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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층위, 광명

2026년 07월 01일

  • Editor 이미선
  • pHOTOGRAPHER 안홍범

복잡한 도로에서 몇 걸음만 벗어나면 산책로가 나오고, 길 끝에서 숲과 강을 만난다. 빠른 변화 속에 과거의 정서가 중첩된 도시, 경기 광명이 지나온 시간의 단면을 살폈다. 눈에 보이는 풍경보다 그 이면의 기억을 응시했다.

빛으로 기록된
도시의 서사

거대한 문화 공간이 된 동굴부터 도심 속 생명의 보고가 된 내륙 습지까지, 도시가 겪은 시간의 층위를 그대로 품은 곳들을 찾아다녔다. 반짝이는 빛 아래 숨 쉬는 오래된 시간을 찾아서.

한여름에도 도톰한 점퍼를 입어야 할 정도로 서늘하다는 얘기가 떠오른 건 순전히 후텁지근한 날씨 때문이다. 지난여름 광명동굴에 다녀온 동료는 “입구에서부터 시원한 자연 바람이 불어 땀이 식었다”라며 자연은 지구 온도 조절 방법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고 했다. ‘시원한 자연 바람’과 ‘지구 온도 조절’이라는 말이 매혹적이었지만 도시 생활자에게 광명은 그리 매력적인 여행지가 아니었다. 일상의 연장이 될 것이 뻔했다. 올해도 여름 초입부터 한낮 기온이 30도를 가볍게 넘겼고, 최악의 무더위가 찾아올 거라는 뉴스가 연일 들려왔다. 오가는 말 속에 습도가 더해져 물 먹은 솜처럼 한없이 아래로 침잠하던 날, 광명동굴이 떠오른 건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광명동굴은 광산 개발로 생긴 인공 동굴로 현재 복합 문화 예술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광명에는 비슷한 공간이 더 있다. 산업이 변화하면서 쓸모를 잃은 저수지는 내륙 습지가 되어 도시에 숨을 불어넣고, 기피 시설인 하수처리장은 공원으로 바뀌어 계절마다 다채로운 꽃을 피운다. 폐채석장 절벽 위에 출렁다리가 놓이면서 숲의 풍경도 달라졌다. 신도시라는 수식에 가려진, 광명이 지나온 시간의 층위를 되짚어 볼 때가 됐다. 일정을 정하고 광명시청 홈페이지(gm.go.kr)에서 문화관광해설을 예약했다.

광명동굴 ‘동굴 예술의전당’에서는 10분마다 3분 길이의 미디어 아트 작품이 상영된다.
일제강점기 징용과 수탈의 역사부터 해방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자원 공급 역할을 했던 광명동굴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근대역사관.

