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기운이 느껴질 때 의식처럼 찾아 듣는 음악이 몇 곡 있다. 반도네오니스트 고상지가 연주한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프리마베라 포르테나(부에노스아이레스의 봄)’도 그중 하나다. 피아졸라의 봄에 처연한 낭만이 깃들어 있다면, 고상지의 봄엔 씨앗이 싹을 틔우는 순간의 활기가 감돈다.
왼쪽에 33개, 오른쪽에 38개, 총 71개의 테클라로 142개 음을 자아내는 반도네온은 흔히 탱고 연주에 동원되는 악기로 알려졌으며, 음악계에선 ‘천상의 음색을 가진 악마의 악기’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음계 배치가 불규칙할뿐더러 같은 키를 누르더라도 주름 통을 어떻게 놀리느냐에 따라 소리가 달라질 만큼 주법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고상지는 천하의 반도네온을 길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이 악기가 지닌 깊고 짙은 음색에 자신만의 독특한 질감을 더해 왔다. 지난해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표창 수상은 이제까지 그가 이룬 예술적 성취를 만방에 알린 순간이었다. 연주는 물론 반도네온의 외연을 확장하는 작곡과 편곡을 통해 우리에게 새롭고 산뜻한 탱고의 세계를 열어 보인다. ‘출격’ ‘레드 헤어 히로인’ ‘어드벤처’···.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의 음악엔 게임과 애니메이션 세계에서 가져온 디테일이 어른거린다.
이제 막 2월 단독 공연 <엔 라스 솜브라스>를 마친 고상지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시시콜콜한 일과부터 기차 여행 이야기까지, 그의 답은 흐르는 멜로디처럼 돌아왔다. 3월 5일에 <피아졸라, 루이 암스트롱을 만나다>를, 3월 27일에 <프리다 칼로, 자클린 뒤 프레를 만나다> 앙코르 공연을 준비 중인 그는 잠시 숨을 고르며 다음 무대를 그리고 있다.
지난 공연 제목인 ‘엔 라스 솜브라스’가 인상적이었어요.
‘어둠 속에서’라는 뜻이죠. 이 ‘어둠’엔 두 가지 의미가 있어요. 하나는 사회적 페르소나를 벗고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공간과 시간, 그러니까 캄캄한 방이나 한밤중 이불 속 같은 시공간을 뜻해요. 다른 하나는 가면으로 감추지 않아도 되는, 어둠으로 오롯한 저마다의 모습을 가리켜요. 이번 공연에선 어둠을 감추지 않고 드러낼 수 있는 자유로움에 관한 시간과 음악을 선사하고 싶었죠.
이어지는 공연 일정으로 바쁘게 지내겠네요.
<엔 라스 솜브라스> 이후에도 2월에 첼리스트 홍진호와 페스티벌 공연을 준비하느라 연습과 편곡 작업을 병행해 왔어요. 새로운 곡을 꽤 여러 개 시도했거든요. 이젠 <피아졸라, 루이 암스트롱을 만나다> 편곡 작업이 남아 있죠. 날마다 코앞에 닥친 공연 편곡과 연습으로 꽉 찬 하루를 보내요. 아침에 일어나면 원두 갈아서 커피 내리고, 낮엔 내내 연습, 밤엔 편곡을 해요. 그러다가 두뇌 회전이 더뎌질 때면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보다가 잠이 듭니다. 아주 가끔 스트레스가 절정에 이를 땐 홍제천을 뛰어요.
‘홍제천의 그믐달’이 그렇게 탄생했군요.
사랑스러운 곡이에요. 좋아해 주셔서 감사해요.
어쩐지 부끄러워하실 것 같지만, 축하드려요. 지난해 큰 상을 받았잖아요. 혹시 음악가로서 꼭 받고 싶은 상이 있나요?
상 같은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아서 ‘꼭 받고 싶은 상’은 없어요. 운이 좋게도 심사위원 중 누군가가 제 음악을 높이 샀을 거라 짐작해요. 역시 감사한 일입니다.
지난해엔 아스토르 피아졸라 탄생 100주년을 맞아 정규 4집 앨범을 발매했고, 3월 공연에서도 피아졸라를 다룹니다. 고상지의 음악에서 피아졸라는 어떤 의미를 갖는 예술가인가요?
피아졸라는 제 인생의 중요한 터닝 포인트 중 하나죠. 그의 곡은 독창성 그 자체입니다. 예상치 못한 전개로 드라마틱하게 이어지는 멜로디, 화성, 리듬을 마주하고 있으면 가슴이 벅차올라요. 다행스럽고도 축복인 것은, 피아졸라가 자작곡을 연주한 음원이 좋은 컨디션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에요. 그가 아득한 과거의 인물이라 작품이 악보로만 존재한다면, 그래서 그 아름다운 선율을 들을 수 없었다면 제가 과연 이렇게 과감하게 음악인으로 인생을 바꿀 수 있었을까 싶네요.
