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편지
한 시대에 부쳐
플라톤의 편지를 흉내 내어 당신의 안녕을 기원해 봅니다. “그대에게, 잘 지내시길.” 고대 그리스 사람은 편지의 첫 인사말로 ‘안녕하시길(chairein)’이라는 표현을 썼다고 합니다. 그런데 플라톤은 이와는 조금 다른 ‘잘 지내시길(eu prattein)’이라는 말로 일관합니다. 심지어는 상대에게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대단히 논리적인 전략을 제시하죠. 일상의 인사말까지 철학의 지평으로 끌어올린 것입니다. 플라톤이 썼다고 추정하는 열세 편의 서간문 모음집 <편지들>에는 끊임없이 ‘지혜 사랑’을 지고의 가치로 여긴 한 철학자의 위대한 목소리가 담겨 있습니다. 내용은 대체로 정치적 조언이지만, 그의 문장은 언제나 ‘왜 철학은 인류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인가’로 귀결됩니다. 철학이란 그에게 당면한 현실을 헤쳐 나가는 도구였으니까요.
훌륭한 사상가와 문인의 편지는 이렇듯 안부를 묻는 것에서 시작해 자신의 삶과 인생관을 정교하게 드러내기에 이릅니다. 제인 오스틴부터 수전 손택에 이르는 작가 94명이 쓴 편지 94통을 엮은 책 <작가의 편지>는 ‘편지란 무엇인가?’에 내어 놓는 가장 훌륭한 답변 중 하나일 것입니다. “삶의 중요한 순간 대부분이 편지에 담겨 있”기 때문이지요. 책 출간을 앞둔 초조함, 고료를 독촉하는 절실함, 동료 작가가 건필하기를 바라는 순수한 마음 같은 것들 말입니다. 활자화한 내용과 함께 육필 편지 스캔본도 만날 수 있어 더 흥미롭습니다. 그 덕분에 실비아 플라스의 둥글둥글하고 귀여운 글씨체, 아이리스 머독의 장난스러운 스케치, 한때 시나리오 작가로 일한 스콧 피츠제럴드의 편지에 인쇄된 20세기 폭스사 로고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누립니다.
물론 남의 편지를 엿보는 것이 언제나 신나는 일만은 아닙니다.
<레지스탕스 사형수들의 마지막 편지>처럼, 죽음 앞에 선 사람이 남긴 메시지는 묵직하고도 밀도 높은 슬픔을 안깁니다. 이탈리아 파시스트당에 맞서 레지스탕스로 투쟁하다 사형수로 투옥되었으나 편지 말미엔 “안녕히 계세요” “나를 기억해 줘” “이탈리아 만세” “키스, 키스, 키스”라고 쓴, 지극히 평범하고 놀라울 만큼 용감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죠. 죽음을 눈앞에 둔 레지스탕스 사형수들의 최후에는 고통을 초월하는 숭고함이 느껴집니다. 한 사내가 쓴 문장 하나가 영 잊히질 않습니다. “내 마음은 사랑하는 이들에게로, 내 몸은 내 믿음에게로.”
이쯤에서 우리 근현대사의 가장 절실한 편지 중 하나를 소개해야겠습니다. 바로 김구, 김귀식 선생이 당시 북조선노동당 위원장 김두봉과 북조선 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일성에게 남북지도자회담을 요청하며 쓴 편지입니다. “하루라도 일즉 회음을 주소이다”라고 쓴 대목에서는 급박한 당시 상황이 절절하게 느껴지지요. 그리고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 이 편지의 목적은 끝내 이루지 못했습니다. <편지로 읽는 해방과 점령>은 1945년 8월 15일 광복일부터 1949년 가을까지 이어진 ‘해방 공간’ 또는 ‘점령기’라 불리는 시공간 속에서 오간 편지와 그 속에서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사람의 목소리를 채집했습니다. 점령군인 미군 사령관에게 우리 청년이 보내는 호소문부터 시인 주요한이 보내는 단호한 권고문까지, 여러 가지 형태의 편지가 어두운 시대를 비춥니다.
사회와 풍속을 마치 기록사진처럼 선명하게 보여 주는 또 하나의 ‘편지책’이 있습니다. 전라도 지역 부안 김씨 우반종가에 전해 내려오는 간찰을 엮은 <옛 편지로 읽는 조선 사람의 감정>입니다. 주요 수신인과 발신인은 김홍원과 그의 아들 김명열, 그 손자 김수종입니다. 정치가 원두표가 김홍원에게 첩 중매를 요청한 메모에는 은밀한 욕망이, 평산부사 김명열이 병든 아내의 임종을 기다리느라 업무를 돌보지 못해 일터에 보낸 전보에는 슬픔이, 불온한 소문과 함께 “보신 즉시 불태우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쓴 김수종의 비밀 서신에는 불안감이 어른거리고 있습니다. 다분히 ‘TMI’에 가까운 이야깃거리가 흘러넘치는 이 편지 속에서, 왜 우리는 자꾸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는 걸까요. 어쩐지 야릇한 일입니다.
