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마음이 시원섭섭해진다. 지금껏 해 오던 일을 내려놓아도 괜찮다는 후련함, 과정이 어떻든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아쉬움 때문이겠다. 응어리처럼 남은 감정을 훌훌 날려 보내기엔 여행만 한 방법이 없다. 이른 아침 여장을 꾸려 기차역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올해를 갈무리하는 여행의 무대는 산과 바다, 호수를 품은 강원도 강릉이다.
사랑하는 도시를 닮은 도자기
매끈한 KTX-이음이 승강장으로 들어와 여행자를 싣는다. 북적이는 사람들 틈에 섞여 기차에 올랐다. 설렘으로 찬 여행자의 마음을 아는지, 기차는 빠르게 달려 금세 강릉역에 도착했다. 간밤에 비가 내려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서쪽으로 곧장 걷는다. 첫 번째 목적지는 도보 20분 거리의 교동이다. 강릉향교가 자리해 예부터 교촌 혹은 교동이라 불렀는데, 몇 년 전부터 교동사거리를 중심으로 아기자기한 카페, 공방, 편집·소품 숍이 모이기 시작했다. 강릉 특산물로 만든 빙수나 푸딩, 로컬 굿즈를 판매하는 가게 들이 입소문을 타 인기를 얻었고, 놓치기 아쉬운 이색 여행지로 거듭났다.
교동사거리에서 강릉시립미술관 쪽으로 방향을 튼다. 얼마 걷지 않아 초록색 문이 달린 가게 ‘산소울’을 발견한다.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가니 선반에 진열된 올망졸망한 도자기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모양은 버섯, 도토리, 나무처럼 주로 자연에서 마주하는 것과 닮았다. 강소율 작가는 2019년 끝자락에 도자기 공방 겸 소품 숍 산소울을 열었다. 산은 자연을 뜻하고, 소울은 이름에서 따 자연을 좋아하는 자신이 하나뿐인 도자기를 빚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그는 모든 작업물을 손으로 반죽해 만든다. 백자토로 형태를 잡는 과정에서 틀을 사용하지 않아 같은 작품이라도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 “공예와 도자기를 공부하던 시절 틀에 박힌 작품만 제작하는 게 아쉬웠어요. 손으로 백자토를 만져 모양을 잡으니 의도하려던 바가 잘 드러났고, 무엇보다 행복했습니다.” 공방 이름이 품은 뜻처럼 그의 작품은 대부분 강릉의 자연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완성한다. 숲속 나무에서 자라는 버섯을 형상화한 ‘산과 버섯 홀더’, 가을을 맞아 내놓은 ‘도토리 키링’…. 처음부터 강릉에서 영감을 받지는 않았다. 어릴 적에는 고향인 강릉에 살기보다 다른 도시로 떠나려는 열망이 강했다. 성인이 된 후 서울에 둥지를 틀었지만 마음 한구석은 강릉을 그리워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짙푸른 바다를 마주했을 때, 비로소 강릉의 매력과 이곳을 사랑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애정이 생기니 시선이 달라졌다. 안반데기, 송정해변, 대관령 등 곳곳을 여행하며 눈에 담았다. 살아 숨 쉬는 강릉을 표현하려 작품에 표정을 새기기도 했다. “최근 집중하는 작업은 세 가지 종류로 구성한 양 도자기예요. 산을 뛰어다니거나 들판에 가만히 앉아 햇볕을 쬐는 양을 관찰해 도자기로 빚죠. 시간이 나면 종종 목장에 가곤 해요.” 아기자기한 양 도자기를 내놓는 강 작가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난다. 수줍은 표정에서 강릉과 작품을 향한 애정이 느껴져 덩달아 입꼬리가 올라간다.
누구나 즐기는 건강한 음식을 위해
이번에는 남대천을 건너 동쪽으로 이동한다. 입암동에 위치한 ‘부어스트2N6’은 50년 넘게 축산가공학을 연구한 이근택 대표와 그의 제자 육준모・민보현 육가공 마이스터가 힘을 모아 꾸린 공간이다. 소시지를 뜻하는 독일어 부어스트를 이름으로 쓴 것처럼, 가게에서는 신선한 고기를 사용해 매일 독일 바이에른 지역의 레시피와 제조 방식으로 소시지를 만든다. 독일에 존재하는 햄・소시지 레시피는 수천 개에 달한다. 이곳도 톡톡 터지는 식감과 육즙이 매력인 뉘른베르거, 차갑게 보관했다가 바로 썰어 먹는 비어싱켄, 끓는 물에 데치는 바이스부어스트 등 열한 종류를 두어 선택지를 넓혔다.
“독일은 소시지가 주식입니다. 언제든 즐겨 먹지요. 한국에는 육가공 제품을 건강에 해로운 식품으로 여기는 시선이 일부 있습니다. 오해를 해소하고자 가게를 열었어요. 음식은 누가 어떤 재료로 어떻게 만드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대표의 안내를 따라 소시지 제작 공정을 살핀다. 질 좋은 냉장 돼지고기를 아주 곱게 갈아 레몬 분말, 파슬리를 넣고 섞은 다음 깨끗이 씻은 돼지 창자에 내용물을 채워 넣는다. 품질을 위해 합성 보존료 등 첨가물을 넣지 않은 데다 염도를 낮춰 어르신이나 아이도 걱정 없이 즐기도록 했다.
“강릉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실습 시간이나 축제 때 소시지를 만들었어요. 학생들은 물론 먹어 본 사람들의 반응이 좋았죠. 그 기억을 바탕으로 이곳에 가게를 열어야겠다는 꿈을 키워 여기까지 왔네요.” 강릉을 대표하는 소시지, 나아가 한국 최고의 수제 소시지를 만들고 싶다는 이 대표의 눈이 반짝인다. 강릉의 새로운 명물로 소시지가 불릴 날이 머지않았다.
강릉이 알려 준 해답
가게를 나와 바다를 향해 부지런히 움직인다. 강문해변에 다다르자 어느새 구름이 걷혔다. 해변을 잠자코 걷다가 바람이 차지 않아 모래사장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탁 트인 바다에 배 한 척이 둥둥 떠가고, 문득 나타난 갈매기가 종종거리며 눈앞을 지난다. 일렁이는 바다를 응시한다. 강릉에서 만난 이들은 저마다 무언가를 품고 있었다. 꿈, 사랑, 희망. 흔하지만 마음에서 놓지 말아야 할 것들. 끝을 매듭지었다면 다음으로 나아갈 차례다. 새 여정을 시작하는 방법을 우리는 이미 안다. 한결 맑아진 정신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잔잔한 파도 소리가 출발하려는 여행자를 다독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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