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영화, 다시 영화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네 개의 오스카 트로피를 들어 올린 2020년 2월 당시만 해도 바이러스가 영화 산업의 가장 큰 적이 될 거라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유례없는 팬데믹 기간 동안 사회적 거리 두기를 명목으로 영화관은 거의 운영 중단 상태였고, 관객들은 자연히 스크린에서 한 발짝 물러났다. 그사이 전 세계가 인플레이션의 늪에 빠졌다. OTT 플랫폼 구독은 급등한 영화 관람료를 감당하는 일보다 훨씬 저렴하면서도 간단한 해결책으로 여겨졌으며, 스크린에 걸려야 할 영화들이 일제히 ‘방구석 1열’ 앞에서 상영됐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길고 긴 터널 같은 시간이 흘렀다.
영화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영화를 사랑하는가. 예기치 못한 영화의 암흑기, 영화 창작자들은 이 근본적인 질문에서 다시 출발하기로 한다. 우리 시대의 영화감독으로 꼽히는 이들이 영화에 대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스티븐 스필버그부터 데이미언 셔젤에 이르는 시네아스트가 거의 비슷한 시기 저마다의 작품에 영화를 담았다. 본래 영화란 어둠을 빛으로 바꾸는 예술이니, 이즈음 자기 반영적 영화의 동시다발적 출현은 우연이 아닌 필연, 차라리 하나의 현상이라 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다시 영화를 이야기하는 영화를 이야기한다. 물론 영화를 다룬다고 해서 다 같은 영화는 아니다. 이를테면 <시네마 천국>이 그러했듯 영화에 대한 짙은 향수를 자극한다거나, ‘영화에 대한 영화’의 교과서라 할 만한 <8과 2분의 1>처럼 꿈과 환상과 영화를 중첩한다든가, 칸 국제영화제 60주년을 기념해 서른다섯 명의 감독이 만든 옴니버스 영화 <그들 각자의 영화관>과 마찬가지로 영화를 향한 사랑을 열렬히 고백하는 각양각색, 다종다양한 작품을 모았다. 영화의, 영화에 의한, 영화를 위한 영화 여덟 편이 바로 지금 펼쳐진다.
나 어렸을 적에
인생 첫 영화, 첫 영화관을 기억하는지. 생애 처음 영화 관람을 앞둔 소년 새미 파벨만스는 어둠 속에서 스크린을 직면해야 한다는 사실에 막연한 두려움을 느낀다. 이때 피아니스트인 엄마 미시는 남다른 감수성에 기대어 아이의 마음을 누그러뜨린다.
“영화는 꿈이란다. 잊히지 않는 꿈.” 눈을 반짝이는 엄마의 말에 상영관으로 들어선 새미는 곧 영화라는 마법에 사로잡힌다. 이 여린 소년의 모습에 포개지는 얼굴은 다름 아닌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다. <파벨만스>는 그가 영화와 조우한 순간부터 거장 존 포드 감독을 우연히 맞닥뜨린 청년 시절까지, 오랜 세월 마음에 품어 온 자신의 영화적 성장담을 지극히 순수하고 겸허한 태도로 풀어 낸다.
스페인의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도 <페인 앤 글로리>에서 꿈 많았던 과거와 영화감독이 된 현재를 투사했다. “내 어린 시절의 영화란 암모니아 냄새와 재스민 향기, 한여름의 산들바람이었다.” 약물 의존으로 고통받는 노쇠한 영화감독 살바도르는 뜻하지 않은 우연과 만남 속에서 유년의 기억을 건져 올린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아이에게 “넌 몽상가구나”라고 말해 주던 엄마,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과 미적 감흥을 일깨운 청년 에두아르도를 회고하며 새로운 영감을 얻게 된 살바도르는 끝내 “영화를 못 찍는다면 내 인생은 의미가 없”다는 절실한 결론에 다다른다.
창작자, 길을 잃다
스필버그는 <파벨만스>를 빌려 “영화는 꿈”이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감독이 악몽과 환상과 허구적 상상에 시달리며 신경쇠약을 호소한다.
<거미집>의 주인공 김 감독 또한 작업 중인 새 영화에 대한 꿈을 되풀이해 꾼다. 꿈을 그대로 옮겨 결말을 바꿀 수만 있다면 영화사에 남을 걸작이 되리라는 예감에 사로잡힌다. 제작사로부터 허락받은 재촬영 시간은 단 이틀. 갑자기 불려 온 제작진과 배우들은 김 감독이 착안한 파격적 결말에 궁시렁거린다. 아수라장이 된 촬영장에서 김 감독은 기이한 예지몽을 꾸고, 상황은 점입가경으로 흘러간다.
