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각지의 사연 많은 나무를 찾아다니는 나무 칼럼니스트 고규홍을 만났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인천 장수동 은행나무와도 짧은 교감을 나눴다.


어마어마한 두께의 책이 편집부 사무실에 도착했다. 모든 기자의 시선을 사로잡은 책은 <고규홍의 나무>. 30년 가까이 나무를 연구해 온 나무 칼럼니스트 고규홍이 4년여에 걸쳐 집필한 신간이다. 4억 년 전 출현한 나무가 인류와 관계 맺으며 살아온 긴 역사를 집대성한 1300페이지 분량의 책으로, ‘나무의 탄생’ ‘나무의 생명력’ ‘나무와 사람’ ‘공생의 생태계’ 총 4부로 구성됐다. 600여 건의 참고 문헌에서 책에 담긴 남다른 애정이 느껴진다. 고규홍 작가가 나무와 연을 맺게 된 때는 1999년. 12년 동안 일간지 기자로 일하다 본격적으로 소설 집필에 몰두하기 위해 회사를 나왔다. 퇴사 후 천리포수목원에 머물렀는데, 눈을 뜰 때마다 마주하는 풍경이 그를 나무의 세계로 인도했다.
나무에 관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뒤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한 생명체에 얽힌 사연을 들었다. 2000년에 솔숲닷컴 홈페이지를 개설해 ‘고규홍의 나무 편지’라는 사진 칼럼을 매주 싣기 시작했고, 26년간 한 번도 빠짐없이 연재했다. <나무가 말하였네> <고규홍의 한국의 나무 특강> <천리포수목원의 사계> 등 지금까지 38권의 책을 냈으며 대학교 강의도 병행하고 있다. 오랜 시간 나무를 기록하고 그 이야기를 사람들과 나누는 원동력은 어디서 나올까. 경외감과 호기심을 안고 나무 박사를 만나러 인천으로 향했다.



오감으로 느끼는 인천수목원
“서울 근교에서 노거수를 만날 곳이 있을까요?” 인터뷰 장소를 상의하는 과정에서 고규홍 작가가 인천 장수동을 제안했다. 수령 800년 넘은 은행나무가 장수동을 지키는 데다 차로 10분 거리에 위치한 인천대공원에 도심형 수목원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다양한 종의 나무를 만나러 수목원을 찾았다. 인천의 주요 식물종을 수집 및 보전·연구하기 위해 설립한 인천수목원은 2008년에 정식 개원했다.
솔문으로 들어서 몇 걸음 채 떼지 않았을 때 반가운 식물을 발견했다. <고규홍의 나무> 제3장 ‘나무 이전의 식물’에 등장하는 두 주인공, 이끼와 고사리다. 식물학에서는 각각 선태식물과 양치식물로 분류한다. 6억 년의 적막을 깨고 땅 위로 올라온 첫 번째 식물인 이끼는 극단적으로 건조한 곳이 아니라면 거의 모든 지역에 서식한다.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작아 다른 화려한 식물에 비해 관심을 많이 받지 못하지만, 작가는 작아서 더 아름다운 생명체라고 말한다. “이끼는 꽃, 열매, 씨앗이 없고 심지어 뿌리마저 없어요. 그저 이리저리 쓸려 나가지 않도록 그 자리에서 바닥을 붙들고 있을 뿐이죠. 뿌리처럼 보이는 조직을 헛뿌리라고도 해요.” 이끼가 번성하던 시기, 또 다른 생물체인 고사리가 세상에 나타난다. 잎과 뿌리가 뚜렷하게 분화하고, 이들을 잇는 관다발을 갖췄다는 것이 이끼와 다른 점이다. 이날 만난 건 청나래고사리. 고사리류가 포자로 번식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기 전, 도깨비와 요정이 씨앗을 가로챈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는 책 내용이 생각나 청나래고사리를 보자마자 미소가 지어졌다.
고 작가가 나무 덱을 가리킨다. “식물을 밟지 말라고 만든 거예요. 사람이 계속 드나들어 흙을 밟으면 흙 사이 공기가 눌려 뿌리가 숨을 쉬지 못해요. 흙을 보존하고 식물을 지키기 위해 덱을 설치한 거죠. 꽃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으니 사람에게도 좋아요.” 자주색 꽃을 피우는 안개나무, 꽃이 크고 탐스러워 함박꽃이라고 부르는 작약, 꿀샘이 풍부해 벌에게 인기 많은 덜꿩나무, 매끄러운 수피에 얼룩무늬가 선명한 모과나무, 콩과에 속하는 작은키나무 조록싸리 등 거침없이 앞서가는 나무 박사의 뒤를 쫓으며 식물의 특징을 익혔다. 수목원 나들이는 그렇게 작가의 식물 친구들을 만나는 시간이었다. ‘토투어스 드래곤’이라는 이름의 매실나무도 소개받았다. 구불구불한 가지가 용틀임을 연상시켜 ‘용틀임 매실나무’라는 별명이 붙은 재배 품종이다. 친숙한 열매에 눈을 반짝이니 작가가 덧붙인다. “열매를 많이 맺으면 사람들은 좋아하지만 식물 입장에서는 임종을 준비한다는 뜻일지 몰라요. 마지막으로 종족을 번식하는 거죠.”
인천대공원에는 메타세쿼이아 숲길도 조성됐다. 나무가 내준 그늘 아래서 사람들이 여유롭게 산책한다. 전국 각지에서 흔히 보이는 메타세쿼이아가 한때 멸종됐다는 오해를 받았다는 사실이 놀랍다. 화석으로만 존재가 확인돼 멸종된 것으로 알려졌다가 1940년대 중국 양쯔강 상류에서 발견됐다. 이런 종류를 식물학에서는 ‘나자로 분류군’이라고 부른다. 이후 전 세계로 퍼져 나갔고, 한국에서는 전남 담양에 집중적으로 심기 시작하며 이름을 알렸다. 대표 관광 명소로 거듭난 담양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은 도로 확장 공사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나무를 담양 군민들이 가로수 지키기 운동을 벌여 보존했으니, 모진 수난을 겪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이날 메타세쿼이아의 또 다른 생존 전략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광합성에는 햇빛, 물, 이산화탄소가 필요해요. 그런데 햇빛을 받기 위해 높게만 자라면 뿌리에서 끌어 올려야 하는 물이 문제가 되죠. 그래서 이 나무는 높은 나뭇가지에 돋아난 잎이 공기 중의 습기를 빨아들여 광합성에 필요한 물을 충당합니다.” 멸종한 줄 알았다가 새로 발견되고, 군민들의 단합으로 지켜 낸 숲길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지고, 광합성을 하기 위해 독특한 생존 전략을 마련한 메타세쿼이아. 앞으로 출장지에서 이 나무를 마주할 때마다 강한 생명력이 떠오를 것 같다.

