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식
서른 즈음의 예술가 임동식에게는 목마름이 있었다. 그럴싸해 보이는 도시 사회의 규범, 화이트 큐브로 대변되는 실내 공간, 서구의 예술 사조를 답습하는 기성 화단에서 벗어나 자신만이 지닌 개별성과 독창성을 펼치고 싶다는 갈망. 그는 ‘바깥’에서 답을 찾았다. 일단 밖으로 나가 자연을 스승 삼고 무어든 해 보겠노라 결심했다. 그리하여 1980년, 충남 연기군 출신인 그는 뜻을 함께하는 작가를 모아 공주 금강 백사장에서 제1회 <금강현대미술제>를 열고 자연과 교감을 시도한다. 이듬해 여름, 이들은 예술 그룹 ‘야투: 야외현장미술연구회’를 조직해 다음과 같은 창립 서문을 남긴다. “우리는 풀 포기의 떨림에서부터 여치의 울음, 개구리의 합창, 새, 물고기, 나뭇결에 스치는 바람 소리, 밤하늘의 별빛, 봄의 꽃, 여름의 열기, 가을의 드맑고 높은 하늘, 겨울의 차디찬 기온은 물론··· (중략) ···동서남북이 확 열려진 공간과 변화되는 시간을 사계절의 선에서 바라보는 야투의 율동 속에서 자연처럼 선하고 강하며 깨끗하고 맑은 의식을 얻을 것··· (하략).”
금강 유역에 귀환한 임동식이 벌인 퍼포먼스는 더없이 진솔하고 투명했다. 강물에 떠내려온 폐목을 세워 올리는 ‘일어나’, 풀잎을 몸에 두른 채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 다시 풀잎을 벗어 던지는 ‘온몸에 풀 꽂고 걷기’, 주운 플라스틱 병에 강물을 길어 올리며 물줄기를 관찰하는 ‘물과 함께’에 이르기까지 그는 자연을 해치지 않는 방식으로 자연의 가르침을 깨닫고자 했다. 이러한 야투의 정신은 금강 권역에 깊이 뿌리내려 오늘날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로 명맥을 잇고 있다.
이제 우리 앞에 선 일흔아홉의 거목, 1세대 자연미술가 임동식을 마주한다. 야외 현장에서 화폭으로 자리를 옮겼을지언정, 그는 몸소 막대를 이어 제작한 기다란 세필을 들고 예의 퍼포먼스를 수행하는 중이다. “붓을 쥐다 보면 손에 물리적 힘을 가하게 됩니다. 그게 당연한 일이지요. 다만 저는 화면에 묻은 물감이 무언가를 주장하지 않고 원래 그러한 것처럼 보이려 합니다.” 붓끝으로 물감을 얹듯이 한 걸음, 한 걸음. 그는 자신의 그림을 두고 ‘길목을 찾아 나가는 과정’이라 이른다. 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짧게는 1년, 길게는 수년에 달하는 이유다. “오늘 환하게 칠한 걸 내일 어둡게 칠하기도 하고, 그저 갈팡질팡하며 그립니다. 완성된 모습을 정해 놓지 않고 그리거든요.” 부끄러운 듯 미소 지으며 말을 잇는 그의 얼굴엔 소년도, 구도자도, 신선도 있었다.
기억
몸짓으로 그려 낸 계절
대전시립미술관 열린수장고는 <임동식: 사계절의 선에서>전을 마련해 자연의 순환과 변화의 궤적을 좇아 온 작가의 열여덟 점 작품을 소개한다. 조촐한 규모의 전시지만 임동식이라는 너른 세계에 첫발을 들이기엔 부족함이 없다. 이름 모를 풀, 나지막한 언덕, 고요히 굽이치는 강, 흐드러지게 핀 수선화, 마을을 굽어보는 향나무···. 세필로 촘촘히 쌓아 올린 색과 선이 도리어 어슴푸레한 풍경을 이루다가, 이내 봄비처럼 가슴을 적신다. 그러고는 속삭이듯 이야기한다. 자연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자신만의 리듬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바깥에서 답을 찾던 젊은 예술가가 다시 붓을 쥔 까닭은 무엇일까. 이번 전시의 얼굴 같은 작품 ‘기억의 강’에서 실마리를 짚는다. 1983년 독일 함부르크 미술대학에 진학한 임동식은 야투를 유럽에 알리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지속했다. 함부르크시의 지원으로 1989년 <야투 독일전>을 개최했는가 하면, 1990년 귀국 후에는 다시 공주로 돌아가 1991년 여름 <금강에서의 국제자연미술전>이라는 전무후무한 행사를 기획해 독일, 미국, 캐나다, 일본 등 해외 작가 35명을 불러 모았다. 그는 이 전시를 위해 넓은 천을 걸어 놓고 큰 붓으로 그려 내린 금강 풍경을 선보였다. 이것이 오늘날 가로 320센티미터, 세로 132센티미터에 달하는 대작 ‘기억의 강’ 초안이다.
