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X 중앙선이 서울역까지 연장 운행한다는 반가운 소식에 열차표를 예매했다. 여행의 목적지로 점찍은 곳은 중앙선 종착역이 자리한 경북 안동이다. KTX-이음이 서울에서 안동에 이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2시간 30분 정도. 인간의 상상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과거 이토록 짧은 시간에 지역을 이동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이나 했을까.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억압과 탈취로 까맣게 칠해진 일제강점기, 시인 이육사는 ‘광야’에 이렇게 표현했다. 그의 시처럼 혹독한 추위가 들이닥쳐도 끝내 희망의 씨를 뿌렸던 이들이 있다.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기 전, 선조들이 남긴 자취를 찾아 나섰다.
도산서원
고요하고도 포근한 서원을 한참 동안 기웃거리며 돌아다니다가, 또 얼마간은 눈으로 쓸어 본다.
학문을 향한 꿈, 도산서원
앞은 물이 흐르고, 장엄한 산이 뒤를 지키는 배산임수의 명당. 서원은 그런 공간에 위치한다. 속세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자연을 벗으로 삼아 오직 학문과 정신 수양에 정진하는 환경을 만들기 위함이다. 안동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서원을 둘이나 보유했다. 그중 퇴계 이황의 숨결이 깃든 도산서원으로 간다. 길 오른편에 심은 향나무가 줄지어 길을 안내한다. 자박거리며 흙바닥을 밟고 나아가자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 새긴 비석이 도산서원에 온 이를 반긴다. 맹자와 공자의 고향이라는 뜻이다. 학문에 힘썼던 두 학자의 고향이라 칭할 만큼 도산서원은 이황의 정신을 이어받아 성리학을 끊임없이 연구했던 곳이다.
1501년 안동에서 태어난 이황은 생원시, 진사시를 거쳐 서른넷이 되던 해 과거에 급제해 정계에 발을 들인다. 승문원권지부정자로 벼슬을 시작해 요직을 두루 거치며 힘썼으나 사화로 정세가 어지러웠고, 학문에 뜻을 둔 그는 병을 구실로 여러 번 관직을 마다한다. 정치에서 손을 뗀 후 57세에 고향 안동에서 행한 것이 바로 도산서당을 짓는 일이었다. 터를 정했을 뿐 아니라 강의가 이루어지는 서당, 제자들이 머무는 기숙사인 농운정사 등을 손수 설계하기까지 했다.
늙은 왕버들 두 그루가 지키는 서원 입구, 뒤를 돌자 향나무길 너머 말간 안동호가 잔잔하다. 안동호 가운데 섬처럼 솟은 시사단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황이 갈고닦은 학문과 그의 정신을 높이 산 정조는 도산서원에서 특별 과거 시험인 ‘도산별시’를 열었는데, 시사단은 이를 기리기 위해 단을 쌓고 세운 기념비다. 아쉽게도 1976년 완공한 안동댐 때문에 수심이 깊어져 물이 빠지는 때에야 가까이서 볼 수 있다.
입구를 지나 도산서원으로 들어서자 고요하면서도 포근한 분위기가 감돈다. 빛바랜 목재가 아늑한 느낌을 주는 농운정사와 도산서당을 살피고, 후세가 이황 선생을 기리기 위해 지은 서원으로 향한다. 도산서원은 진도문을 기준으로 선생이 생전에 기거하며 후학을 길렀던 공간과 그를 기리는 배향 공간으로 나뉜다. 강학 공간으로 사용해 온 전교당에는 당대 명필가인 한석봉이 선조의 명을 받고 직접 쓴 현판이 걸렸다. 왕이 친히 편액을 내린 사액서원이니 당시에도 도산서원의 가치와 명성이 대단했으리라. 건물 구조, 현판, 배치까지 의미가 담기지 않은 것이 없다. 서원을 한참 동안 기웃거리며 돌아다니다가, 또 얼마간은 눈으로 쓸어 본다.
서당을 나서는 길. 양옆을 꾸민 모과나무와 매화나무가 들어온다. 아직 가지뿐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제 막 꽃봉오리가 올라오는 참이다. 퇴계 선생이 사랑해 마지않던 꽃이 매화라 한다. 선생의 매화 사랑은 대단했는데, 이를 증명하듯 도산서원 곳곳에서 매화나무를 볼 수 있다. 그가 사용했던 벼루나 의자에도 매화를 새겼을 정도다. 날이 온화해지면 매화나무는 어김없이 꽃봉오리를 피워 내 가장 먼저 봄을 알릴 것이다. 마침 도산서원에도 따사로운 햇살이 든다.
날이 온화해지면 매화는 꽃봉오리를 피워 내 봄을 알릴 것이다. 도산서원에도 따사로운 햇살이 든다.
