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여명기, 인류는 비로소 옷을 지어 입는다. 옷의 기원은 허리에 단출한 띠를 두른 형태인데, 이를 완성하는 요소가 바로 매듭이다. “유의, 또는 띠옷이라 부르는 최초의 옷은 몸을 보호하거나 무언가를 몸에 지니기 위해 탄생했어요. 옷이 제 기능을 하려면 질긴 넝쿨 같은 끈으로 동여매야 했으니, 매듭은 결정적 발명이라 할 만하죠.” 올해 나이 여든, 삶을 매듭에 바친 국가무형유산 매듭장 김혜순이 끈틀 앞에서 몸을 바로 세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매듭은 이 세상에 아니 쓰인 곳이 없답니다.”
무궁무진, 매듭의 세계
그의 말은 과장이 아니다. 지역이나 문화는 달라도 매듭이란 개념은 전 지구상에 존재해 왔다. 실용성에서 비롯한 초기 매듭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장식성을 띤 예술로 발전했다. 때론 권력자의 위세를 드높이고 때론 신성성을 증폭하는 도구로 진화하면서 화려한 모습을 갖추어 갔다. 국보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가만히 들여다본 적 있다면 허리띠 양 옆으로 늘어뜨린 광다회, 즉 넓게 짠 끈목을 얼마나 섬세하게 묘사했는지 기억할 것이다. 바람결에 흩날리듯 드리운 술 장식 또한. 그뿐인가. 백제금동대향로와 <악학궤범>에 드러난 국악기 유소, 청자 상감 보자기 무늬 매병의 네 귀퉁이에 새긴 매듭, 신윤복의 ‘미인도’ 속 여인이 옷고름에 장식한 노리개는 또 어떠한가. 무수한 유물이 한국 전통 매듭의 아름다움을 증거한다.
입에서 입으로, 손끝에서 손끝으로 이어진 매듭 문화는 조선 시대에 이르러 꽃을 피운다. 궁궐과 양반가에서 매듭은 노리개·허리끈·주머니 등 의복의 부속 요소를 갖추는 데 긴요하게 쓰였고, 가마·상여·깃발 등 의례에 엄숙함을 더하는 도구로 활용됐다. 사용 범위가 차츰 넓어진 매듭은 보통 사람들의 생활 곳곳에 스며들어 빠르게 대중화됐다. 이 시기 법전 <대전회통>은 실 여러 가닥을 한데 짜 끈목을 완성하는 장인을 다회장(多繪匠), 이 끈목으로 매듭을 맺고 술을 만드는 장인을 매집장(每緝匠)이라 기록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잠시 명맥이 끊긴 매듭 전통은 황해도 해주 출신의 한 여성이 기적적으로 수습, 현대로 전승한다. 그의 이름은 김희진. 상여 장식의 오묘한 결구에 마음을 빼앗겨 매듭에 투신한 김희진은 국가무형유산 매듭장 명예보유자이자 1979년 한국매듭연구회를 설립하고 초대 회장을 지낸 인물이다. 그가 1963년부터 전국 방방곡곡의 장인에게서 매듭의 기본형, 끈목 짜는 법, 술 제작하는 법을 익혀 정리한 <매집과 다회> <한국매듭>은 매듭의 정전 그 자체다.
김혜순은 김희진이 운명처럼 만난 후계자다. 대학에서 섬유공예를 전공하고 한때 자수 도안 그리는 일을 했던 그는 남편의 누님인 김희진과 한 지붕 아래 살면서 자연히 매듭의 미감에 스며든다. 훗날 김희진은 김혜순의 전시 축사에 이렇게 쓴다. “명주실 만지는 손끝이 익숙한 걸 보는 순간 반가웠다.” 이에 김혜순은 자신의 전시가 김희진의 이재 초상화 오색조대 재현 작품에서 착안했음을 밝히며 “선생님은 유물로도 남지 않은 조선 시대 장인들의 솜씨를 그림 속에서 찾고자 하였습니다”라고 존경을 담아 호응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믿음직스러운 조언자이자 조력자였다.
“선생님은 작품에 대해 이야기 나누기를 즐기셨어요. 모든 과정에서 최선을 다해 보석 같은 매듭을 맺어야 한다고 강조하시기도 했죠. 매듭을 매개로 문화계의 존경스러운 여러 스승, 제자와 오랜 세월 동안 인연을 맺었네요. 제 인생엔 수많은 매듭이 있습니다. 그 매듭은 인연입니다.”