“독일 생활을 마치고 돌아올 때부터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었어요. 이 그림은 제가 두고두고 편하게 보고 싶어서 오랜 시간을 들여 덧그렸습니다.” 임동식은 한번 그린 작품을 여러 차례에 걸쳐 지우고 다시 그리는 개작의 방법론을 견지해 왔다. ‘기억의 강’ 또한 자신이 본 금강과 과거 금강을 기억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1991년부터 2008년까지, 무려 17년에 걸친 개작을 진행했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풀숲과 쉼 없이 흐르는 강물, 멀리 어른거리는 모래섬. 군데군데 덧그린 흔적이 시간과 기억의 더께를 이루어 오래도록 마음을 흔든다.
규범과 관습, 도시 생활과 중앙 화단에서 탈피하려는 임동식의 성향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확고해진다. 1993년 공주 원골마을로 삶의 터전을 옮긴 그는 뒷산 자락에 작업실을 짓고 농지를 가꾸며 마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간다. 이때 착상한 작품 중 하나가 이웃집 아이 본춘이와 함께 사계절을 보내는 ‘본춘이와 화가 아저씨’ 연작이다. 성장하는 아이와 나이 들어가는 화가의 모습, 시간의 흐름에 따라 옷을 갈아입는 계절의 풍경이 맞물려 윤회전생의 거대한 수레바퀴를 보는 듯한 그림이다.
자연 예술
삶이 된 예술, 예술이 된 삶
물론 임동식은 마을과 사람들을 작품 소재로 삼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1993년 <예술과 원골> 축제를 시작으로 1998년부터 2001년까지 <예술과 마을>을 기획, 진행한 그는 농경 문화에 깃든 생명 예술의 정신을 널리 알리고자 했다. 이때 원골마을 주민들은 예술의 주체로서 직접 만든 작품을 출품하고 전시장을 꾸몄다. “고추밭에 말뚝 박는 일과 당신네 예술이라는 게 뭐가 다른가.” 한 주민이 임동식에게 건넨 질문에서 촉발한 프로젝트였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멍석, 짚신 같은 것이 모두 농민의 재능과 역량으로 일군 문화이고 미술이더군요. ‘예즉농 농즉예(藝卽農 農卽藝)’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는 머지않아 또 한 번 깨달음을 경험한다. 시장에서 만난 동갑내기 사내 하나가 마음을 붙든 것이다. 들이고 산이고 여기저기 쏘다니며 우렁을 건지고 마를 캐던 사내의 이름은 우평남. 임동식의 눈에 우평남은 뿌리가 잘생긴 소나무를 손질해 근사한 작품으로 만들어 내는, 타고난 자연예술가였다. “당시 농경 문화에 심취한 제게 수렵 채집 문화로 시간을 거슬러 오르게 한 사람이지요. 우 화백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무어든 주워 보려 했는데, 그때 그가 ‘나라면 그림을 그리겄다’ 하는 거예요. ‘친구가 권유한 풍경’ 연작이 그렇게 출발합니다.” 2003년부터 임동식은 우평남의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동안 권유받은 풍경을 채집해 그림으로 옮긴다. 공산성과 금강, 수형이 아름다운 향나무, 눈 쌓인 언덕 등 꾸밈 없고 담박한 자연의 모습이 화폭에 고스란하다.
두 사람의 우정과 인생을 함축해 놓은 ‘자연예술가와 화가’ 연작은 임동식의 삶과 예술적 방법론을 망라한 역작이다. 이들의 소년기·청년기·장년기·노년기를 상징하는 봄·여름·가을·겨울의 금강을 한가운데 두고 왼편엔 ‘자연예술가’ 우평남, 오른편엔 ‘화가’인 자신의 생애를 영화 스틸 컷처럼 구성해 서사를 부여했다. 어떤 삶은 그 자체로 예술이 된다.
오늘날 우평남은 임동식의 뜻대로 자연예술가가 되어 그만의 작품 세계를 확장해 가고 있다. “모든 아이는 노래를 부르고 낙서를 합니다. 무언가를 표현하고 나타내려는 게 인간이에요. 무궁무진한 존재지요. 여러분도 붓을 들고 그림을 그려 보세요. 그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겁니다.” 그의 말이 곡진한 진심이라는 걸 안다.
대전시립미술관은 소장품 ‘본춘이와 화가 아저씨’ 연작과 ‘자연예술가와 화가’ 연작, ‘기억의 강’, ‘향나무 저편 강원도 산토끼’와 관련 작품을 아울러 선보이는 <임동식: 사계절의 선에서>전을 마련했다. 전시는 대전시립미술관 열린수장고에서 10월 6일까지 열린다.
문의 042-270-7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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