오미마을
스물네 개의 빛이 머무른 마을
안동에는 예부터 자리를 지켜 온 양반가 집성촌이 군데군데 자리한다. 풍산읍 오미마을 역시 조선 시대부터 풍산 김씨 집성촌으로 이름 높았다. 마을이 배출한 인재 또한 여럿이다. 1630년, 김대현의 여덟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고 그중 다섯은 대과를 통과하는 괄목할 만한 일이 벌어지자 인조가 ‘팔연오계지미(八蓮五桂之美)’라 하며 크게 칭찬했고, ‘오미’라는 마을 이름을 내린다. 조선 시대는 물론, 일제강점기에 오미마을은 더욱 빛을 발한다. 김재봉, 김지섭, 김응섭 등 무려 스물네 명의 독립투사가 이곳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이다.
호젓한 마을에는 허백당 종택, 풍산 김씨 영감댁을 포함해 네 채의 고택이 자리한다. 고택끼리 멀리 떨어지지 않아 20분 정도면 충분히 둘러본다. 눈여겨 살필 곳은 마을회관 맞은편의 학암고택. 독립운동가 김재봉 선생의 생가다.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지만 여전히 단아한 멋이 느껴진다. 마당을 어슬렁거리던 중, 한 마을 주민이 학암고택에서 특이한 점을 발견하지 않았는지 묻는다. “자세히 보세요. 위로 솟은 굴뚝이 하나도 없을 거예요. 밥 짓는 연기가 마을에 퍼지는 것을 염려해 굴뚝을 밑으로 냈어요. 작은 것이라도 과시하지 않으려는 선비의 미덕이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풀 한 포기도 긍휼히 여기는 선비가 동고동락하는 마을 사람을 어찌 외면할까. 누군가가 숨겨 둔 따뜻한 비밀을 발견한 것만 같다.
키보다 조금 높은 담장이 이어지는 길을 따라 언덕을 오른다. 아래에서 희끗하던 구조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하늘로 솟은 검은 탑에 ‘오미광복운동기념탑’이라 새겼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이곳은 오미마을 출신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오미광복운동기념공원이다. 풍산 김씨 문중에서는 2008년 작은 동산에 기념탑과 정자를 세우고, 후손에게 전할 타임캡슐을 탑 아래에 묻었다. 캡슐에는 풍산 김씨 세보와 마을 관련 서적, 사진, 오곡 종자 등을 담아 500년 뒤인 2508년 열어보도록 했다.
탑을 둘러싼 석각에도 빼곡하게 글씨가 들어찼다. 찬찬히 내용을 읽는다. 나라를 빼앗긴 후 만주로 망명한 일부터 1919년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분, 항일 교육에 앞장선 분…. 각자 다양한 항일 활동을 펼쳤으나, 설명 끝자락에는 대부분 같은 문구가 쓰였다.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름.” 아, 무언가 철렁 내려앉는다. 눈으로 읽기만 했을 뿐인데 가슴 한구석이 시리다. 자유로운 조국을 되찾기 위해 목숨 걸고 마을을 떠나야만 했던 이들을 생각한다. 감히 그들의 심정도 헤아리지 못한 채, 마음만 먹먹해진다.
임청각
여기 독립에 생을 다 바친 안동인이 또 있다. 이상룡 선생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기 전부터 의병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인물이다. 선생을 포함해 그의 일가족, 나아가 후손까지도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내놓았으니 집안 전체가 나라에 헌신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11년, 선생은 식솔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한다. 이후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될 자치 기구 경학사를 조직하고 신흥무관학교의 초석인 신흥강습소를 세우거나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내는 등 굵직한 업적을 이뤄 낸다. 일제는 나라를 되찾기 위해 여러 가지 방편을 도모하는 그를 눈엣가시로 여겼고, ‘이상룡 집안의 맥을 끊어야 한다’라는 비인간적인 이유로 생가 임청각을 관통해 중앙선 철길을 건설한다. 이때 행랑채 등을 철거하며 ‘99칸 집’이라 불릴 정도로 거대한 규모의 가옥이 절반 이상 훼손된다. 뼈아프고 절망스러운 일이다.