매듭을 닮은 인생
한국 매듭 전통을 집대성한 스승에 이어 김혜순은 계승과 전수, 나아가 현대화를 시도한다. “매듭을 만난 뒤 제 작품 세계가 한층 넓어졌어요. 특히 자수와 매듭을 접목해 회화적으로 표현하는 실험적인 작업을 꾸준히 해 왔죠. 전통과 전승을 우선 과제로 여겼던 스승께서도 다음 세대와 교감하는 새로운 작품을 선보여야 한다는 의지에 공감해 주셨고, 말년에는 몸소 현대적인 작품을 제작하셨어요.” 대가의 신념마저 동화한 김혜순의 작품은 실과 색으로 일군 환상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꽃을 모티프로 몽환적인 풍경을 연출한 <연(蓮)> 연작을 비롯, 전통 회화를 추상적인 감각으로 표현한 그의 여러 작품은 매듭의 또 다른 조형적 가능성을 활짝 열어 젖혔다.
최근 몇 년 사이에는 김혜순의 작품 세계를 확장하는 굵직한 사건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방송 출연이다. TV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 진행자 유재석의 ‘부캐’ 유야호가 김혜순의 매듭을 머리에 장식하고 등장한 것. “유야호라는 캐릭터가 처음 나올 때 태극선 선추로 머리 장식을 한 걸 보고 몇몇 시청자가 왜 저렴한 매듭을 달았느냐며 비판적인 의견을 주었다고 해요. 이후 제작진이 제게 의뢰해 몇 가지 기본 매듭을 제작했어요.” 결과물은 단순해 보여도 공정이 단순하지는 않았다. 실을 끈목으로 짜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하니 시간도 적잖이 걸렸다. “그저 바른 매듭을 널리 알려야겠다는 책임감에서 시작한 일이라 묵묵히 고생을 감수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보람을 얻었어요.” 김혜순의 매듭은 그 후에도 몇 차례에 걸쳐 출연자의 장신구와 무대 장식으로 모습을 비쳤다. 조화롭고 기품 어린 매듭의 모습에 자연히 큰 호응이 일었다.
알고 보면 매듭은 짜고 맺는 모든 과정이 예술이다. 이 사실을 발견한 눈 밝은 이들이 매듭 제작 공정을 무대에 올려 무용극을 완성했다. <생각하는 손-흙과 실의 춤>이란 제목부터 절묘하다. 국립무형유산원에서 제작한 이 작품은 매듭장 김혜순과 사기장 김정옥의 손놀림을 현대무용과 사운드, 시각예술로 한데 조합한다. 바지런하게 움직이는 장인의 손, 끈틀에 달린 토짝이 달랑거리며 서로 부딪는 소리, 분위기를 고조하는 무용수의 유려한 춤사위가 어우러져 시적인 감흥을 자아낸다. “전통 작품을 그대로 재현하는 일만 했다면 반복적인 작업에 어려움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어요. 깨치며 나아가려는 성향 덕분에 지금껏 지치지 않고 이 일을 하는가 봅니다.”
그는 여전히 서울 삼성동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에서 주 3회 매듭을 가르치며 제자를 양성한다. 후학을 배출한 지도 20년이 훌쩍 넘었다. 김혜순에게 매듭을 배운 이 중 하나는 한국매듭연구회 부회장인 김시재 매듭장 이수자다. 그도 남편의 어머니인 김혜순을 통해 매듭을 삶으로 받아들였다. 김혜순과 김희진의 우연한 만남처럼. “연봉매듭, 생쪽매듭, 국화매듭, 병아리매듭, 나비매듭, 매미매듭···. 38종의 한국 매듭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대부분 모양이 자연에서 왔어요. 소원 성취를 바라는 마음, 사랑이 커지길 바라는 마음, 복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만든 거죠. 규방 공예란, 또 매듭이란 누군가를 위한 염원이자 기도라고 생각해요.” 이토록 다정하고도 위대한 규방 공예의 내력, 여성 장인의 역사가 이 순간에도 매듭처럼 거듭하고 있다.
매듭의 형태는 코, 몸, 손의 세 가지 요소로 분절된다. 코는 옷고름의 코처럼 부드러움과 여유를 나타낸다.
그러나 몸은 가닥을 결합시키고 묶음으로써 매듭의 강함을 나타낸다.
손은 아무리 복잡하게 맺어진 것이라 해도 다시 풀 수 있는 열쇠를 간직하고 있다. … (중략) …
매듭은 끈의 문화로 상징되는 한국인의 마음을 시각화한 것이다.
–이어령, <우리 문화 박물지>
+ <조선비쥬얼>
‘용모 단정 의관 정제’를 목숨처럼 여긴 조선 시대 선비의 장신구를 한데 모아 소개하는 전시로, 김혜순의 작품을 눈앞에서 만나는 기회다. 조선 시대 초상화에 드러난 허리띠를 온전하게 재현한 매듭장의 관찰력과 집념, 빼어난 솜씨를 엿본다. 그 외에도 능창대군과 영친왕의 망건, 구슬 갓끈, 귀걸이, 선추 등 과거 선인들이 어떤 방식으로 멋을 부렸는지 짐작하게 하는 흥미로운 유물을 한자리에서 살필 수 있다.
기간 2월 25일까지
문의 031-579-6000(경기도 남양주 실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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