<편지들> 플라톤 지음 | 강철웅 외 옮김 | 아카넷 펴냄
<작가의 편지> 마이클 버드, 올랜도 버드 지음 | 황종민 옮김 | 미술문화 펴냄
<레지스탕스 사형수들의 마지막 편지> 피에로 말베치, 조반니 피렐리 지음 | 임희연 옮김 | 혜다 펴냄
<편지로 읽는 해방과 점령> 정용욱 지음 | 민음사 펴냄
<옛 편지로 읽는 조선 사람의 감정> 전경목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펴냄
#두 번째 편지
어떤 우정에게
어린 시절엔 놀이터에서 같이 노는 또래 아이만 친구 삼았습니다. 지금은 친구의 정의에 좀 더 너그러워졌습니다. 어떤 관계인지 설명하기 어렵지만 마음이 가까운 사람을 아울러 친구라고 여기니까요. 적절한 거리와 적당한 예의를 유지하면서 공감을 주고받는 느슨한 우리 우정, 현대사회의 가장 이상적인 관계 아닐까요.
작가들의 왕복 서간 에세이 시리즈 ‘총총’의 첫 번째 책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에 쏟아진 출판계와 독자의 관심을 보면,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이런 관계를 좋아한다는 걸 짐작하게 됩니다. 이슬아, 남궁인 작가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슴없이 ‘쓰는 삶’의 애환을 나누고, 제각기 당면한 삶의 난제를 두고 입씨름을 합니다. 한 치의 양보 없는 둘의 서신은 독특한 서스펜스와 유머, 예기치 못한 감동을 안기죠. 여기 능란한 인터뷰어이기도 한 이슬아 작가가 체현하는 ‘밀당’의 미학을 좀 보세요. “활시위를 당겨보세요. 과녁은 저입니다”라며 “선빵을 날리”는 와중에도 상대에 대한 “깨끗한 존경”을 잃지 않는 경지가 놀랍습니다. 상대가 응급의학과 전문의이기도 한 남궁인 작가라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자신의 “구림”을 진솔하게 고백하고 “용기를 내 자모를 맞추고 문장을 만들어 자신을 변호하는” 사람이죠. “계속 이겨내는 수밖에 없”다며 우리를 북돋우는 코로나 시대의 투사를 어찌 존경하지 않을까요.
삶과 운명에 대한 긴 대화를 나눈 한 쌍의 친구를 소개합니다.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을 쓴 미야노 마키코와 이소노 마호입니다. 유방암으로 시한부 삶 선고를 받은 철학자 미야노는 의료인류학을 공부한 학자이자 친구인 이소노와 편지를 주고받습니다. 둘은 서로를 ‘흩어진 영혼’이라 여기며 “만남과 죽음, 상실의 우연이 운명 속에 존재하게 될 때 사람은 어떻게 살아갈까”를 논합니다. 이들 사이에 응당 놓여야 할 부호는 그래서 ‘+’보다는 ‘×’입니다. 이 우정의 ‘곱하기’란 “상대와 다양하게 마주하고 자신이 파악한 상대에 ‘맞추어’ 상대를 향해 ‘운동’하는 ‘행위’”죠. 20통에 이르는 모든 편지가 무겁지만은 않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와 함께 발자취를 남기며 살아간다는 것, 매 순간 이 세계에 경이를 느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새삼스레 되새겨 봅니다.
이러한 펜팔 우정 속에서 오가는 질문은 대개 답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이야기에 결론은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차라리 툭 던져 놓는 <두 비교문학자의 편지>의 접근이 신선하게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근대문학과 미술을 연구하는 강정화, 미술과 문학을 공부한 뒤 미술 기관에서 일하는 기획자 신이연은 그들의 영원한 연구 대상인 문학과 미술의 경계에 대해 편지 형식을 빌려 대화를 나눕니다. 강정화가 “문학과 미술의 경계를 나눌 수 있을까” 의심하면서 ‘시서화일체론’을 떠올릴 때, 신이연은 그와 다른 의견을 제시하면서도 “우리는 여러 다름 속에서도 결국 같은 지향성을 공유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중섭과 김춘수, 이불과 최승자를 경유해 “미술도 문학도 아닌 경계 어딘가”의 지점을 함께 상상하는 데 이릅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라는 말은 팬데믹 시대에 맞지 않는 표현인지도 모릅니다. <보노보노>의 만화가 이가라시 미키오와 전방위 예술가 이랑은 각기 일본과 한국에 체류하며 이메일과 메신저로 긴 대화를 나누고, 점차 깊어 가는 우정을 음미합니다. 그렇게 주고받은 편지를 묶어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를 완성했습니다.