폐광에서 캐낸 희망, 광명동굴
동굴 입구가 가까워지자 서늘한 바람에 땀이 식는다. 바람길을 따라 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광명동굴의 중심인 웜홀광장까지 걷는다. 네 개의 동공이 만나는 이 광장을 중심으로 옛 갱도를 따라 볼거리가 이어진다.
“광맥은 암석이 틈을 따라 길게 이어져요. 발견하면 엄청난 부를 얻는다 해서 ‘노다지’라 하죠. 그런데 이게 순우리말이 아니에요. 한국 광산은 대부분 외국인이 개발했어요. 광맥을 발견하면 ‘건드리지 마’라는 의미로 “노 터치(No touch)”라 했는데, 영어를 모르는 노동자들이 이 말을 ‘노다지’로 들은 거죠.”
1950년에 발행한 광명동굴에 관한 첫 기록 <금천지>에 따르면, 1903년 5월 2일 경기 시흥군 가학리에 시흥광산이 개광했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 일본인 이름으로 광산 설립 허가가 났고 1918년부터 본격적으로 개발했다. 채굴한 금, 은, 동, 아연, 구리 등의 광물은 일본으로 보내 태평양전쟁의 무기가 됐고, 해방 전까지 엄청난 양을 수탈했다. 광복 이후 광업권이 해결되지 않은 채 폐업 상태로 방치됐으며 6·25전쟁 중 마을 주민들의 피난처로 이용되기도 했다. 폐광이 된 건 1972년이다. 그해 여름 큰 홍수가 나 광산 아래 쌓아 둔 광석 찌꺼기가 마을을 덮치면서 보상 문제가 불거졌고, 결국 광산은 문을 닫았다. 이후 40년간 새우젓 보관 창고로 쓰이며 잠들었던 동굴의 시간을 깨운 건 광명시다. 토지를 매입해 관광지로 개발하고 2011년 일반에 공개했다.
가학산 상단의 노두부터 이어지는 갱도의 총길이는 7.8킬로미터로, 0레벨부터 지하 7레벨까지 연결된다. 이 중 관광객의 발길을 허락한 곳은 0레벨과 1레벨의 2킬로미터 구간인데, 개미집처럼 갱도를 따라 동공이 이어진다. 대부분의 공간은 어둠을 밝히는, 희망을 찾는 빛을 주제로 한 작품으로 꾸몄다. 웜홀광장에서 ‘빛의 공간’을 지나 복싱 경기부터 패션쇼, 콘서트, 미디어 파사드 쇼 등이 열린 ‘동굴 예술의전당’과 암반수를 활용한 수족관 ‘동굴아쿠아월드’, 방문객의 황금빛 소원으로 장식한 ‘황금길’을 거쳐 지하 1레벨로 내려갔다. 만지면 행운을 가져다주는 금괴 모형이 있는 ‘황금궁전’과 동전을 던져 보물 상자에 넣는 체험을 할 수 있는 ‘황금의 방’, 그리고 지하 2레벨에 있는 호수까지 돌아봤다. 0레벨로 올라오는 길에는 영화 <반지의 제왕> 팀이 제작한 41미터 길이의 용과 골룸이 전시된 ‘판타지 웨타 갤러리’를 감상했다.
동굴을 나와 전망대로 향하는 길, 선광장이 눈에 들어온다.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이 없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곳이다. 당시 사용하던 기계는 사라졌지만, 그것을 고정하던 기초석들은 100년이 넘는 시간을 간직한 채 그대로 남아 있다. 선광장 앞 건물은 2016년에 문을 연 ‘라스코전시관’으로, 현재 <광명동굴 공룡탐험전>이 진행 중이다. 관람객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다양한 공룡을 만날 수 있다. ‘동굴전망대’에 이르자 푸른 숲에 둘러싸인 도시 풍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청량하다. 어두운 동굴에서 시간을 잊은 채 금맥을 찾아 헤맸을 광부의 오랜 기억에도 이 장면이 청량하게 남았을까.

광명업사이클아트센터 1층에서 2026 상반기 기획전 <업사이클 인터랙티브>가 진행 중이다.

폐기된 자원에 가치를 더하는 광명업사이클아트센터
광명동굴을 장식한 설치 작품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소망의 초신성’이었다. 방문객들의 소망이 적힌 황금 패로 만든 것으로, 광명업사이클아트센터 레지던시 출신 김회준 작가의 작품이다. 2015년 6월에 문을 연 광명업사이클아트센터는 국내 최초 업사이클 예술 공간이다. 광명동굴 자원회수시설 홍보동에 있던 것을 2024년 개관 10주년을 맞아 광명시민체육관 옆으로 옮겼다. 1층 전시장에서는 2026년 상반기 기획전 <업사이클 인터랙티브>전이 열리고 있다. 버려지는 자원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업사이클 아트, 기계적 움직임이 빚어내는 역동적인 키네틱 아트, 관람객의 반응에 실시간으로 응답하는 미디어 아트가 만난 전시로, 관람객이 직접 만지고 움직이며 작품의 일부가 되는 체험을 한다. 전시는 10월 18일까지다. 주말에는 체험 교육에 참여할 수 있다. 빈병과 자투리 천을 활용한 업사이클 조명, 자투리 가죽으로 제작하는 카드 지갑, 버려지는 양말목으로 만드는 미니 키링, 자투리 원목이나 폐목재를 활용한 소품 및 가구 제작 등 프로그램이 다양하다. 참가 신청은 홈페이지(upcycle.gm.go.kr)를 통해 할 수 있다.

쓸모를 잃고 버려진 저수지를 생태계의 보고인 내륙 습지로 복원한 안터생태공원.
일찍 깨어난 금개구리가 노랑어리연꽃잎 위에서 쉬고 있다.