다행히 안동시가 2021년 12월부터 본격적인 복원 작업에 착수했다. 철길을 뜯어내 길을 정비하고 임청각 내부 역시 복구에 박차를 가하는 상황이다. “복원이 끝난 후 방문자가 경험할 다양한 체험을 구상했습니다. 독립운동가의 밥상을 상상하고 직접 맛보는 체험, 등불을 만들어 어둠이 내린 임청각을 산책하는 체험 등을 준비 중이죠.” 문화유산 보호 시민 단체인 안동문화지킴이 김호태 이사장이 말을 마치고 한편에 꾸민 ‘임청각 작은 전시관’으로 안내한다. 선생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아 안타까운 마음에 시민 단체가 석주 이상룡 선생의 일생과 그의 업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은 것이다. “전시를 천천히 감상한 후에 오른편 계단으로 올라오세요. 기와지붕이 ‘ㅁ’ 자 형태로 놓여 그 사이로 비치는 풍경이 아름답습니다.” 사방이 둘러싸여 안락함이 느껴지는 공간. 누군가는 이 자리에서 간절한 소원을 하늘에 올려 보냈겠다. 새하얀 구름이 지붕 위를 떠간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건네받은 불씨,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안동 곳곳에서 모은 역사의 조각을 가지고 여정을 마무리할 장소로 간다. 펄럭이는 태극기를 든 남자현 선생 동상 뒤로 한옥의 건축 요소를 활용한 기념관이 예스럽다. 안으로 들어서자 차분한 분위기의 전시관이 정신을 가다듬게 한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은 크게 경상북도 독립운동을 개괄적으로 다룬 독립관, 안동 전통 마을의 항일 투쟁에 초점을 맞춘 의열관으로 나뉜다.
전시 1관인 독립관부터 둘러본다. 1894년 경복궁을 침입한 일본군에 반발해 봉기한 갑오의병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경상북도 지역에서 일어난 독립운동과 투사의 이름을 상세히 소개했다. 의병 항쟁, 목숨으로 항거한 자정 순국, 의열 투쟁, 6·10만세운동, 여성 독립 열사…. 유물과 기록이 말해 주는 51년간의 싸움에 절로 숙연해진다. 일제가 자행한 고문 중 하나인 벽관 고문 체험 공간 앞에서 멈춰 선다. 옴짝달싹 못 한 채 끔찍한 고통을 경험했을 이름 모를 사람들. 전시관에 재현한 벽관은 실제보다 더 크게 제작했다는 사실에 말을 잃는다. 침묵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와서다.
이어지는 전시는 실감형 콘텐츠, 애니메이션 영상 등을 배치해 관람객이 집중력을 잃지 않고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도록 했다. 독립관의 백미는 벽 한쪽을 차지하는 거대한 스크린에 재생하는 미디어아트다. 스크린이 잘 보이는 의자에 앉아 영상을 감상한다. 이상룡 선생이 임청각을 등지고 만주로 망명해 경학사, 백서농장, 신흥강습소 등을 세우는 과정을 극적으로 표현했다. 흑백으로 표현한 그들의 행보가 처절하고 숭고해 한동안 여운을 곱씹는다.
관람을 마친 후 전시관을 나가는 길, 어두운 공간에 발을 들이자 차례로 바닥에 불이 들어오며 문장이 하나씩 나타난다. “내 나라 찾으려 목숨 걸고 나선 길/ 내 겨레 살리려 견뎌낸 날들/ 이제 그 불씨를 넘겨드리오니/ 가슴에 가득 담아/ 새 길을 열어 가소서!” 걸음마다 떠오르는 뜨거운 문장을 눈으로 하나씩 주워 담는다. 항상 들여다보지는 못 해도 그들이 넘긴 소중한 불씨는 언제까지나 마음속 어느 곳에서 꺼지지 않은 채 타오르고 있을 것이다.
눈이 녹는다. 오래전 누군가 뿌리고 간 씨앗이 자유로운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운다. 1945년 8월, 빛을 되찾기 전까지 수많은 이가 간절히 원했을 봄. 머지않아 그 봄이 곧 안동을 따사롭게 품을 것이다.
그들이 넘긴 소중한 불씨는 언제까지나 마음속 어느 곳에서 타오르고 있을 것이다.
Embracing Spring in Andong
I traced the history of the Korean spirit in Andong,
spanning from the Joseon era through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o the present.
Dosan-seowon: The Pursuit of Knowledge
Ahead, a river flows, and majestic mountains guard the rear, creating a picturesque setting for Dosan-seowon Confucian Academy, a revered place associated with the profound teachings of the scholar Yi Hwang. Typically, such academies are situated in spaces untouched by worldly temptations, dedicated solely to the pursuit of learning and spiritual cultivation. Andong is fortunate to house not one but two such academies, with Dosan-seowon Confucian Academy being attributed to the influence of Yi Hwang, a philosopher and scholar.
Upon entering the academy, you will be enveloped by a serene yet warm atmosphere. The Jindomun Gate separates the area where Yi Hwang nurtured his disciples and the area dedicated to commemorating him through ritual ceremonies. The royal charter bestowed by the king underscores the immense value and reputation that Dosan-seowon Confucian Academy held even back in the days.
