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세계, 인터넷상에서만 향유하던 버추얼 콘텐츠가 현실에 스며든다. 지난 3월, 남성 버추얼 아이돌 그룹 플레이브가 발매한 앨범 <아스테룸(ASTERUM): 134-1>의 타이틀곡 ‘웨이 포 러브(Way 4 Love)’가 버추얼 아이돌 그룹 최초로 지상파 음악 방송에서 1위에 올랐다. 당시 후보로 함께 경쟁한 곡은 가수 비비의 ‘밤양갱’, 아이돌 그룹 르세라핌의 ‘이지(easy)’. 그들은 ‘버추얼 아이돌은 실체가 없다’ ‘인기는 거품일 것이다’라는 편견과 억측을 부수고 성과로 실력과 인기를 증명했다.
여성 버추얼 아이돌 그룹 이세계 아이돌 역시 인기 고공 행진 중이다. 7월 중순 경희대학교 평화의전당에서 연 멤버 릴파의 콘서트가 티켓 판매 개시 3분 만에 매진을 알리며 오프라인 공연을 성황리에 마쳤다. 버추얼 업계의 선두를 달리는 두 그룹 모두 온라인이 아닌 오프라인에서 활동하려는 움직임이 뚜렷하다. 유행처럼 스쳐 지나갈 줄 알았던 버추얼 콘텐츠가 ‘이(異)세계’가 아닌 현실에서 나날이 신기록을 세워 명성을 떨치는 것이다.
아이돌과 더불어 버추얼 유튜버 역시 주목할 만하다. 대한제국 관료가 시간 여행을 통해 현대에 왔다는 콘셉트를 철저히 고증하며 활동하는 유튜버 향아치는 지난 7월 서울 홍대 AK몰에서 팝업 스토어 ‘석어당에서 온 초대장’을 열어 팬들과 만났다. 방송 중 <조선왕조실록>을 열람하다 한자 오탈자를 발견해 수정을 요청할 정도로 역사 지식이 풍부한 그는 2023년 서울역사박물관과 협업해 전시 <한양 여성, 문밖을 나서다> 연계 유튜브 생방송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처럼 버추얼 콘텐츠가 게임·엔터테인먼트 업계를 넘어 예술, 역사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2016년, 버추얼 유튜버가 최초로 등장한 나라 일본은 입지가 더 넓다. 버추얼 유튜버를 주인공으로 시트콤 드라마를 찍거나 대형 편의점과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해 제품을 출시하는 등 사람과 버추얼 휴먼이 현실에서 공존하는 모습이 자연스럽다.
비교적 제약이 덜한 가상 세계에서 펼친 꿈을 현실로 가져오는 이도 등장했다. 한국 최초 청각장애인 버튜버 큐랑은 채널을 개설한 지 1년이 되기 전에 구독자 7만 명을 넘겨 빠르게 성장했다. 장애와 관련한 에피소드를 게임, 노래 등 콘텐츠에 자연스럽게 녹여 시청자에게 유쾌하게 다가가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큐랑도 지난 7월 킨텍스에서 진행한 만화·애니메이션 행사 <코믹월드 2024 SUMMER>에서 오프라인 팬 미팅을 진행했다. 버추얼 기술이 문화뿐 아니라 개인의 소망과 꿈을 가상 세계에서 현실로 옮겨 놓은 셈이다.
그들은 만화 캐릭터가 아니다. 버추얼 아이돌, 유튜버 모두 캐릭터 뒤에 실제 사람이 존재한다는 점이 핵심이다. 몸에 센서를 부착하거나 적외선을 이용하는 모션 캡처 기술로 행동과 표정을 감지하고, 이를 버추얼 캐릭터로 표현한다. 캐릭터와 실제 사람은 이름, 얼굴, 성격이 모두 다르다. 그들은 익명성을 활용해 외관보다 자신의 재능에 시선이 가도록 했다. 톡톡 튀는 기획이나 가창력, 지식, 입담, 재치 등 오직 능력만으로 평가받는다. 우리는 이미 크리에이터 펭수, 아티스트 뱅크시처럼 본체를 감춘 창작자에게 열광해 왔다. 버추얼 휴먼 역시 다르지 않다. 그들은 얼굴을 가리는 대신 캐릭터를 내세워 문화를 창조하는 새 시대의 크리에이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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