멸종 위기 금개구리가 사는 내륙 습지, 안터생태공원
나무의 나이테로 그해의 특징을 분석하듯 시간의 층위를 잘라 해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시대가 온다면, 광명에서는 망설임 없이 안터생태공원부터 봐야 한다.
“주변이 온통 논밭이었어요. 이곳은 본래 논과 밭에 물을 대던 저수지였고요. 도시 기능이 바뀌면서 논밭이 사라지자 물웅덩이만 남았죠. 낚시를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쓰레기를 마구 버려 악취가 심했어요.”
안터생태공원의 옛 모습을 설명하는 생태해설사의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버려진 저수지에서 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 금개구리가 발견되면서 변화가 시작됐다. 서식처를 보호하기 위해 공원화 사업을 추진하고, 생태적 수질 정화 시스템으로 오염원을 처리해 수질을 개선했다. 물 순환이 원활하도록 실개울을 조성하기도 했다. 그 결과 안터생태공원은 7종의 양서류와 파충류를 비롯한 다양한 습지 식물과 어류, 조류, 곤충의 집으로 바뀌었다. 과거를 떠올리면 천지개벽 수준이라는 말 뒤로, 규모는 작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름다운 습지 생태계가 발견될 거라는 얘기가 이어진다.
“금개구리는 등에 두 개의 줄무늬가 있어요. 물에 젖어 햇빛을 받으면 줄무늬가 금색으로 반짝인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죠. 울음소리도 독특해요. 울음주머니가 없어 뽀뽀하는 것처럼 ‘쪽쪽쪽’ 하고 우는데, 안터생태교육센터 1층 전시관에 개구리 소리를 비교해 듣는 키오스크가 있으니 방문해 보세요.”
안터생태공원에서는 매달 다른 주제로 생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7월에는 개구리 관찰 수업이 예정돼 있다. 프로그램은 광명시환경교육센터 홈페이지(gmecolearn.or.kr)에 1개월 전에 공지하는데, 광명에서 수준 높은 생태 수업을 한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경쟁이 치열해졌다. 체외수정을 하는 개구리는 뱃속에 알을 품고 있기 때문에 암컷이 수컷보다 크다는 것과 무당벌레는 진딧물을 먹고 진딧물이 풀잎 위에 흘린 액체는 개미의 먹이가 되므로 진딧물이 있는 곳에는 무당벌레와 개미가 공생한다는 사실, 그리고 미세한 털이 방수 기능을 하는 연잎은 곤충의 우산이 된다는 것을 배웠다. 어린이를 위한 프로그램으로 기획했지만 어른들이 더 좋아한다는 생태해설사의 얘기가 납득된다.
내륙 습지는 다양한 생물의 보금자리다. 빗물을 저장해 홍수를 조절하고, 수생식물이 자라 수질을 정화하며, 공기의 온도와 습도를 조절해 기후변화를 억제하는 것은 물론 휴식 공간을 제공한다. 한 가지 고민은 습지를 복원하면서 식재한 식물의 번식력이 너무 강해 물보다 습지식물의 면적이 넓어진다는 것이다. 공원이 육지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중이다.

폐채석장 부지에 설치한 도덕산 출렁다리. 초록빛 숲과 인공 폭포, 시민이 함께 어우러지는 만남과 화합을 상징한다.
KTX 광명역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있는 새빛공원. 멀리 떠나지 않아도 여유로운 산책과 휴식을 즐기기 좋다.

