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소리에 눈을 떴다. 머리맡에서 흩어지는 나무 냄새, 단정한 서까래와 흰 벽에 걸린 옛 그림, 바스락거리며 몸에 감기는 침구. 알람이 아닌, 기분 좋은 생경함이 정신을 깨우는 아침이다. 창문 너머 펼쳐진 장면은 한 폭의 문인화다. 안개에 휩싸인 산봉우리와 이슬이 내린 기와지붕, 허리를 굽힌 ‘가브리(가오리의 경상 방언)’ 소나무와 거북 모양 비석대가 조용한 눈인사를 건넨다. 선비의 눈과 마음을 지니게 하는 고장, 경북 안동에서 마주친 선물 같은 순간이다.
한옥이라는 경험의 총체, 락고재
인간이 만든 아름다운 것은 대개 자연을 닮았다. 한옥이 그렇다. 지형과 지세를 고려해 자리를 잡고, 그 주변에서 주재료인 나무와 돌과 흙을 구하고, 최소한의 가공으로 본연의 질감을 살려 짓는 건축양식. 자연을 닮은 데서 나아가 자연에 순응하며 깃든다.
굽이치는 낙동강 물길에 안긴 명당 중 명당, 풍천면 하회리에 가면 락고재 하회 한옥호텔 기와 본관을 만난다. 부지 매입부터 설계·시공·준공에 장장 15년이 걸렸다는 기와 본관은 한옥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락고재가 오랜 세월 쌓아 올린 경험과 공력의 총체로, 최근 정식 개장을 알렸다. “문화유산구역인 안동하회마을에 자리했으니만큼, 문화유산을 남긴다는 생각으로 이곳을 완성했습니다. 문화유산구역의 모든 지형지물은 엄격한 법령하에 보존·관리합니다. 예컨대 여기 놓인 작은 석물 하나, 나무 한 그루마저도 설계 도면과 완전히 동일해야 하죠.” 생애를 한옥에 바친 안영환 회장, 설계와 시공을 도맡은 황진용 부장의 설명을 듣고 보니 눈앞의 풀포기 하나도 예사롭지 않다.
돌과 나무도 이렇듯 신중히 배치했는데, 하물며 주인공인 한옥은 얼마나 더 귀하게 만들었을까. 기실 안동에는 한옥의 규범이라 할 만한 건물이 차고 넘친다. 도산서원, 병산서원, 봉정사, 만휴정···. 이들을 한차례 둘러보고 돌아올 손님을 위해 락고재는 특별히 궁궐 건축의 미감을 이식했다. 그저 세부만 본떠 만든 것이 아니라 창덕궁의 부용정, 관람정, 애련정, 연경당, 낙선재를 실측해 그대로 옮긴 듯 고증했다. 그뿐인가. 건물의 품격에 맞는 고가구와 고미술품도 곳곳에 갖췄다. 로비에서 손님을 맞는 달항아리부터 부용정에 걸린 조선 영조 친필을 발견하는 동안 벌어진 입을 다물 틈이 없었다.
고백하자면, 아침이 밝아서야 객실 한편 반닫이에 놓인 조그마한 자기에도 명패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2세기 고려청자와 14세기 고려흑유 옆에 배낭을 풀고 짐을 두었으니, 의도치 않게 배짱 두둑한 투숙객이 됐다. 고미술품만큼 압도적인 차경에 마음이 홀렸기 때문이다. 자연에서 빌린 경치를 공간의 요소로 활용하는 한옥 미학의 궁극, 차경. 창문을 액자 삼아 펼쳐지는 그토록 눈부신 풍광마저 락고재가 기울인 노력의 결실이라던 안영환 회장의 말이 떠올랐다. “기와 선의 높낮이를 조정하기 위해 수없이 한옥을 짓고 해체한 결과, 기와 끝 선과 멀리 어른거리는 ‘필가봉’의 능선이 한데 조화를 이루게 되었죠. 진정한 풍류란 자연에 동화되는 일 아닐까요.” 멋과 운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아는 이들 덕에 우리의 여정이 조금 더 환하고 풍요로워진다.
#락고재 하회 한옥호텔 기와 본관 둘러보기
① 마을처럼 옹기종기 모인 20여 채 한옥을 ‘화천’이라 부르는 수로가 에워싼다. 화천은 낙동강의 별칭이기도 하다.
② 곱게 말린 인진쑥 향을 맡으며 찜질을 즐기는 공간을 마련했다. 수로 옆에 늘어선 황톳길을 맨발로 걸어 보아도 좋다.
③ 지붕 끄트머리를 해와 달, 또는 황도 12궁 조명으로 장식했다.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영감을 받은 ‘모노리스’도 세워 두었다. 우주와 공명했던 전통적 세계관을 반영했다.
주소 경북 안동시 풍천면 전서로 186-20
홈페이지 rkj.co.kr
K를 넘어설 한국의 미감, 안동단
한국적인 것이 곧 세계적인 것이라는, 뻔한 줄 알았던 문장이 새삼 힘을 얻는 요즘이다. 자신만의 철학으로 제품을 개발하고 공간을 연출해 온 디자이너 윤이서 대표는 안동에 깃든 한국적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특별한 프로젝트 공간 ‘안동단’을 마련했다. 세계에 한국의 미감을 알리겠다는 포부도 함께 실었다. “한국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이고 전통적인 미감이 무엇일까 고민한 끝에 ‘단’이라는 단어이자 개념을 떠올렸습니다. 조선 시대는 유독 단아함을 숭상한 시기죠. 담박한 백자와 한지가 주는 단순하고 깊은 아름다움을 K라는 단어로는 결코 표현할 수 없을 거예요.”
