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금빛열차에 올랐다. 서울 용산역에서 충남 서천 장항역으로 가는 길,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철 지난 난센스 퀴즈 하나를 떠올린다. “한국에서 가장 긴 이름을 가진 배우는 누구일까?” 짐작하겠지만, 답은 장항선이다. 영화 <왕의 남자>의 내시 김처선과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의 팔봉 선생이 바로 그다. 장항선이라는 예명이 그의 고향 충남을 흐르는 지역 철도 노선에서 비롯했다는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얘기다. 한때 장항읍이 중흥을 이룬 산업도시였다는 사실까지 감안하면, 작명의 명분이 꽤 그럴싸하다.
+ 서울 출발을 기준으로 용산역에서 서해금빛열차를 타고 장항역까지 약 3시간이 걸린다. 코로나19 상황에 따라 운행 상황이 달라지므로 사전에 확인해야 한다.
장항선을 아시나요
아이러니한 얘깃거리도 하나 덧붙여야겠다. 장항선은 더 이상 장항을 지나지 않는다. 현재 장항선이 지나는 장항역은 행정구역상 서천군 장항읍이 아닌 이웃 동네 마서면에 속한다. 철도 직선화 사업 때문이다. 과거 장항선은 천안시 천안역에서부터 장항읍 창선2리에 위치한 옛 장항역까지 운행하는 노선이었다. 1922년 운행을 시작한 충남선은 한국전쟁 이후 종착역인 장항역에서 이름을 따 1955년 장항선으로 개칭했다. 80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천안역과 장항역을 오간 장항선은 2008년 군산역과 익산역을 잇는 군산선을 흡수·통합해 총연장 154.4킬로미터로 거듭난다. 그렇게 장항역은 종착역으로서의 역할을 잃었고, 역사 또한 철로를 연결하기에 용이한 지금 자리로 이설된다.
수송 기능을 상실하고 끝내 폐역이 된 옛 장항역은 장항의 역사를 계승하기 위한 문화시설로 부활했고,
장항도시탐험역이라는 새 간판도 얻었다.
이런저런 옛일을 곱씹자니 어느덧 열차가 새 장항역에 다다른다. 우리의 여정은 여기서 약 4킬로미터 떨어진 옛 장항역인 장항도시탐험역에서시작될 것이다. 수송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끝내 폐역이 된 옛 장항역은 장항의 역사를 계승하기 위한 문화시설로 부활했고, 2019년 5월 1일부로 장항도시탐험역이라는 새 간판을 얻었다. 갈아입은 새 옷도 인상적이다. 위치에 따라 색이 달라 보이는 다이크로익 필름을 전면에 붙여 멀리서도 알록달록한 빛깔을 뽐낸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비로소 장항역의 과거를 어림짐작할 수 있다. 1층 대합실이었던 자리는 각종 공연과 전시가 열리는 소통 창구 맞이홀과 아이들을 위한 놀이방인 어린이 시-공간으로 단장해 손님을 반긴다. 2층에선 쨍한 꽃분홍색으로 꾸민 도시탐험카페가 눈을 사로잡고, 맞은편엔 장항의 옛 모습을 기록한 장항이야기뮤지엄이 발길을 잡아 끈다. 동선은 자연스레 전망대로 연결된다. 탁 트인 옥상에 서자 ‘장항선셋’ 간판 너머로 낡디낡은 철로와 승강장이 펼쳐진다. ‘기벌포영화관’이라고 써 붙인 작은 영화관, 철로 옆으로 뻗어 난 아기자기한 골목길까지도 한눈에 든다. 활기 어린 마을 풍경 앞에서 어쩐지 마음이 두근거린다. 장항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가 봐야겠다.