과거의 시간이 나이테처럼 새겨진 공원
새빛공원은 KTX 광명역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있는 도시 정원이다. 기피 시설인 하수처리장을 지하화하고 상부를 친환경 녹지 공간으로 조성했다. 면적이축구장 25개에 달하는 공원에는 플라워가든, 새빛광장, 벚나무길, 이팝나무길, 사색의 정원, 메타세쿼이아길 등 다양한 테마 로드가 있어 산책하기 좋다. 공원 중심의 커다란 호수는 집중호우 때 일시적으로 빗물을 저장해 침수 피해를 줄이는 저류지다. 잔잔한 호수 위에 나무 덱으로 길을 내고 주변에 다양한 꽃과 나무를 심어 계절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 준다. 반려견과 함께 산책하는 청년, 아빠와 해먹에 누워 노는 아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생활체육 동호인까지, 평화로운 풍경에 이곳이 하수처리장 위에 조성됐다는 사실을 잊게 된다. 저녁이 되면 호수에 조명이 켜지고 빛을 따라 분수가 춤을 춘다.
거친 돌을 캐내던 채석장 부지가 숲속 공원으로 변신했다는 얘기를 듣고 도덕산으로 향했다. 입구에서 빽빽한 숲 같은 아파트 단지를 지나 아늑한 녹지에 발을 들였다. 도덕산공원 입구부터 경사가 완만한 길을 오르며 어린이 놀이터와 분수대, 정자, 야외 음악당 등을 차례로 만난다. 경사가 제법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 그 끝에서 시원한 물소리가 들린다. 폐채석장 터에 설치한 인공 폭포다. 높이 20미터에 이르는 절벽 위에는 Y자형 현수교인 출렁다리가 놓여 있다. 다리 중앙부에 서자 바위 절벽에서 세차게 쏟아지는 폭포와 호수가 한눈에 들어온다. 바닥이 메시 구조로 뚫려 있는 곳에 다다르자 하늘을 나는 느낌마저 든다. 출렁다리를 지나 도덕산 정상으로 향했다. 푸른 숲 너머로 도시가 살아 있다. 도덕산 출렁다리에 조명이 켜지고 숲 너머 아파트와 주택가에도 하나둘 불빛이 들어온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인간과 자연이 공생하는 도시, 광명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선 느낌이다.

시대를 초월해
빛이 된 사람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광명에 새겨진 두 이름, 오리 이원익과 시인 기형도의 자취를 좇았다. 빛이 된 그들이 못다 한 말에 귀 기울였다.

지난가을 광명문화원 2층에 광명역사관이 개관했다. 광명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시대별로 보여 주는 곳으로 시민이 기증·기탁한 유물을 보관하고 전시한다. 광명역사관을 건립하면서 광명문화재단은 사람에 주목한 듯하다. 광명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남긴 삶의 족적과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정신문화를 기반으로 전시실을 구성했다. 가장 인상 깊은 인물은 조선 중기의 문신 이원익이다. 왜란과 호란을 수습하고 대동법을 시행해 백성의 어려움을 줄여 준 명재상이다. 그의 호인 오리(梧里)는 지금도 광명 곳곳의 지명에 남아 있다. 이원익의 정신을 계승하는 오리서원 맞은편에 2017년 기형도문학관이 개관했다. 스물아홉 살에 요절한 시인과 미수(米壽)까지 장수한 조선의 문신이 이웃이 된 거다. 앞서 공간에 남겨진 시간의 층위를 살폈다면, 이젠 시대를 초월해 공간에 머무는 인물의 발자취를 따라가 볼 차례다.

인조가 하사한 집인 관감당. 충현박물관 내에 위치한 관감당의 단아한 모습이 청백리 이원익을 닮았다.