오죽하면 이가라시는 “이 연재라면 죽을 때까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라고 말했을까요. 먼저 이 흥미로운 ‘콜라보’를 제안한 건 이가라시였습니다. 교환 일기처럼 ‘교환 만화’를 주고받아 볼까 궁리했지만, 이랑은 그와 가급적 많은 대화를 효율적으로 나누고 싶었습니다. 편지 형식을 취하게 된 건 그래서죠. 두 예술가는 이별, 디지털 사회, 코로나19, 강렬하게 갖고 싶은 것 등 세상의 온갖 것에 관심을 기울이며 서로의 견해를 묻고 답합니다. 신이 되고 싶다는 이랑, 그리고 AI야말로 신에게 다가가는 것이라는 통찰을 보여 주는 이가라시의 모습을 보면 둘의 나이 차가 서른 살이란 사실을 자꾸 잊게 됩니다.
디지털은 더 많은 사람을 가벼우면서도 건강한 우정의 관계망에 포섭하고 있습니다. 레시피 상담소 ‘편지 내 식당’을 운영하는 요리사 하지희는 한 끼 제대로 만들고 싶다는 열망을 매개로 수많은 사람과 연결됐습니다. <잘 먹고 싶어서, 요리 편지>는 그가 ‘요알못’ 독자들에게 선사한 28통의 맞춤형 요리 상담 편지를 보여 줍니다. 아침 시간이 부족한 이를 위해 ‘여름 채소 도시락’을, 부모님께 대접해도 손색없는 간단한 요리로 ‘전자레인지 라따뚜이’를 추천하는가 하면, 신혼살림을 차릴 친구에게 그레이터(강판)와 실리콘 주걱의 요긴함을 설파하고, 제철 채소 달력과 효율적인 조리대 구획을 제시합니다. 요리에 몹시 서툰 이에겐 메뉴와 레시피만이라도 수집해 볼 것을 권하며 “주방 한구석에 붙어 있는 작은 레시피 목록으로 안심이 된다면, 우린 이미 행복한 요리인이 된 거예요”라고 다독이기도 합니다. 참 맛있는 위로입니다.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 이슬아, 남궁인 지음 | 문학동네 펴냄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 미야노 마키코, 이소노 마호 지음 |김영현 옮김 | 다다서재 펴냄
<두 비교문학자의 편지> 강정화, 신이연 지음 | yeondoo(연두) 펴냄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이랑, 이가라시 미키오 지음 | 황국영 옮김 | 미디어창비 펴냄
<잘 먹고 싶어서, 요리 편지> 하지희 지음 | 다른 펴냄
#세 번째 편지
사랑을 담아, 그대에게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다시 고대 그리스인의 이야기를 꺼내 봅니다. 인간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싶어 한 그들은 우리가 느끼는 가장 압도적인 감정인 사랑을 에로스, 아가페, 필리아 등으로 나누어 분석했습니다. 사랑의 유형 중 하나인 스토르게(storge)는 가족을 향한, 본능에 가까운 사랑을 의미합니다. 에로스나 필리아가 상대의 매력이나 특징을 중시한다면, 스토르게는 그 반대입니다. 어떤 사람이든 전혀 상관없이 사랑을 퍼붓는다는 뜻이죠. 스토르게는 화수분처럼 한없는 유대감과 친밀감을 자아냅니다.
시대의 지성 이어령 선생은 그 어떤 사랑의 유형보다 스토르게를 좋아한다고 고백합니다. 그것이 그의 “세속적 삶의 원동력”이었다고도 덧붙입니다. 고백의 대상은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딸, 고 이민아 목사입니다. 그는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를 통해 죽음도 갈라놓지 못하는 가족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무신론자였던 그는 딸이 실명 위기에 처했을 때 신의 목소리를 들었고, 딸의 죽음을 겪은 뒤에는 ‘생명과 죽음’을 글쓰기의 주요 테마로 삼았습니다. “네가 태어나던 날 나도 이 세상에 태어났다”라는 문장은 그래서 더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스토르게는 여느 사랑의 유형에 비해 훨씬 일방적이고 비대칭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라는 우리 속담은 이러한 스토르게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아픈 아이를 가진 부모라면 그 사랑의 기울기는 훨씬 더 커지겠지요. <디어 가브리엘>은 노르웨이의 저널리스트 할프단 프레이호브가 자폐성 장애를 가진 아들 가브리엘이 세상에 혼자 남게 될 날을 상상하며 쓴 10통의 편지입니다. 아이를 ‘특별함’으로 포장하거나 과잉보호하지 않을뿐더러, “검지가 하나 없이 태어난 사람”과 같다고 이야기하는 담담함은 오히려 예상치 못한 울림을 줍니다. “우리를 붙들 수 있는 건 오직 우리 자신뿐”이니, “내일도 열심히 살아 보자”라는 그의 다독임을 오래도록 되새기고 싶어지는 이유입니다.
