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은 자유롭게 또한 남성과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다.”
1791년 프랑스 극작가 올랭프 드구주가 발표한 ‘여성인권선언’이다. 1789년 7월 프랑스대혁명이 발발하고, 8월 국민의회가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채택한다. 제1조는 “인간은 자유롭게 또한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다”. 대부분 나라에 왕이, 신분제가 굳건한 상황에서 이 선언은 혁명이었다. 160여 년이 지난 1948년에 나온 유엔의 ‘세계인권선언’이 프랑스의 인권선언을 기초했을 정도다. 문제는 ‘인간’의 정의다.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인간의 범위에 여성은 포함하지 않았다. 대혁명에 참여하면서 인간으로서 존재를 깨친 여성은 자유와 평등을 요구했고, 그 움직임의 일환이 여성인권선언이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제1조 문구에 여성을 넣어 약간 변형한.
자유와 평등이라는 추상적 단어를 현실에 적용한 것이 참정권이다. 똑같이 주어지는 투표용지 한 장. 올랭프 드구주가 여성인권선언을 발표하고도 세상은 완강했다. “여성에게 투표권을 준다면 멈출 수 없다. 여성이 국회의원, 판사까지 되겠다고 주장할 테고 결국 사회구조가 무너진다” 같은 명분은 널리 알려진 바다.
단단한 벽을 향해 여성은 나아간다. 1872년 11월 5일, 미국 제18대 대통령 선거에 수전 B. 앤서니가 투표를 강행하고 체포된다. 노예제 반대와 여성 참정권 운동에 헌신한 그의 싸움에 공감한 남성 변호인이 무보수로 변호를 맡아 법정에 섰다. “똑같은 상황에서 피고인의 남동생이 투표했다면 처벌받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훌륭한 행동을 했다고 칭찬받았을 것입니다. 단지 여성이 투표했다는 이유로 범죄가 되었습니다.” 물론 판결은 유죄였다. 뉴질랜드에서는 서명운동을 진행했다. 1888년에 제기한 참정권 요구가 거절되자 1891년 9000명의 서명을 담아 청원한다. 결과는 다시 거절. 다음 해에는 2만여 명 서명을, 그다음 해에는 뉴질랜드 성인 여성 인구 4분의 1에 해당하는 3만 2000명의 서명을 제출한다. 드디어 1893년 9월 19일, 전 세계 최초로 뉴질랜드 여성이 참정권을 획득한다.
영국의 양상은 달랐다. 처음엔 뉴질랜드처럼 서명으로 해결을 시도했다. 존 스튜어트 밀 등 이름난 학자도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1860년대부터 서명운동에 나섰지만 요지부동이었다. 보다 못한, 참을 만큼 참은 1903년 에멀라인 팽크허스트가 여성사회정치동맹(WSPU)을 결성한다. 이들은 건물 유리창을 깨고, 방화하고, 정치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과격한 투쟁을 펼쳤다. 평화롭게 얘기해서는 들은 척도 안 하니 범법을 저질러 사회에 소란을 일으키고 기꺼이 감옥에 갇혀 정치범 대우를 요구했다. 옥중에서 단식투쟁까지 감행하자 정부는 비강에 호스를 연결해 음식을 강제로 주입하는 고문을 가했다. 10여 년간 여성 참정권 관련 수감자가 1000여 명에 이르렀다. 가히 전쟁 상황이었다.
1914년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이 전환점이 되었다. 여성이 전투 지원과 사회 유지 활동에 참여하면서 1918년 30세 이상의 부동산 소유 여성이 참정권을 얻었고, 1928년 마침내 21세 이상 모든 여성과 남성에게 동등한 참정권이 주어진다. 여성 참정권은 1893년 뉴질랜드를 시작으로 120여 년에 걸쳐 전 세계에 확산한다.
한국에서는 1919년 임시정부 헌장에 남녀평등을 명기했고, 해방 이후 첫 선거부터 보통선거를 실시했다. 쉽게 구겨지는 종이 한 장, 이 한 장의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수많은 이가 희생하고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휴일로 지정된 선거일에 여유롭게 일어나 가까운 투표장에 가는 일은 그보다 얼마나 간단한지. 선거의 의미를 생각한다. 현재의 문제를 직시하고 더 나은 내일을 고민하는 것. “우리는 쓸모 있는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우리도 힘을 얻어서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지금보다 더 나은 세계를 만들고 싶습니다.” 1908년 3월 19일, 감옥에서 풀려나자마자 달려와 사람들 앞에 선 에멀라인 팽크허스트의 연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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