조선 시대 종택에 들어선 박물관
낮은 건물이 촘촘히 들어선 주택가 골목, 흙담을 치마처럼 두른 한옥이 빼꼼히 고개를 내민다. 이원익 종가에서 설립한 충현박물관이다. 이원익은 조선 태종의 열두 번째 아들 익령군의 4대손으로 선조, 광해군, 인조까지 3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냈다. 13대 종부 황금자 관장은 신혼생활을 시작한 1960년대에 먼지 쌓인 대가옥 곳곳을 뒤져 1800여 점의 유물을 모아 보관했고, 400년 넘는 집안의 역사를 발굴하고 정리해 2003년 박물관을 개관했다. 이 일대는 이원익이 말년에 여생을 보낸 곳으로, 인조가 하사한 관감당과 사당인 오리영우, 종택 등이 모여 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원익 선생은 문신임에도 불구하고 평안도순찰사 제수가 돼 군사를 지휘했어요. 선조의 어가를 모시는 한편 왜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는데, 공적을 드러내지 않고 병사들에게 포상할 것을 청했죠. 평안도관찰사로 재임할 때부터 부역을 줄이고 폐단을 없애는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았어요.”
문화해설사의 안내로 박물관 구석구석을 돌아봤다. 가장 귀한 유물은 이원익의 초상화 네 점이다. 동시대 인물인 서애 류성룡과 충무공 이순신의 초상화가 단 한 점도 없는 것을 생각하면 매우 특별한 일이다. 지하 전시관에서는 후손들이 남긴 고문서와 목가구, 제기, 집기 등의 생활용품을 볼 수 있다.
충현관 마당을 지나 종택에 들어섰다. ㄱ자형 안채와 ㄴ자형 문간채가 안마당을 중심으로 튼 ㅁ자형 배치를 이룬다. 후손들이 살던 주택 내부에는 그들이 사용했거나 수집한 반상과 장롱, 뒤주, 절구 같은 생활 유물이 전시돼 있다.
“이원익 선생은 65년간의 공직 생활 중 44년을 재상으로 지냈지만 평생의 재산은 두어 칸짜리 오두막이 전부였어요. 인조는 벼슬에서 물러난 선생이 비가 새는 초가에 산다는 말을 듣고 지위에 맞는 정당을 지어 주도록 명했지만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고사했어요. 그러다 ‘더 이상 받지 않는 것은 불충’이라는 임금의 말에 하는 수 없이 받아들인 것이 관감당이에요. 신하와 백성 모두 이원익의 청렴한 삶을 ‘보고 느끼게 한다’는 뜻이 담긴 이름입니다.”
종택 옆 관감당은 병자호란 때 훼손된 것을 1916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앞마당에는 이원익이 거문고를 타던 탄금암과 400년 수령의 측백나무가 그대로 남아 있다. 관감당 뒤편에는 이원익의 영정을 모신 사당 오리영우가 자리한다. 위패만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곳에는 감실을 따로 만들어 영정을 함께 모신다. 현판은 숙종이 내려 준 것으로 인조가 하사한 관감당 옛터에 이 사우를 건립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충현박물관 맞은편에는 별관인 죽서관이 있다. 이곳에서 7월 10일부터 9월 19일까지 2026년 기획전 <전통과 환영‐이을 련(連), 맺을 결(結)>이 열린다. 종가의 유물과 14대손인 이종혁 작가의 현대 예술 작품이 조우하는 자리다.

기형도문학관 2층에는 시인의 대표작 ‘안개’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노동식 작가의 설치 작품 ‘안개의 방’이 자리한다.

빈집을 채우는 청춘의 언어, 기형도문학관
기형도문학관에 도착해 시인의 누나 기향도 명예관장을 만났다. 한국을 떠났다가 연로한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돌아왔는데, 얼마 전 어머니도 하늘로 보내 드렸다는 그에게 시인의 이야기를 꺼내기가 조심스럽다.
“문학관을 찾은 분들이 종종 저에게 동생 기형도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물어요. 저는 간단하게 ‘참 괜찮은 사람이었다’고 답하죠. 문학관에 전시된 시인의 유품을 통해 그의 성격과 삶의 자세를 엿볼 수 있을 거예요. 학창 시절 성적이 우수했고, 그림에도 소질이 있었어요. 음악을 사랑했고, 굉장히 꼼꼼했어요. 동료와 후배 문인들이 시인에 대해 회고하는 영상도 관람할 수 있습니다.”
시대의 아픔을 섬세한 언어로 담아낸 기형도 시인은 1960년 연평도에서 태어나 1964년경 광명(당시 경기 시흥군)으로 이사했다. 초등학생 때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어머니가 생계를 꾸렸고, 중학생 때 불의의 사고로 누이를 잃으면서 적극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8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뒤 이듬해 신춘문예에 ‘안개’가 당선되며 등단했다. 그리고 시집 발간을 준비하던 1989년 3월
7일 뇌졸중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시인이 남긴 여러 편의 시와 노트 기록을 정리해 같은 해 5월 유고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이 발간됐다.
기형도문학관 1층 상설 전시실은 시인의 생애와 작품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시인 기형도’, 유년 시절의 추억이 담긴 물건과 시편으로 구성된 ‘유년의 윗목’, 등단작 ‘안개’의 시어가 강처럼 흐르는 감각적인 공간 ‘안개의 강’, 문학상 수상 관련 작품을 전시한 ‘은백양의 숲’, 등단 후 활발한 문단 활동과 신문기자로 일했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저녁 정거장’ 등으로 구성됐다. 나희덕 시인과 성석제 소설가 등 시인을 추억하는 지인들의 인터뷰 영상이 흐르고, 후배인 강성은·김행숙·오은·최하연 시인이 낭송한 기형도 시인의 시를 청취하는 공간도 있다. 시인의 시를 필사하거나 낭독을 녹음해 개인 이메일로 전송할 수 있다는 얘기에 발걸음이 빨라진다. 이보다 귀한 기념품은 없을 듯해서다. 전시관을 한 바퀴 돌아 제자리에 왔을 때 “기형도문학관에 시인의 정서적 풍경이 담긴 듯하다”라고 하자 기향도 명예관장이 활짝 웃어 보인다. 문학관 2층 북카페와 강당, 창작체험실에서는 ‘기형도 시인학교’를 비롯한 시문학 강연과 워크숍 등이 열린다. 시인의 시비를 찾아 기형도문화공원과 안양천 햇무리광장까지 돌아봤다. 시인의 삶은 멈췄지만 시는 남아 많은 이들을 위로하고 있다.

