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리’라는 지명이 남은 몇 안 되는 곳 청량리역은 언제나 북적북적하다. 1899년 5월, 최초의 기차인 경인선보다 먼저 전차 노선이 개통했으니 120년 넘는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이가 역과 광장 일대를 오갔을까. 비극적인 을미사변이 벌어지고 고종 황제는 명성황후의 능을 이 근처에 조성했고, 홍릉에 행차할 때 이용하려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에 전차를 운행한다. 대규모 인원이 움직이기에 전차가 유용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노선이 생긴 이유인 홍릉은 고종 사후 남양주로 옮겨졌지만, 청량리역은 중앙선·경춘선이 놓이며 교통의 중심으로 자리 잡는다. 무엇보다 이 역은 청춘의 상징이기도 했다. MT 가는 대학생, 난생처음 보호자 없이 혼자 혹은 친구와 동해를 보러 떠나는 청춘들이 청량리역에 모였다. 통기타의 추억이 옛이야기가 된 지금도 KTX-이음, ITX-청춘, ITX-마음 등 다양한 열차가 대한민국 곳곳으로 연결하는 역에는 여전히 분주함과 설렘이 교차한다. 서울 동북권의 교통 요지 청량리역에서 오늘의 여행을 시작한다. 목적지는 조선 20대 임금 경종의 능인 의릉이다. 역과 불과 4킬로미터 거리에 이토록 중요한 사적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있다.
예우와 평안의 공간, 왕릉
복잡한 주택가와 고만고만한 길을 지나 문득 의릉이 나타난다. 초록의 고요한 능역 앞에서 세상의 번잡함이 일순 사그라지는 기분이다. 하늘이 숨겼다는 의미의 천장산 자락에 기대어 누운 왕은 경종이다. 숙종과 희빈 장씨의 아들로 태어나 서른두 살에 등극했으나 재위 4년 만인 1724년 세상을 떠났다. 효와 충을 최고 가치로 삼은 조선에서 왕의 장례가 오죽 엄숙하고 까다로웠으랴. <국조오례의>는 약 30개월간 60여 가지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기록했다. 왕릉 자리 선정부터 공사, 안치만 해도 5개월 정도가 걸렸다. 능 위치나 주변에 배치하는 석물, 부장물까지 규정을 철저히 지켜 500년 넘는 역사를 지닌 조선 모든 임금의 능이 일정한 형태로 잘 관리되었고, 유네스코도 이를 인정해 세계유산에 등재했다.
홍살문 앞에 서자 정자각이 들어온다. 능은 아직이다. 조선 시대엔 왕을 마주 대하는 일을 금기시했고, 능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일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제를 올리는 정자각 건물을 활용해 능을 절묘하게 가렸다. 박석을 깐 참도의 왼쪽은 혼령이 다니는 신도, 오른쪽은 왕이 걸은 어도다. 참도가 중간에 90도로 꺾이는 이유 역시 능을 향하는 시선을 차단하려는 의도다.
정자각에서 고개를 낮추어야 비로소 맞은편 문을 통해 능이 들어온다. 경종과 그의 계비 선의왕후의 능이 앞뒤로 나란히 있다. 지형을 읽고 풍수지리를 고려하여 조성했다 한다. 정자각을 나와 능 아래를 천천히 산책한다. 담소를 나누는 노부부, 나뭇잎과 곤충을 신나게 관찰하는 아이가 지나간다. 신분제도가 사라졌음을 새삼 실감한다.
능을 지키라고 호랑이와 양, 문인과 무인을 돌로 만들어 빙 둘러놓았는데, 오랜 세월 비바람에도 300년 전 조상이 조각한 손길이 남아 있다. 무석인의 갑옷, 석호의 표정, 석마가 디딘 땅의 풀. 가신 이를 극진히 예우하는 마음으로 새겼을 석물 하나하나가 정답다. 한때 높이가 3미터에 이르렀던 문석인과 무석인은 숙종의 명으로 작아졌다. 고생하는 백성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능의 규모와 석물 크기가 잘 어우러진다. 뒤편엔 해발 140미터 천장산. 길지를 고르고 골라 조성했을 능에 가을볕이 드리운다. 양지바른 길지의 초록은 먼저 가신 왕뿐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에게도 휴식을 선사한다.
누구든 일상을 벗어나 존재를 사유할 여백의 시간이 필요하다. 흙으로 돌아간 왕이 누운 땅, 능과 숲이 어우러진 왕릉이 그 여백을 내준다. 마침 걷기도, 생각하기도 좋은 계절이다.
뼈아픈 역사까지 품어 안은 숲과 역사문화관
모든 왕릉에는 숲이 있다. 자연을 사랑하고 그 안에서 도를 찾은 선인이 선왕을 추모해 꾸린 안식의 자리에 숲은 필수였다. 그 덕분에 후손은 조선 어느 왕릉을 가든 그윽한 공기를 누린다. 능을 감싼 숲에 든다. 소나무, 오리나무, 산딸나무 등 다양한 나무 사이로 언뜻언뜻 능의 고운 선이 드러났다 가려졌다 한다. 자연은 누구보다 계절에 예민해, 흙 속에 누운 왕도 이 가을을 완상하겠다.
차분함과 생기 어린 발랄함이 공존하는 숲길을 몇 분 걷는데 이질적인 건물이 등장한다. 놀랍게도 옛 중앙정보부 강당이다. 사연은 6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정권을 잡은 세력이 의릉을 점찍고 일대 토지와 임야 관리권을 가져간다. 1962년 들어선 중앙정보부는 정자각 앞에 연못을 파 비단잉어를 풀고, 숲의 나무를 베어 운동장을 만든다. 문화유산의 중요성을 잘 알지 못하던 시절이라지만 뼈아픈 일이다. 사람들 접근이 차단된 채, 능과 정자각은 덩그러니 고립되었다. 1995년 서초구 내곡동에 새로운 청사를 지어 옮기고 나서 능역을 복원할 때 정보기관 특성상 전기, 수도 시설 등 위치조차 제대로 표기한 문서가 없어 어려움이 컸다고 한다.
지난여름 문을 연 의릉역사문화관은 조선 왕릉과 의릉의 이야기는 물론 중앙정보부 시기의 역사도 착실히 알려 주는 전시관이다. 다행히 오늘의 숲에는 왕릉 숲만의 고즈넉한 분위기가 흐른다. 잘못과 실수를 저지르는 것도 사람, 오류를 반성하고 다시금 정성을 쏟은 것도 사람. 넉넉한 자연이 또 한 번 사람을 받아 주었다.
유한한 존재에게 여백을
삶의 공간인 지구는 죽음의 공간이기도 하다. 사람은 지구에서 유한한 시간을 살다 지구에서 죽는다. 주어진 날들을 어떻게 채워 나가야 하는지, 하루하루 허겁지겁하다가 때때로 막막해진다. 분명한 사실은 주택가와 상가, 회사를 벗어나서 존재를 사유할 여백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흙으로 돌아간 왕이 누운 땅, 보드라운 선의 능과 숲이 어우러진 왕릉이 그 여백을 내준다. 마침 걷기도, 생각하기도 좋은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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