<이마 베프>의 주인공 르네 비달 역시 비슷한 사정에 놓인다. 그는 고전 영화 <뱀파이어>를 리메이크하는 프로젝트에 홍콩 최고 스타 매기(매기는 배우 장만옥의 영어 이름으로, 그는 자기 자신을 연기한 셈이다)를 주인공 무시도라 역으로 섭외하면서 야심 찬 시도를 하지만, 일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촬영장에서 벗어나 잠적하는 등 기행을 저지르던 르네는 결국 감독 자리를 빼앗긴다. 낯선 도시에 홀로 남겨진 매기도 방황하기는 마찬가지.
영화의 대단원에 이르면 르네가 미완으로 남긴 편집본이 흐르기 시작한다. 흑백의 스카이라인, 매기의 매혹적인 몸놀림, 섬광 같은 이펙트가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아사야스 감독은 이 작품을 2022년에 드라마화해 또 한 번 길 잃은 예술가의 초상을 완성했다.
우당탕탕 영화판
스타. 말 그대로 별처럼 멀지만 환하게 빛나는 존재. 스크린에 드리운 매력적인 스타 배우의 얼굴은 예나 지금이나 관객을 영화관으로 불러 모으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도맡는다. 재능을 타고 난 배우들은 화려한 삶과 권력과 부를 누리지만, 그만큼 다양한 유혹과 위협에 노출된다.
<헤일, 시저!>는 동명의 영화를 촬영하던 당대 최고 스타 배우 베어드 휘트록이 공산주의자 단체에 납치당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주연배우가 사라지면서 뜻밖의 난관에 맞닥뜨린 영화사 대표 에디 매닉스는 기지를 발휘해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 1950년대 할리우드 풍경을 묘사한 이 영화는 <벤허> <설리반의 여행> <백만 달러 인어> 등 당대의 영화를 경유하고 실존 인물을 모델 삼아 입체감을 더했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는 이보다 본격적으로 실화를 파고든 영화다. 한때 인기를 구가하던 왕년의 액션 스타 릭 달튼과 그의 스턴트 배우 클리프 부스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 노력하던 중, 떠오르는 신예 배우 샤론 테이트가 그들의 옆집에 이사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샤론 테이트란 이름에서 짐작하겠지만, 1969년에 벌어진 실제 사건을 소재로 가져온 작품이다. TV 시리즈와 액션극 열풍, 반문화 등 시대상이 1960년대 할리우드와 결부하는 과정을 좇던 영화는 대단원에 이르러 통쾌한 대체 역사를 제시한다.
무성영화 vs. 유성영화
1927년 최초로 유성 장편영화 <재즈 싱어>가 출현하면서 영화계는 고민에 빠졌다. “과연 관객이 배우의 목소리를 원할까?” 보수적인 제작자들의 예측과 달리 유성영화 도입은 여느 신기술처럼 급속도로 이뤄졌다. 배우에게 풍부한 표정 연기와 몸놀림만을 요구했던 무성영화와 달리 유성영화는 듣기 좋은 음성과 명확한 발성, 무엇보다 자연스러운 표현력까지 필요로 했다.
황금빛 고대 도시 바빌론에 할리우드를 빗댄 <바빌론>은 바로 이 시기의 풍경을 포착한다. 눈물 한 방울까지 자유자재로 흘릴 수 있는 빼어난 연기력의 소유자 넬리 라로이는 무성영화 시대의 스타로 떠오르지만, 목청이 그리 좋지 못할 뿐 아니라 심리 상태도 온전하지 않았던 가련한 배우가 유성영화라는 급물살에 적응하기는 쉽지 않았다. 방황하는 넬리를 정서적으로 붙들어 준 동료이자 연인 매니도 끝내 그의 기구한 운명을 거스르지 못한 채 할리우드를 영영 떠난다.
<사랑은 비를 타고>는 동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정반대 상황을 전개한다.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안착한 당대 최고 스타 돈 록우드는 괴상한 목소리의 소유자인 동료 인기 배우 리나를 제쳐 두고 안무와 가창이 훌륭한 무명 배우 캐시의 가능성을 알아본다. 연인이 된 돈과 캐시는 친구 코스모와 의기투합해 개봉이 미뤄진 영화를 뮤지컬 영화로 각색, 큰 성공을 거둔다. 사랑의 기쁨이 춤과 노래를 타고 흘러 영화라는 마법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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