오일장으로 시작해 현재 400개가 넘는 점포가 입점한 광명전통시장. 경기 3대 전통시장 중 하나로, 대를 이어 운영하는 노포가 많다.

광명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도시의 향기
광명에 가면 전통 시장에 들러 ‘홍두깨 칼국수’와 ‘원조 광명 할머니 빈대떡’을 먹은 다음 ‘크로레라 제과’에서 빵을 사 와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어떤 관광지보다 시장 구경이 재미있다는 말도 들었다. 심지어 의식주의 ‘주(집)’를 제외한,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그곳에 있다고도 했다. 광명전통시장은 1970년대 초반부터 닷새마다 열리는 작은 오일장에서 시작됐다. 지하철 7호선 광명사거리역과 광명센트럴아이파크 사이 블록을 전부 차지할 정도로 규모가 큰 이곳에는 현재 400여 개의 점포가 입점했다. 취급 품목에 따라 구역이 나뉘는 여느 대형 시장과 달리 모두 뒤섞여 있다. 그래서 복잡하지만 그 때문에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파랑 거리와 빨강 거리가 시장 중앙을 관통하고, 평행한 두 거리 사이를 주황·노랑·초록·남색·보라색 거리가 사다리처럼 연결한다. 장을 보러 온 동네 사람과 맛집을 찾아온 여행자, 안양천을 따라 뛰어온 러닝족과 자전거족까지 더해져 시장 골목이 북적인다. 어머니와 아들이 운영하는 기름집, 모녀가 함께 하는 떡집, 장모와 사위가 꾸려 나가는 채소 가게 등 대를 이어 자리를 지키는 집이 많아 이야깃거리도 풍부하다.

新 광명 구(9)경

전문가 심사를 거쳐 광명 대표 관광지 아홉 곳을 새롭게 선정했다. 온라인 설문 조사를 통해 시민 6711명이 직접 뽑았다.

1경 광명동굴
일제강점기에 자원 수탈을 목적으로 1912년부터 개발했다. 1972년 폐광된 이후 40여 년간 새우젓 창고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역사·문화 관광 명소로 탈바꿈했다. 총길이 7.8킬로미터 중 2킬로미터 구간을 개방하며 웜홀광장, 빛의 공간, 동굴 예술의전당, 동굴아쿠아월드 등 빛을 주제로 한 다양한 문화 공간을 조성했다.
주소 광명시 가학로 85번길 142
문의 070-4277-8902(방문자 센터)

2경 광명전통시장
1970년대 초 오일장으로 시작해 현재는 400여 개 점포가 입점한 경기 3대 전통시장 중 하나로 성장했다. 쾌적하게 관리된 아케이드에 첨단 시스템으로 안전함을 더하고, 편리한 주차시설까지 갖췄다. 전통의 정취와 현대적 편의 시설이 어우러진 것이 특징이며, 40년 이상 대를 이어 운영하는 노포가 많아 깊은 맛과 내공을 느낄 수 있다.
주소 광명시 광이로 13번길 17-5
문의 02-2614-0006