● 지역 청년 커뮤니티 두빛나래는 황금빛 달고나 만들기 체험을 비롯해 다양한 생활 관광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 문의 041-956-8255
자전거 타고 시간 여행
화사한 민트색 자전거를 타고 페달을 구르니 훌쩍 봄이 온 듯한 기분이다. 불어오는 바람도 제법 훗훗하다. 머지않아 폐선로 틈틈이 자라난 들풀이 연둣빛으로 물들고, 선로 옆 담장을 휘감은 장미 덩굴이 꽃망울을 틔울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자전거를 타는 게 얼마 만인가. 장항도시탐험역 1층 자전거 대여소에서는 ‘도시 탐험자’를 자처하는 누구에게나 기꺼이 자전거를 내어 준다.
색색의 벽화가 수놓은 거리를 달린다. 바퀴는 이제 장항 6080 음식 골목 맛나로로 흘러들어 간다. ‘6080’은 1960~1980년대 장항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음을, ‘맛나로’는 장항의 이름난 먹거리가 늘어섰음을 뜻한다. 장미분식, 기찻길 카페, 나드리 김밥···.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은 가게를 지나치다가 ‘금희다방’이라 쓴 간판 앞에서 잠시 머뭇거린다.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다방으로 이어진 계단을 오른다. 향긋한 커피 내음이 넘실거리는 주방을 슬쩍 들여다보니 눈부신 백발의 노인장이 달걀을 부치고 있다. “커피 한 잔에 이 달걀부침이랑 깨죽을 같이 들어 봐요. 이게 우리 집에서 아침 9시까지 내는 모닝 세트예요. 새벽부터 바다로 나가야 하는 일꾼들이 들러 간단히 요기하고 간다우.” 아침 특별 메뉴를 만들어 파는 다방이 장항에만 몇 군데 더 있다는데, 이게 바로 항구의 낭만 아닐까. 달걀부침을 후루룩 들이켜고 커피와 깨죽으로 입가심을 한다. 목구멍부터 명치까지 뜨끈한 기운이 퍼진다.
자전거는 골목길을 오래 달리지 못하고 자꾸 멈춰 선다. 이번엔 벽면 가득 동백꽃으로 장식한 적산 가옥 앞에 주차한다. 이곳의 정체는 카페이자 장항 청년 공동체가 운영하는 커뮤니티 공간 두빛나래다. 장항청년 아이스브레이크 협동조합의 유홍석 대표가 이끄는 생활 관광 프로그램 ‘향미와 함께하는 장항 6080 골목나들이(이하 향미 여행)’의 베이스캠프이기도 하다. “향미가 누구냐고요? 하하, 향미는 장항이 간직한 향(香)과 미(味)를 의미합니다. 장항의 바다 냄새, 노포에 깃든 추억의 맛을 음미하길 바라는 마음을 반영한 거죠.”
겨우내 휴식기를 가진 향미 여행은 3월부터 다시 기지개를 켜고 방문객을 맞이한다. 코스는 이전과 거의 비슷하지만, 계절에 따라 미션과 상품을 조금씩 달리할 계획이란다. 주요 미션은 벽화 거리 ‘장항역 가는 길’을 걷고, 옛 전차대와 철로 건널목에서 숨은 금괴를 찾는 것이다. 종착역에서 열차의 방향을 바꾸는 장치인 전차대는 장항선의 영화로운 과거를 간직한 장소다. 그런데 왜 하필 금괴를 찾는 걸까? “금괴가 옛 장항제련소에서 사라진 물건이라고 상상해 보는 거예요. 쇠락한 마을에 희망의 황금빛 불씨를 불어넣자는 뜻이 담겼죠. 금괴를 발견하는 여행자에겐 서천 특산품과 향미 여행 기념품으로 맞바꿀 수 있는 황금 주화와 복권을 드린답니다.” 듣고 보니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한 편의 모험기 같다.
노란 햇살이 갯벌 위 연흔을 어루만지며 느리게 내려앉는다.
물결처럼 굽이치는 이 아름다운 무늬의 연원은 대체 무엇일까.
덧없는 생각에 침잠할수록 자연의 섭리 앞에 겸손해진다.