얼마 전 개인 SNS에 게재한 ‘반도네온의 역사와 기원’에 대한 글을 읽었어요. 반도네온에 얼마나 큰 책임감을 갖고 있는지 느껴지는 섬세하고 애정 어린 글이었습니다.
그간 반도네온의 역사에 대해 잘못된 이야기(반도네온은 교회 음악을 위해 오르간 대용으로 만들어졌으며, 그것이 아르헨티나의 항구도시로 넘어가 탱고에 쓰였다는 이야기)가 많았고, 이것을 제가 다시 전달한 데 대한 책임감이 있었어요. 악기 전문가의 논의를 수용해 반도네온의 역사를 요약하자면, ‘독일의 카를 프리드리히 울리히가 만든 독일식 콘체르티나를 기반으로 하인리히 반트가 음을 몇 개 추가하고 일부 개량해 자신의 이름을 따 명명한 악기’ 정도로 설명할 수 있어요. 여전히 역사적으로 깔끔하게 정리하기엔 논란이 분분합니다.
반도네온을 일본과 아르헨티나에서 배웠다고 들었어요. 그 과정이 여행처럼 느껴졌으리라 생각해요.
전 기차 타고 차창 밖을 보면서 음악 듣는 것을 좋아해요. 특히 논이나 산, 황무지 같은 배경을 응시하며 하염없이 공상에 빠지곤 하죠. 애니메이션, 게임 등에 심취해 왔기 때문에 일본 도쿄를 자주 여행했는데, 그때마다 기차역에 즐비한, 상상을 초월할 만큼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행복하게 맛본 기억이 납니다. 그에 비해 아르헨티나에선 방에서 연습하고 곡만 썼어요. 그곳에선 운이 없었는지, 강도나 범죄에 몇 번 휘말려 움츠러들었거든요. 물론 마에스트로의 연주를 코앞에서 본 것은 행운이었죠. 그래도 서울이 너무 그리워서 매일 울었어요. 이때 습관적으로 꾼 꿈 중 하나가 닭고기덮밥을 찾아 헤매는 것이었어요. 일종의 악몽이에요. 결국 못 찾고, 못 먹고 끝나거든요.
최근엔 무엇에 꽂혔나요?
새로운 분기마다 시작하는 애니메이션 작품을 챙겨 보고 있어요. 완전히 빠져들 수 있는 애니메이션을 찾는 일이 제 삶을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거든요. 최근엔 <Re: 제로부터 시작하는 이세계(異世界) 생활>이 가장 좋았어요. 사실 제 최대 관심사는 언제나 애니메이션이죠. 그 속 세계관, 캐릭터, 성우의 연기, 배경음악, 연출에 이르는 모든 요소가 영감의 원천입니다.
다음 앨범은 언제 만나볼 수 있을까요?
상반기 발매 예정인 앨범이 두 장이에요. 제 자작곡을 피아노 솔로로 바꾼 피아노 소곡집을 준비 중이죠. 피아니스트 조영훈과 함께 녹음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위대한 작곡가의 음악을 편곡해서 ‘존경하는 마에스트로에게’라는 테마로 음반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올해 안에 작곡집을 한 번 더 내고 싶다는 소망도 이 기회를 빌려 슬쩍 밝혀 봅니다.
기차 여행자를 위한 고상지의 추천 플레이리스트
“KTX를 타고 피아니스트 석지민의 ‘여행’을 무한 재생한 순간을 떠올렸어요. 제 곡 중에선 ‘마지막 만담’과 ‘홍제천의 그믐달’을 추천해요.”
01. 여행 - 석지민
02. 알폰시나 이 엘 마르(Alfonsina y el Mar) - 로스 키야 우아시(Los Quilla Huasi)
03. 사보르 아 미(Sabor a Mi) - 로스 판초스(Los Panchos)
04. 베사메 무초(Bésame Mucho) - 로스 판초스(Los Panchos)
05. 엔트레 리오스(Entre Rios) - 안드레 메마리(André Mehmari), 카를로스 아기레(Carlos Aguirre), 후안 킨테로(Juan Quintero)
06. <쇼팽 변주곡집(The Chopin Variations)> - 채드 로슨(Chad Lawson)
07. 마지막 만담 - 고상지
08. 홍제천의 그믐달 - 고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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