여기, 조금은 색다른 부자간 편지도 존재합니다. 예술 평론가이자 소설가인 존 버거와 화가인 아들 이브 버거가 주고받은 서신을 엮은 책 <어떤 그림>입니다. 두 예술가는 시대와 장르를 막론한 수많은 그림을 경유하며 ‘그림이란 무엇인가’를 사유합니다. 먼저 아버지 존은 에두아르 마네의 꽃 그림을 거론하며 작품 속 “보이지 않는 것들의 복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내가 너무 나간 걸까?”라는 의심으로 끝맺는 존의 편지에 아들 이브는 “아뇨, 아버지”라고 운을 떼곤 “‘보이지 않는 것들의 복원’은 정말로 그림이 짊어진 거대한 배낭 같아요”라며 공감을 표하죠. 그런가 하면 존이 수르바란의 그림을 통해 시각과 촉각을 설명할 때, 이브는 아버지의 행성처럼 넓고 둥근 등을 떠올립니다. 그 등을 어루만진 순간을 환기하며 “이미지를 선명하게 만드는 건 제 손”이라는 직관도 함께 보여 주죠. 이성과 감성이 교차하는, 오묘한 행복의 순간이 느껴집니다.
이렇듯 깊은 이해와 단단한 지지를 기반에 둔 가족 관계를 이룰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극작가 박재성의 아내, 요시코의 편지>는 ‘비운의 천재 극작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붙곤 하는 통영 청년 박재성에게 그의 아내이자 문학적 지원자였던 요시코가 1946년 가을부터 1947년 여름까지 보낸 편지를 모은 책입니다. 둘은 광복 이후 한일 관계가 단절되면서 한동안 각자 나라에 떨어져 살아야 했습니다. 통영의 남편을 그리며 요시코가 쓴 편지에는 애끓는 사랑과 혹독한 다그침이 교차합니다. 물론 그 모두는 예술가 남편을 향한 응원에서 비롯하지요. “부디 멋지고 훌륭한 작가가 되세요. 현재의 경험을 살려서 정열적인 감정으로 최선을 다해 주세요. 영원한 빛을 향해 순수한 작가로서 있어 주세요.” 아내의 절절한 문장은 결국 남편을 일본으로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박재성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배에서 풍랑을 만나 요시코와 영원히 이별합니다. 삶이란 왜 이리 얄궂을까요.
비정한 운명의 그림자는 1960년대부터 세계적인 수학자로 주목받던 한 사내에게도 드리웁니다. 1979년 당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약칭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선고가 내려진 안재구 전 경북대 교수 이야기인데요. 그는 1980년에 사형수로 투옥되었으나 전 세계 수학자들이 보낸 구명 서한으로 감형되었고, 1988년 가석방됩니다. 그 8년간 안재구 교수의 가족이 나눈 편지 모음 <봄을 기다리는 날들>엔 추억과 사랑은 물론이고 한 시대와 사회가 담겨 있습니다. 아이들은 아버지에게 백일장에서 쓴 시, 삼촌의 결혼 소식, 경주 수학여행 이야기를 전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기도문과 책, 양말을 부치며 건강을 기원하지요. 흐르는 세월 속에서 그저 “밤하늘의 남쪽만 보는 게 허락될 뿐”인 아버지는 “겨레가 기뻐할 날을 기다리며 꿋꿋하게 살자”라고 말합니다. 별처럼 빛나고 총총한 이 가족의 문장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아픔도, 슬픔도, 기쁨도 허물없이 나눌 수 있는 누군가를 향해 펜을 들고 싶어집니다. 이 긴긴 편지를 당신 앞에 올리는 까닭입니다.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 이어령 지음 | 열림원 펴냄
<디어 가브리엘> 할프단 프레이호브 지음 | 허형은 옮김 | 문학동네 펴냄
<어떤 그림> 존 버거, 이브 버거 지음 | 신해경 옮김 | 열화당 펴냄
<극작가 박재성의 아내, 요시코의 편지> 테라오 요시코 지음 | 김봉희 옮김 | 경진출판 펴냄
<봄을 기다리는 날들> 안재구 지음 | 안소영 엮음 | 창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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