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햇빛이 여행자의 발길을 재촉하는 날, 부드럽게 등을 미는 바람을 따라 어디로든 떠나고 싶다. 부푼 마음을 안고 기차에 올라 전남으로 향했다. 전남에 기차가 닿는 도시는 여럿이지만, 그중 KTX를 타고 한시적으로 방문이 가능한 지역이 있다. “함평 천지 늙은 몸이/ 광주 고향을 보랴 허고”. 조선 후기 판소리 명인 신재효가 지은 단가 ‘호남가’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곳. 봄 그리고 나비 하면 떠오르는 함평이다.
축제의 무대, 함평엑스포공원
함평에서는 표지판은 물론 길가에 놓인 시설물에도 나비가 보인다. 함평나비휴게소, 가로등에 달린 나비 조형물…. 나비로 가득한 이 고장은 겨울이 끝나고 날이 따뜻해지기 시작하면 차츰 분주해진다. 매년 4월과 5월 사이에 함평나비대축제가 열리기 때문이다. 이 고장이 나비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된 시작점을 찾아 2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부터 함평은 이름처럼 평평하고 넓은 땅이 많아 농사를 짓기에 알맞은 고장이었다. 농업과 축산업에 집중하던 이곳에서 1999년 처음으로 나비축제가 열린다. 따뜻한 봄, 나비를 테마로 한 축제는 많은 여행객을 불러 모으며 큰 성공을 거뒀고, 함평군은 이를 계기로 곤충과 생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2006년 나비산업특구로 지정된 후에도 끊임없이 연구를 거듭해 결국 2년 후 함평세계나비·곤충엑스포를 개최한다. 꾸준한 연구와 나비를 향한 사랑이 나비의 고장이라는 유일무이한 별명을 안겨 준 것이다. 100만 제곱미터(약 30만 평) 규모의 함평엑스포공원에서 성대하게 열리는 나비축제는 올해로 벌써 26회째를 맞는다.
나비의 문이라 불리는 다리를 건너 공원으로 들어선다. 수생식물관, 나비곤충생태관, 함평군립미술관, 황금박쥐생태전시관 등 다양한 주제의 전시관과 광장, 생태 습지를 조성해 축제 기간이 아니어도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나비곤충생태관에서 나비 이야기는 더욱 깊어진다. 전시관으로 들어서자마자 천장을 채운 파란 나비 장식이 방문자를 반긴다. 관람 동선을 따라 나비의 생애, 세계 곳곳에서 서식하는 나비 표본, 세밀화 등을 본다. VR 기기를 이용해 곤충의 시점을 체험하는 코너도 흥미롭다. 전시관 끝자락에서는 벽면에 빔 프로젝터로 달팽이, 개미 등 다양한 종류의 곤충 영상을 재생한다. 그들의 생애, 먹이 등 몰랐던 사실을 알고 마주하니 꼼지락거리는 곤충이 친근하게 느껴진다.
야외 정원은 꽃밭과 나무를 가꾸고 곳곳을 정비하느라 여념이 없다. 축제의 막이 오르면 공원은 더욱 화려해진다. 중앙광장에서는 동화 같은 나비 인형극과 나비 구조대 캐릭터 퍼레이드가 펼쳐지고, 다육식물관·친환경농업관·수생식물관 등 각각의 테마로 나눈 네 개의 온실에서는 잉어 먹이 주기나 바나나 따기처럼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참여하는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축제의 백미는 두말할 것 없이 나비 날리기다. 함평에서 기르고 보살핀 나비를 체험자가 직접 자연으로 돌려보내는데, 파란 하늘 아래 날갯짓하는 나비들을 상상하니 벌써가슴이 두근거린다.
세상에 나온 나비도 푸른 산과 바다를 내려다보며 생각할 것 같다.
함평은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곳이라고.
알에서 나비가 되기까지
나비 생육과 관련한 과정을 담당하는 곳, 함평농업기술센터에서 드디어 축제의 주인공을 만난다. 애벌레, 번데기, 성충이 한 공간에 모인 모습이 진풍경이다. 애벌레가 화분 위에서 꿈틀거리다 잎을 베어 먹고, 반대쪽에서는 배추흰나비와 남방노랑나비가 엉겅퀴, 란타나꽃 위를 날아다닌다. 배추흰나비보다 몸집이 크고 까만 색깔을 띠는 제비나비 한 마리도 존재감을 드러내며 날개를 팔랑인다. 생육 환경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나비가 완전히 자라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30일 정도다. 함평나비축제는 해마다 올해의 나비를 선정하는데, 이번에는 산호랑나비가 뽑혔다. 겉보기에는 호랑나비와 비슷해도 둘은 다르다. 산호랑나비의 날개를 살피면 호랑나비보다 노란 무늬가 더 많다. 무엇보다 뒷날개 부분에 붉은색, 푸른색 반점 무늬를 관찰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축제장을 누빌 여러 종의 나비는 함평농업기술센터에서 태어난다. 18년째 나비를 돌보는 삶을 살았다는 문지현 주임은 단순히 나비를 길러 내는 일뿐 아니라 먹이 식물까지 돌봐야 하기에 바쁜 나날을 보내는 중이라고 말한다. “진부하게 들릴지 몰라도 저에게는 나비가 자식처럼 소중하게 느껴져요. 올해는 곤충산업팀이 열심히 보살핀 나비 아홉 종을 축제에 선보일 예정입니다.” 21도에서 25도를 유지하는 온실 안, 조금만 움직여도 땀방울이 맺히는 환경이지만 나비를 설명할 때 그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걸린다.