바다부터 솔숲까지, 장항의 자연을 달리다
이쯤에서 되새겨야 할 이름이 있다. 장항제련소. 옛 장항역만큼이나 장항의 굴곡진 역사를 품고 있는 건물이다. 장암리 전망산에 우뚝 솟은 장항제련소의 굴뚝과 통통배가 늘어선 장항 신항의 모습은 이 도시의 어제와 오늘을 집약한 풍경이다. 1930년대 장항은 일제강점기 최후의 수탈 기지였다. 172만 제곱미터(약 52만 평)의 갈대숲과 갯벌을 매립해 도시를 조성하면서부터 호젓한 항구 마을이던 장항의 평화는 깨어지기 시작했다. 1936년에 지은 장항제련소와 그보다 5년 앞서 놓인 장항선(당시 충남선)은 우리 물자를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장항 곳곳에 자리한 미곡 창고 또한 일제가 곡물을 착취한 증거다. 지금은 미곡 창고 대부분이 폐허가 되었지만, 일부는 군에서 매입해 주민과 여행자를위한 문화시설로 탈바꿈할 예정이라고 한다. 2014년 등록문화재 제591호로 지정된 서천군 문화예술 창작공간도 그런 장소 중 하나다.
바퀴는 다시 길을 들어 장항송림 산림욕장을 향해 달려간다. 1954년 옛 장항농고(현재 장항공업고등학교) 학생들이 바닷바람을 막기 위해 식재한 곰솔 1200여 그루는 오늘날 27만여 제곱미터(약 8만 2000평)의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나무 그늘 아래엔 계절 따라 맥문동, 해국, 송엽국 등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눈을 즐겁게 한다. 높이 15미터, 길이 250미터의 장항 스카이워크는 장항송림의 하이라이트다. 장항은 물론이고 서천군 최고 전망을 선사하는 이곳은 지난해 7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갯벌 중 하나인 서천 갯벌과 신라가 당나라를 격파한 기벌포해전의 뜨거운 역사를 두 눈 가득 펼쳐 놓는다.
스카이워크 끄트머리에 놓인 망원경으로 뱃일하는 사람들을 훔쳐보다가, 시선을 슬쩍 옮겨 갯벌의 고운 표면을 들여다본다. 노란 햇살이 갯벌 위 연흔을 어루만지며 느리게 내려앉는다. 물결처럼 굽이치는 이 아름다운 무늬의 연원은 대체 무엇일까. 덧없는 생각에 침잠할수록 자연의 섭리 앞에 겸손해진다.
● 장항이라는 이름은 장암리와 항리에서 한 글자씩 따 온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장항제련소 굴뚝이 서 있는 장암리의 바위산을 전망산이라 부른다.
잊지 못할 장항의 맛
페달을 열심히 구른 탓일까. 허기가 맹렬하게 밀려든다. 자전거를 반납하기 전, ‘실비식당’ 앞에서 마지막으로 정차한다. 이곳은 단돈 8000원으로 18첩 반상에 홍어탕까지 맛볼 수 있는 귀한 백반집이다. “이건 병치조림, 저건 꼬록젓이에요. 아이고, 끓어 넘치기 전에 얼른 홍어탕 좀 잡솨 봐요.” 툭 하고 날아드는 사장님 말씀.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병치는 병어를, 꼬록젓은 꼴뚜기젓을 이르는 방언이란다. 그 말씀 받들어 홍어탕부터 한 술 떴는데, 아,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탄성이 절로 흘러나오는 맛이다. 삭히지 않은 생물 홍어와 미나리를 잔뜩 넣어 팔팔 끓여 낸 국물이 어찌 그리 맑고 깊은지. 병치조림과 꼬록젓의 감칠맛은 물론이고 보드라운 달걀찜, 할머니 손맛이 생각나는 고추무침, 뒷맛이 개운한 배추김치와 깍두기를 맛보는 동안에는 잠시나마 세상 모든 시름과 상념을 내려놓는다. 마지막 기차 시간은 자꾸 다가오는데, 왜 발길은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걸까. 누룽지까지 탈탈 털어 먹곤 겨우 자리를 물린다. 잊지 못할 장항의 하루가 저문다. 못내 그리울 장항의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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