3경 도덕산 출렁다리
도덕산 인공 폭포 상부와 등산로 두 곳을 연결하는 높이 20미터의 Y자형 출렁다리다. 2022년 8월 개통 이후 광명동굴과 함께 광명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부상했다. 다리 중앙부에서 인공 폭포를 배경으로 한 인증 사진 스폿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화~일요일 오전 10시부터 2시간 간격으로 오후 7시까지 인공 폭포가 가동된다.
주소 광명시 도덕로 86
문의 02-2680-6298

4경 광명 안양천
광명을 관통해 흐르는 도심 속 휴식처다. 주변에 산책로, 덱, 보행로, 경관 조명이 잘 정비되어 있으며 물놀이장과 안양천 햇무리광장, 찬빛광장 등이 자리해 즐길 거리도 많다. 낮에는 꽃과 나무가, 밤에는 조명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하며, 광명 출신 기형도 시인의 시화판과 함께 사계절 각기 다른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주소 광명시 철산동 일원
문의 1688-3399

5경 KTX 광명역
대한민국 최고의 철골 대칭형 건물로 크기가 축구장 6.7배에 달한다. 유리 천장을 통한 자연 채광이 매력적으로, 한옥 처마와 버선의 곡선을 형상화해 전통미를 살렸다. 낮에는 공항을, 밤에는 우주선을 연상케 하며, 특히 야경이 아름다워 인기 출사지로 손꼽힌다. 이케아, 롯데몰, 코스트코, AK플라자 등 대형 쇼핑몰과 가깝다.
주소 광명시 광명역로 21
문의 02-898-9053(KTX 광명역 관광 안내소)

6경 충현박물관
전국 유일의 종가 박물관으로, 조선 시대 청백리 재상 오리 이원익과 그 후손들의 유적과 유물을 보존하고 있다. 이원익 관련 자료와 종가의 생활용품이 전시돼 있으며, 인조가 하사한 관감당과 종택 등 역사적 건물도 잘 보존돼 있다. 특히 관감당에는 탄금암과 수령 400년 된 측백나무가 복원되어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주소 광명시 오리로347번길 5-6
문의 02-898-0505

7경 기형도문학관
광명 대표 문학관으로 기형도 시인의 문학 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보존하며 연구·전시·교육 기능을 두루 갖춘 복합 문화 공간이다. 기형도 시인의 육필 노트, 각종 상장, <동아일보> 신춘문예 상패, 생전 발표 원고 등 귀중한 자료를 상설 전시해 문학 애호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전시실, 북카페, 강당, 도서 공간을 갖췄다.
주소 광명시 오리로 268
문의 02-2621-8860

8경 안터생태공원
생태계를 복원한 도심 속 내륙 습지로, 물 순환 시스템을 원활하게 하고자 실개천을 조성해 다양한 생물종을 보호하고 있다. 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인 금개구리를 포함해 7종의 양서류·파충류가 살고 있다. 애기부들 등 식물 66종, 버들붕어 등 어류 6종, 쇠물닭 등 조류 27종 등이 서식해 도심 속 소중한 자연 학습장 역할을 한다.
주소 광명시 안재로1번길 27
문의 02-897-8577(광명시환경교육센터)

9경 새빛공원
대표적인 기피·혐오 시설인 하수처리장을 지하화한 후 지상에 조성한 6만 6000제곱미터 규모의 친환경 녹지 공간이다. 다양한 테마의 산책로가 있고, 넓은 호수 같은 자경저류지는 홍수 등 재해 발생 시 방재 시설로, 평상시에는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이중 기능을 담당한다. 곳곳에 귀여운 조형물이 많아 사진 촬영하기도 좋다.
주소 광명시 일직동 417
문의 02-2680-6462

박승원 광명시장이 제안하는
상생과 순환의 광명 여행

경기 광명은 도심과 자연,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지역이다. 광명이 지닌 고유한 콘텐츠는 여행객을 도시 깊숙한 곳으로 이끌며 광명을 활기차게 만든다.