안동단의 활동 반경은 다재다능한 윤 대표의 관심사처럼 넓디넓다. 안동시와 안동관광두레센터는 옛 안동상공회의소 건물을 창작자의 거점이자 여행자의 사랑방으로 탈바꿈하고자 했는데, 이 과정에서 브랜딩을 주도한 것이 바로 안동단이다. 그런가 하면 안동을 상징하는 기념품을 만들어 선보이거나, 전통 직물 안동포로 이름난 임하면 금소마을에서 전시회를 개최하는 등 도시가 지닌 역사와 멋을 널리 알릴 여러 가지 작업 또한 동시다발적으로 수행해 왔다.
“안동이 단단한 콘텐츠를 지닌 도시임에도 그만의 매력을 섬세하게 녹여 낸 기념품이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어요. 마침 안동의 여러 로컬 브랜드와 협업을 진행하던 즈음이라 다양한 일을 도모할 수 있었죠.” 투명하고 은은한 빛깔의 폴리카보네이트 소재로 제작한 하회탈 장식, 도산서당을 그린 겸재의 그림 ‘계상정거도’를 활용한 달력·쿠션·마스킹테이프, 검박한 선비의 반닫이와 침구를 모티브로 삼은 다구 보관함 ‘퇴계 찻자리’, 지역 업체와 손을 잡고 개발한 헴프시드 스킨케어 제품과 전통 간장 등은 안동 기념품의 외연을 한 차원 확장했다.
안동, 나아가 한국의 아름다움을 고민해 온 윤이서 대표에게 풍류란 어떤 의미일까. “좋아하는 것을 꾸준히 탐색해서 그것을 향유하는 일 아닐까요. 그러려면 많은 경험을 축적해 나만의 시선과 관점을 벼려야겠지요.” 앞으로 안동단이 구현할 풍류의 풍경에 기대를 거는 이유다.
#안동단 둘러보기
① 안동단은 예약한 방문자에게 문을 연다. 여러 채의 반닫이를 벽 한편에 집적해 완성한 아트워크가 손님을 반긴다.
② 옛 안동상공회의소 건물의 독특한 구조와 세부 요소를 살려 역사를 보존했다. 흥미로운 건축적 요소를 곳곳에서 발견한다.
③ 응접실 ‘레레관’에 가면 아무 데나 걸터앉을 수 있는 널따란 평상형 의자가 있다. 여기 몸을 맡긴 채 공간을 음미해 본다.
주소 경북 안동시 영가로 12-1
인스타그램 @andong_dan
한잔 술에 담긴 안동을 마시다, 잔잔
풍류를 논하면서 술을 빼놓을 수 있을까. 마침 안동단이 자리한 건물 1층엔 명인 박재서 안동소주 체험관이자 칵테일 바 ‘잔잔’이 늦은 시각까지 불을 밝힌 채 손님을 맞이한다. 전남 강진 출신의 박민재 대표는 안동대학교에 진학한 것을 계기로 지역의 문화 인프라 구축에 집중하게 되었고, 학교가 소재한 안동의 전통문화까지 관심을 뻗쳐 왔다. “풍류의 시작은 술이라고 생각해요. 친숙해서 잊히기 쉬운 명주, 안동소주를 기주로 잔잔만의 이야기를 담은 칵테일을 주조하고 있습니다. 저 같은 외지인은 칵테일처럼 섞여 어울리고 싶다는 열망이 큽니다. 이곳이 안동 사람, 안동을 찾아온 사람 너나없이 한데 어우러지는 공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창우 바텐더는 안동소주의 다양한 면면을 경험하도록 독창적인 칵테일 메뉴를 개발했다. 웰컴 드링크 격인 ‘안동 사워’와 하이볼 ‘안동 하입보이’로 시작해 좀 더 농밀한 커피 칵테일 ‘카페인안동’이나 아마레토 향이 짙은 ‘안동 한량’으로 마무리하는 코스다. “안동 한량은 한국 술의 가양주 전통과 문화를 표현한 메뉴예요. 은밀히 장독대에 술을 빚었던 시대를 기억하고 싶어서 이렇게 작은 장독대 잔에 술을 담았어요. 한번 들이켜 보세요.” 달콤쌉싸래한 것이, 과연 비밀스럽고 묘연한 맛이다. 안동의 밤이 달그림자처럼 찰랑거린다.
#잔잔 둘러보기
① 원본을 알아야 변주가 즐겁다. 명인 박재서 안동소주 양조장을 방문해 시음을 즐기고 한국 술 역사를 공부한다.
② 잔잔을 비롯한 안동의 양조장과 술 공간을 경유하는 여행 상품 ‘소주어리 여행’, 안동소주를 공부하고 직접 칵테일을 만들어 보는 원데이 클래스도 경험한다.
③ 안동 술빵과 종부님 수제 육포 등 주전부리와 칵테일을 페어링한다.
주소 경북 안동시 영가로 12-1
인스타그램 @class_andongsoju_zanz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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