800년 세월이 깃든 장수동 은행나무
식물의 생명력을 논할 때 은행나무를 빼놓을 수 없다. 은행나무는 육지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네 종류의 식물 중 하나다. 무려 2억 3000만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우리 곁을 지켜 왔다. “대개 생물들은 멸종 같은 위기를 겪게 되면 자신의 본성 가운데 하나를 잃는다고 해요. 빙하기를 비롯해 대멸종기를 여러 차례 겪은 은행나무도 본성의 일부를 내려놓아야 했죠. 그중 하나가 스스로 번식하는 능력이에요.” 긴 수명과 뛰어난 공기 정화 능력을 갖췄고, 땅속 깊이 뿌리 내리는 심근성 나무라 도로 상태를 망가뜨리지 않아 도시 가로수로 사랑받지만 자생하는 은행나무를 찾을 수 없는 이유다. 현재 세계자연보전연맹이 지정한 멸종 위기 동식물의 위험종으로 분류되어 있다.
고규홍 작가의 설명을 들으며 걷다 보니 금세 장수동 은행나무가 자리한 곳에 다다랐다. 높이 28.2미터, 둘레 9.1미터의 거대한 나무를 가만히 올려다본다. 은행나무가 지나온 800년 세월을 상상하니 천연기념물로 보호받고 있어 다행이지 싶다. 장수동 은행나무는 뿌리 부분에서부터 줄기가 다섯 개로 고르게 갈라지면서 높이 솟아올랐고, 나뭇가지가 수양버들처럼 늘어진 생김새가 특징이다. 오래전부터 영험한 나무로 알려져 마을 사람들이 집안에 액운이 들거나 마을에 돌림병이 돌 때면 이 나무에 제물을 차려 놓고 치성을 올렸다고 전해진다. 1992년 인천시 기념물로 지정된 후 몇몇 사람이 은행나무 지킴이를 자처하며 나무의 가치를 알리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중 한 명이 고 작가였다. 2021년 민속적 의미와 자연·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는 과정에도 관여했다. 근대 개항의 중심 역할을 한 인천 도심 한복판에서 8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마을을 지켰고, 사람들은 그 은행나무를 보호하려 애썼다. 화성 전곡리 물푸레나무, 영양 송하리 졸참나무와 당숲 등도 그의 진심이 닿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나무는 살아 있다.” 고규홍 작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나무를 열매와 목재로만 여기는 게 안타깝다며 하나의 생명체로 바라보기 위한 간단한 방법을 제안했다. “나무 앞에서 숨을 크게 들이마셔요. 30초면 됩니다. 우리가 내뱉는 이산화탄소가 나무의 광합성 재료가 되고, 나무가 내뿜는 산소는 몸속으로 들어오죠. 결국 우리가 이렇게 존재하는 건 나무가 살아 있기 때문이라는 걸 체감하는 거예요.” 집 근처의 나무 앞에서 30초만 시간을 보내면 어떨까. 나무는 지구 상에서 가장 오래 사는 생명체다. 잠시 숨결을 나눈 나무가 당신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여전히 남아 그날을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