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밥 말리는 혁명을 했다. 불평등한 세상에서 평등을 외치고, 싸움을 멈추고 서로 사랑하자고 노래했다.
1945년 2월 6일,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 자메이카에서 밥 말리가 태어난다. 50대 백인 아버지에 어머니는 10대의 흑인이었다. 1494년 콜럼버스가 이 땅을 밟은 이후 유럽인이 들여온 전염병과 그들의 학대로 원주민 대부분이 사망하자, 유럽인은 사탕수수 농장 일꾼을 충당하려 아프리카인을 ‘실어 나른다’. 1655년 스페인에서 영국으로 지배권이 넘어가고도 백인 한 명이 흑인 백 명을 착취하는 비극이 이어졌다. 그런 부조리함 속에 10대 소녀가 40세 연상 플랜테이션 농장 감독관 남성의 결혼 약속을 믿고 밥 말리를 낳은 것이다.
그의 어린 시절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무책임한 아버지는 가족을 버리다시피 했고, 어린 어머니가 아무리 애써도 배고프고 눈물겨운 나날이 지속되었다. 열두 살 무렵 어머니를 따라 이주한 곳이 수도 킹스턴 빈민가 트렌치타운이다. 닭장 같은 판잣집이 빽빽하고 아이들은 빈곤과 영양실조, 전염병에 시달리며, 살 도리가 없거나 다른 길을 몰라 범죄자로 크는 동네에서 밥 말리는 학교를 그만두고 열다섯에 보조 용접공 자리에 취직한다.
음악과 축구가 있어 다행이었다. 그는 짬이 날 때마다 노래를 부르고 공을 찼다. 첫 스튜디오 녹음을 경험한 1962년에 자메이카가 독립하고 이듬해 동네 친구들과 밴드 웨일러스를 결성해 음반을 낸다. 당시에 자메이카에서는 댄스음악인 스카가 유행했는데, 밥 말리는 이를 다듬고 메시지를 싣는다. 자메이카 사람이 이 장르에 붙인 이름이 바로 레게다. 1973년 메이저 음반사인 아일랜드 레코드와 계약하면서 밥 말리와 레게는 세계에 진출한다. 오랫동안 식민 지배에 시달린 약소국의 음악은 말 그대로 ‘신선한 충격’을 선사했다. 낙천적 멜로디에 한의 정서와 저항 정신을 담은 가사. 영미권 팝만이 국경을 넘어 인기를 끌던 시대에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평등, 자유, 인권, 이 아름다운 단어가 노래가 되었다. 모여서 노래하고 춤추는 가운데 사람들은 평등한 세상, 억압받는 자가 자유를 누리는 세상을 꿈꾸었다. 1970년대 반전시위, 반물질주의 시위 현장에서도 그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밥 말리는 위대해졌고 동시에 위험해졌다. 누군가는 그를 두고 ‘사회를 시끄럽게 하는’ 존재라고 여겼을 법하다. 급기야 조국인 자메이카에서는 습격을 당한다. 정치 세력이 대립하며 폭동과 총격이 끊이지 않아 비상사태가 선포된 1976년, 밥 말리는 조국에 돌아와 <스마일 자메이카> 공연을 준비한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절박함 때문이었으나 공연 이틀 전 암살 기도가 일어나 자신과 가족, 매니저가 총에 맞는다. 그는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붕대를 맨 채 공연을 강행한 다음에야 영국으로 피신한다.
이런 위협도 밥 말리를 멈추지 못했다. 유명한 1978년 4월 22일 <원 러브 피스 콘서트>를 위해 다시 자메이카에 귀국해서는 극한 대립 중인 양대 정당 대표를 무대에 올려 손을 맞잡게 하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음악이 정치를 압도하는, 예술이 현실을 이끌어가는 순간이었다. 흑인과 약자의 지주로 자리 잡은 그를, 아프리카의 짐바브웨가 독립하고 기념식에 초청했을 때 밥 말리는 그 가난한 나라에 공연 비용 25만 달러를 자비로 부담해서 방문했다. 어김없이 누군가가 공연장에 최루탄을 터뜨렸으나, 끝까지 무대를 지킨 밥 말리와 더불어 관객 역시 눈물을 훔치고 기침하면서도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음악은 가장 위대한 총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명을 구하니까요. 음악은 사람을 죽이지 않습니다.”
음악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간 밥 말리는 축구를 하다 다친 발가락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암으로 1981년 서른여섯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그의 국장에는 양대 정당 대표와 자메이카 사람 수만 명이 함께했다. 음악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밥 말리는 꿈을 꾸었고, 혁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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