른 위치에 다른 모양으로 놓는다.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보존하며 안전하게 즐기기 위해서다. 문의 033-455-7072
+ 철원 한탄강 주상절리길
아찔한 스릴과 절경을 동시에 즐긴다. 3.6킬로미터 잔도는 절벽을 따라 순담계곡부터 드르니마을까지 이어진다. 한탄강이 품은 주상절리 협곡 풍경을 색다른 시선으로 보여 준다.
한탄강 물윗길 명소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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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봉대교
한탄강 상류 계곡에 놓인 철제 다리다. 궁예가 세운 나라 태봉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다리 위에 놓인 번지점프대에서 스릴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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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소
높이 30미터의 수직 적벽 주상절리다. 지층에 따라 붉은색, 회색, 검은색 등 다양한 색을 띤다. 수직 적벽 밑은 한탄강에서 수심이 가장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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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교
2020년 완공한 다리로 바닥을 유리로 만들어 한탄강을 내려다보며 걷는다. 마치 은하수를 걷는 것 같아 은하수교라 이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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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바위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바위로 가장자리에는 모래사장이 펼쳐진다. 절벽에서 보면 왕발 형태라 왕발바위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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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일교
한국전쟁이 발발할 무렵 북한이 건설하기 시작하고 철원 수복 후 남한이 완공해 좌우 모양이 다르다. 남북의 기술이 응축된 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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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정
화강암인 고석바위와 누각이 있는 일대를 고석정이라고 부른다. 신라 진평왕과 고려 충숙왕이 이곳에서 노닐었다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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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담계곡
고릴라바위, 자라바위 등 기묘한 형태의 바위와 지형이 세월을 가늠하게 한다. 여름에는 자연경관을 즐기며 래프팅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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