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둘이 극장에 가는 길, 어떤 영화를 볼지 의견을 나눈다. “적어도 남성이 두 명은 나오는 거.” “그 두 명이 서로 얘기를 하되, 여자 얘기는 아니어야 하고.” 남성 캐릭터가 두 명 이상 등장하고 그 남성끼리 여성 외의 소재로 대화하는 영화를 찾는다니, 갸우뚱하다. 웬만한 영화는 다 그러니까. 사실 이는 미국 만화가 앨리슨 벡델이 1985년에 그린 만화 에피소드의 성별을 반전한 상황이다. 여성 둘이 출연해서 남자가 아닌 다른 주제로 대사를 하는가 묻는 ‘하찮은’ 기준 앞에 수많은 영화가 낙제를 면치 못했다. 여성은 누구 엄마나 아내,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 또는 범죄 피해자였으며, 여성 사이에 유의미한 대사가 오가는 장면은 매우 드물었다.
벡델의 만화에서는 1979년 작 <에일리언>이 그 기준을 통과한 마지막 영화였다고 자조하듯 언급하는데, 1000만 이상 관객을 동원한 한국 영화 21편을 살펴도 <괴물> <암살> 등 7편만 살아남는다. 지난해 흥행 30위권 작품의 통과율은 불과 35.7퍼센트. 그 많은 영화에서 여성끼리 한 번도 대화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남성 일색이거나, 여성이 있더라도 주변부에 배치하는 포스터가 이런 현실을 반영한다.
물론 벡델테스트는 최소일 뿐 완벽한 기준이라 할 수 없다. 여성 우주 비행사가 주인공인 <그래비티>는 혼자 이끌어가는 영화라 테스트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벡델테스트의 한계를 인식해 고안한 것이 마코모리테스트, 엘런윌리스테스트다. 마코모리테스트는 <퍼시픽 림>의 여성 캐릭터 마코 모리에게서 유래했다. 그는 어린 시절 우주 괴수의 습격 때문에 부모를 잃고 군인이 되어 초대형 로봇 조종사로 성장해 가는 인물이다. ‘여성 캐릭터가 적어도 한 명은 등장하는가’ ‘그에게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는가’ ‘그 이야기가 남성 캐릭터를 뒷받침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이 마코모리테스트 항목이다. 엘런윌리스테스트에서는 캐릭터의 성별을 바꿔도 영화 전개가 어색하지 않은가를 본다. 모성, 연약함 같은 고정관념을 벗어나 여성 캐릭터에게 독립된 서사를 부여해야 통과하는 테스트다.
영화가 현실을 반영한다고 흔히 말하지만, 영화 속 세계는 여성이 위축된 채 남성 위주로만 돌아가는 기울어진 세계다. 지금도 80억 인구만큼 다양한 희로애락이 지구를 웃음과 눈물로 채우고 있다. 더 좋은 작품을 고민하는 감독과 작가, 제작자에게 여성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일이야말로 새로운 블루오션의 문을 여는 열쇠라 하겠다. ‘위안부’ 피해자의 씩씩하고도 감동적인 이야기 <아이 캔 스피크>처럼, 해녀들의 해양 범죄 활극 <밀수>처럼.
2020년 시작한 벡델데이는 한국 영화 영상 미디어의 양성평등을 돌아보는 행사다. 벡델데이2023은 지난해 7월부터 올해 6월까지 개봉‧공개한 한국 영화와 시리즈 가운데 성평등의 가치를 보여 주는 각 10편을 선정하고, 서울 인디스페이스에서 일부 작품을 상영한다.
기간 9월 1일~3일 문의 @bechdel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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