시장님이 생각하는 광명 여행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가장 큰 매력은 ‘반전과 공존’에 있습니다. KTX 광명역을 중심으로 한 역동적인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면, 5회 연속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된 광명동굴의 신비로운 공간을 만납니다. 또한 도덕산·구름산·가학산·서독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와 안양천·목감천의 물길이 도시와 조화를 이루며 자연과 도시가 공존하는 풍경을 만들죠. 이러한 공존은 지역과의 상생으로 확장됩니다. 시민이 직접 가꾼 정원이 관광자원이 되고, 사회연대경제 주체들과 로컬 콘텐츠를 함께 만들고, 광명동굴 입장료 일부를 지역화폐로 환급해 여행의 즐거움이 소상공인의 활력으로 이어지도록 하고 있습니다. 머무는 것만으로 지역사회의 지속 가능한 순환을 돕고 선한 영향력을 전하는 가치 있는 여정, 그것이 바로 광명 여행의 본질입니다.

광명을 처음 찾는 이들에게 여행 코스를 제안해 주세요.
광명의 사람과 자연, 역사와 문화 예술을 함께 경험할 수 있는 여정을 추천합니다. 먼저, 광명동굴에서 더위를 식히며 문화 예술 공간으로 재탄생한 동굴의 매력을 느낀 다음, 충현박물관에서 오리 이원익 선생의 청백리 정신을 되새기고, 기형도문학관을 찾아 영원한 청춘의 시인을 만나 봅니다. 광명동굴에서 환급 받은 지역화폐로 광명전통시장에서 다양한 먹거리를 즐긴 후 화려한 불빛이 더해진 도덕산 출렁다리와 연못을 따라 산책하며 야경을 감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광명 구(9)경 중 시장님이 가장 좋아하는 풍경은 무엇인가요?
시민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만큼 어느 것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장소들이지만, 일제강점기 수탈의 현장이자 버려진 광산을 창의적인 문화 예술 공간으로 재탄생시킨 ‘지속 가능한 자원 재생의 상징’인 광명동굴을 꼽고 싶습니다. 지금은 방문객의 소비가 지역 경제로 이어지는 구조를 만들고 있습니다. 환경을 훼손하지 않는 자원 재생, 지역 경제 순환, 문화 예술 향유가 어우러진 공간으로서 가장 자랑하고 싶은 장소입니다. 독자 여러분도 광명에 오셔서 지역과 상생하는 가치 있는 여행을 경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덜 알려졌지만 꼭 소개하고 싶은 여행지나 체험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광명의 뿌리를 알 수 있는 광명역사관을 추천합니다. 도시의 진정한 매력은 그 땅을 지켜 온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나옵니다. 2025년 10월 광명문화재단 2층에 개관한 광명역사관은 광명의 역사적 인물과 시민의 삶을 함께 조명하며 지역의 기억과 정체성을 보여 주는 공간입니다. 임진왜란의 숨은 영웅 무의공 이순신 장군, 시대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던 민회빈 강씨, 대를 이어 청백리의 삶을 실천한 정원용 선생 등 위인들의 삶과 함께 시민들이 기증한 생활사 자료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광명은 오래전부터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탄소 중립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추천해 주세요.
2024년 7월 하안동으로 이전한 광명업사이클아트센터는 버려진 물건에 예술적 가치를 더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국내 최초의 업사이클 예술·문화 공간입니다. 작품을 관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일상 속 폐자원을 활용해 나만의 업사이클 제품을 만들어 보는 에코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합니다. 자원 순환의 중요성을 온몸으로 깨닫는 생생한 교육의 장이죠. 또한 안양천과 한내천 정원, 안터생태공원, 새빛공원 등은 도시의 중요한 탄소 흡수원입니다.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이 공간들을 천천히 둘러보는 것 자체가 탄소 중립 여행입니다.

여행은 도시의 미래를 보여 주는 창이기도 합니다. 시장님은 앞으로 광명을 어떤 문화·관광 도시로 발전시키고자 하나요?
‘사람 중심의 지속 가능한 문화·관광 도시’를 꿈꿉니다. 단순한 규모 확대가 아니라 공동체와의 균형 있는 성장을 추구하며, 사회연대경제를 관광과 결합해 지역에 이익이 환원되는 구조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올해 하반기에 문을 여는 광명시 사회적경제혁신센터를 거점으로, ‘굿모닝 광명’ 로컬 브랜드 육성과 지역공동체 자산화 사업을 통해 여행객의 소비가 지역에 머무는 선순환 구조를 구축할 계획입니다. 광명은 ‘공동체의 힘’으로 성장한 도시입니다. 머무는 것만으로도 쉼과 상생의 가치가 느껴지는 여행지로 만들어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