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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그 책, 그 책이 이 책

드라마를 보다 책이 등장하면 표지에 눈길이 가고, 제목을 알고 싶고, 펼친 쪽의 내용이 궁금해진다. 단순한 소품일까, 엄청난 복선일까. 영상 속 책은 우리를 상상하게 한다.

UpdatedOn September 24,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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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커다란 나무가 쓰러졌다. 쿵 소리가 났겠는가, 안 났겠는가.” 8월 말 공개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의미심장한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주인공 성아의 모습이 이질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수상함을 풍기는 그가 수영장에 발을 담그고 한쪽에는 와인 잔을 둔 채 여유롭게 책을 읽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낯익은 표지, 4년 전 출간된 안희연의 시집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이다. 모완일 감독은 여름 분위기가 나는 책을 원했고, 호흡이 긴 소설보다는 짤막한 시를 선호할 듯한 인물의 특성을 고려해 선정했다.

사람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로맨스 장르는 책 내용을 활용해 서사를 보충하기도 한다. 집주인과 세입자로 얽힌 두 인물이 서로의 삶에 스며드는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에서는 시구절을 직접 언급한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로 운을 떼는 정현종의 시 ‘방문객’은 상대의 과거를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기는 지호의 복잡한 감정을 대변한다. 드라마 <남자 친구>는 바닷가 근처에서 주인공 진혁이 읽는 책을 보여 준다. 바로 김연수의 소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잠시 떨어져 지내기로 한 진혁과 그의 연인 수현이 서로를 끌어안고, 의자에 놓인 책이 바람에 휘날리는 순간이 한 화면에 담긴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 흘러나오는 내레이션이 둘이 떨어질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하는 듯하다. 드라마 <경우의 수>에서는 최은영의 소설집 <내게 무해한 사람> 속 밑줄 그어진 단락을 읽거나, 권민경의 시 ‘나와 너에 대한 예언’ 속 문장을 활용해 마음을 고백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휴대전화 화면을 쳐다보는 것보다 책을 읽는 일이 흔치 않아서인지 책 표지는 찰나에 스쳐 지나가도 한동안 시청자의 시선을 붙들어 놓는다. 정지, 뒤로 감기, 정지. 예능 프로그램 <효리네 민박>에서 아이유가 읽던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제목을 언급하지 않았음에도 팬들이 표지 그림으로 해당 책을 찾았고, ‘Bubble Gum(버블검)‘ 뮤직비디오에서 뉴진스 멤버 민지가 손에 쥔 책 이디스 워튼의 소설 <순수의 시대>는 영상 공개 후 판매량이 여덟 배 증가했다. 책이란 물건에 특별한 역할을 부여하는 건 내용뿐 아니라 표지, 디자인, 크기 등이 그만큼 매력적인 소품이라는 뜻. 책의 물성을 재확인한 시간, 과연 마음에서 쿵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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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김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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