A Village of 24 Heroes
In Andong, Omi Village was the clan village of the Pungsan Kim family during the Joseon Dynasty. The village has produced numerous talented individuals throughout its history. In 1630, when all eight sons of Kim Dae-hyeon passed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King Injo praised this achievement, and bestowed the name “Omi” upon the village.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Omi Village shone even brighter, as 24 independence fighters were born and raised here.
Within this tranquil village, four traditional houses, including Heobaekdang Head House and the Pungsan Kim clan’s house, stand proudly. Notable among these is Hagam House, located across from the village community hall. It was the birthplace of Kim Jae-bong, who actively participated in the independence movement based on socialist principles. As I strolled around, a local approached and asked if I had noticed anything peculiar about the house. “Take a closer look. You won’t find a single chimney sticking up. They lowered the smokeholes to the ground, so when the cooking smoke rises, it won’t make the villagers hungry. It’s the nobility’s consideration for the common people.”
The Spark of Freedom
With fragments of history gathered from all around Andong, I head to the last place on my itinerary. Behind the statue of independence activist Nam Ja-hyeon is the Gyeongsangbuk-do Independence Movement Memorial.
I start by exploring the Independence Hall. From the Gabo Reform in 1894, sparked by the invasion of the Japanese army into Gyeongbokgung Palace, to the liberation in 1945, the exhibition introduces independence movements and patriots in the region. The artifacts, records, and more speak volumes about the 51-year-long struggle.
As I head out of the exhibition hall, I feel a spark burning somewhere deep within. The seeds sown by our ancestors have taken root and flourished over the years. As we eagerly await the arrival of spring, Andong is poised to embrace warmth once again.
안동에서 여기도 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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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길거리 한국문화테마파크
16세기 조선 시대로 여행을 떠난다. 이곳은 유교 문화와 조선 시대 역사를 주제로 꾸민 테마파크다. 공원 안에 세운 가상의 마을 ‘산성마을’은 성곽길, 군영, 저잣거리 등을 조성해 볼거리와 체험 프로그램이 가득하다. 3D 영상으로 수성 전투 게임을 즐기는 의병체험관, 전통 한복을 입고 인생 사진을 남기는 선비숙녀변신방, 비격진천뢰를 조립해 갇힌 방에서 벗어나는 폭탄탈출방 덕에 아이는 물론 어른도 흥미진진해 한다. 산대극장, 설화극장 등에서 다양한 공연 프로그램도 감상한다.
문의 054-857-9916 -
즐길거리 명인안동소주
반남 박씨의 가양주로 500년 전통을 이어 온 명인안동소주를 맛본다. 25대손 박재서 명인은 불이 직접 닿지 않도록 하는 중탕식 증류로 소주를 빚는다. 증류한 술을 100일 이상 숙성시켜 쌀 특유의 탄내가 없고 은은한 향이 나는 것이 특징이다. 안동소주는 본래 알코올 도수 45도지만, 최근 누구나 쉽게 맛보도록 35도‧22도‧19도 등 다양한 도수의 소주를 생산한다. 양조장에서는 소주 시음과 안동소주를 이용한 칵테일 만들기, 막걸리 빚기, 누룩 발효 음료 만들기 등 체험도 가능하다.
문의 054-856-6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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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거리 메밀꽃피면
‘미오기집밥’을 마주하는 순간, 상다리가 부러진다는 관용구가 절로 생각난다. 이미옥 대표의 이름에서 딴 메뉴는 특제 양념을 바른 황태구이를 중심으로 강황밥, 캐슈너트 미역국, 육전, 각종 제철 나물과 과일 등으로 구성했다. 상차림 전 제공하는 식전 빵부터 디저트인 강정까지 모든 음식은 직접 요리한다. 두릅‧명이나물‧가죽나물 등은 일월산에서 채취했고, 쌀과 배추는 가족이 농사지어 수확한 것만 사용하니 상에 올라온 음식은 보약 그 자체다. 쫄깃한 메밀국수도 ‘메밀꽃피면’의 스테디셀러다.
문의 054-843-1253 -
먹거리 카페서원
도산서원을 방문하는 여행자의 목을 축여 줄 다정한 한옥 카페다. 50년 넘은 한옥에서 향긋한 커피를 마신다. 메뉴판에서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서원라테’. 언뜻 보기에는 일반 라테와 다르지 않지만, 한 모금 맛보면 밀려드는 고소함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라테에 시럽과 크림을 올린 메뉴인데, 주인장이 캐러멜‧바닐라‧아몬드 시럽을 잘 배합해 풍미를 끌어올렸다. 커피를 마시지 못하는 이에게는 경북 문경에서 공수한 오미자를 넣은 오미자에이드나 직접 달인 대추고로 진한 맛을 낸 대추차를 추천한다.
문의 0507-1379-5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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