자연에 한 걸음 더, 함평자연생태공원
함평이 나비만큼이나 관심을 갖는 분야가 난초다. 대동저수지 부근에 자리한 함평자연생태공원은 본래 난을 보호하고 가꾸는 목적으로 개장했다. 이후 나비·곤충을 전시와 연계해 확장했고, ‘하늘에는 나비와 잠자리, 땅에는 꽃과 난초, 물에는 수생식물과 물고기’를 주제로 공간을 꾸몄다. 멸종 위기에 놓여 야생에서는 보기 어려워진 풍란, 나도풍란, 지네발난 등이 자라는 풍란관을 시작으로 아열대식물관, 수생식물전시관 등 실내 전시관에서 특이한 식물을 발견한다. 생태연못, 대동저수지와 이어지는 생태녹지섬에서는 물속을 유영하는 물고기와 인사를 나눈다. 눈 닿는 곳마다 궁금한 생물이 가득하다.
꼭 둘러봐야 할 곳은 자연생태과학관이다. 곤충 표본을 전시하던 공간을 체험형 전시 공간으로 리모델링했는데, 관람자가 전시에 몰입하도록 AR(증강현실), 인터랙티브 미디어 등 첨단 기술을 활용했다. 가장 인기 있는 구간은 신비한 숲속 놀이터. 귀여운 애벌레 조형물과 미디어아트를 접목한 미끄럼틀, 사람의 움직임을 센서로 파악해 게임을 진행하는 AR 그래픽아트월 덕분에 바쁘게 몸을 움직여야 한다. 사방이 거울인 미디어아트 방, 꽃이 흩날리고 나비가 나는 가운데 시원하게 떨어지는 폭포를 뒤에 두고 사진도 찍는다.
2층은 한국에 사는 곤충의 생태를 계절별로 나누어 정리했다. 한옥에 줄을 치고 사는 거미, 강에 서식하는 물방개나 잠자리 등 눈에 익은 곤충 모형이 반갑다. 한쪽에는 벌레 우는 소리를 녹음해 자유롭게 감상하도록 했다. 헤드셋을 착용하고 눈을 감은 채 여름 참매미 소리, 가을 풀벌레 소리를 듣는다. 인간이 낼 수 없는 소리로 이루어진 노래가 감미롭기만 하다.
+ 제26회 함평나비대축제
나비의 고장 함평이 스물여섯 번째 나비 축제를 연다. 4월 26일부터 5월 6일까지 진행하는 축제는 ‘나비 찾아 떠나는 함평 여행’을 주제로 기획했다. 나비 날리기부터 나비 가면, 부채 만들기 등 체험 프로그램과 나비 콘서트, 나비 거리 퍼레이드 등 화려하고 신비로운 공연을 준비해 흥이 난다.
문의 061-320-2238
무지개가 보이는 바다에서
나무와 풀을 실컷 눈에 담았으니, 다른 풍경을 찾아 눈을 돌린다. 서해와 맞닿은 함평은 산, 바다를 모두 가졌다. 석두마을 근처에는 재치 있는 이름의 해수욕장이 자리한다. 마을 이름은 서쪽 끝에 있는 기암괴석 때문에 ‘석두’라고 했는데, 여기서 따온 단어를 순우리말로 풀어 돌머리해수욕장이 되었다. 이곳의 명물은 바다를 향해 길게 뻗은 갯벌 탐방로. 빨강부터 보라까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칠한 탐방로는 멀리서도 눈에 띈다. 405미터 길을 천천히 걸으면 짭조름한 바다 내음이 밀려온다. 저 멀리 앞서가는 흰 갈매기를 보며 김기림 시인의 ‘바다와 나비’를 떠올리다, 어느새 탐방로 끝에 다다른다. 맑은 하늘, 바람, 푸른 산과 바다를 품은 함평 이곳저곳을 꽃을 찾는 나비처럼 쉴 새 없이 돌아다녔다. 축제가 열리는 날, 세상에 나온 그들도 이 땅을 내려다보며 생각할 것 같다. 함평은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고장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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