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어로 양파를 뜻하는 ‘르오뇽’은 이름처럼 켜켜이 풍미가 흥건한 프렌치 레스토랑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이곳엔 프렌치 다이닝의 필수 재료라 할 만한 가금류는 물론 어떤 육류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국내외 레스토랑과 호텔에서 오랜 시간 경력을 쌓아 온 허진석 셰프는 언제부터인가 고기를 먹지도, 요리하지도 않겠다고 결심했다. 동물과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입맛과 철학까지 바꿔 놓은 셈이다. 서울 신사동 세로수길 한편에 아지트처럼 작고 아늑한 공간을 꾸민 셰프는 페스코 베지테리언-프렌치 다이닝이라는 자신만의 요리 여정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중이다.
# 도전, 페스코 베지테리언 페스코 베지테리언이란 채식을 지향하면서 해산물을 섭취하는 생활양식입니다. 원래 저는 고기를 즐겨 먹는 사람이었어요. 호주 멜버른의 한 호텔에서 일할 땐 쇠고기부터 캥거루 고기까지 다뤘죠. 그러다 제주의 호텔 레스토랑 R&D팀에 근무할 기회가 있었는데, 주방에만 매여 있던 시절엔 몰랐던 세상사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더군요. 환경문제와 식재료를 둘러싼 여러 가지 책과 영상을 흡수하면서 ‘내가 만든 요리가 맛있기만 하다면, 그걸로 충분한 걸까?’ ‘하루쯤은 고기를 먹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후로 자연히 음식과 몸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게 됐고, 어느 순간 육즙을 즐기는 행위가 이질적으로 느껴졌어요. 현실적으로 한국에서 채식을 엄격하게 실천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한식엔 육수가 많이 쓰이고, 하다못해 라면의 가루 수프에도 육류가 들어가니까요. 결론은 ‘육식을 최소화해 보자’였습니다. 다만 채식만으로는 영양의 균형을 잡기가 쉽지 않으니 생선이나 해산물에서 해법을 찾기로 했지요.
# 고기 없는 주방 ‘과연 육수 없이도 먹을 만한 프렌치 요리가 나올까?’라는 호기심으로 접근한다면, 르오뇽의 음식이 더 흥미로울 겁니다. 고백하건대, 육수를 사용하지 않고 프렌치 레스토랑을 운영하기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에요. 주변에선 무모한 도전이라고들 했죠. 이곳에서 육수 대신 쓰는 재료는 채수 또는 치즈, 버터 같은 유제품입니다. 고기 없이 풍미를 돋우려면 질 좋은 제품을 공수하는 게 관건인데, 이 과정에서 오히려 고기를 구입할 때보다 제조 원가가 높아지기도 합니다. 물론 감수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 흔한 메뉴, 흔치 않은 맛 소금과 후추로만 간을 해서 신선한 재료 본연의 풍미를 살린 요리를 좋아합니다. 가장 자신 있는 요리법이기도 하죠. 단순하면서도 착실한 맛, 르오뇽이라는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느낌도 그렇지 않나요? 요리할 때 기본 중 기본인 재료가 양파인데, 이곳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재료도 양파이고 대표 메뉴 또한 양파 수프예요. 양파 수프는 어딜 가나 있는 메뉴지만, 맛을 제대로 내는 건 결코 쉽지 않죠.
# 호흡에 집중하는 시간 일주일에 이틀은 온전히 쉬는 데 집중합니다. 여행을 하거나 휴식을 취해 머리를 비우는 의식이 필요하거든요. 하루는 서울을 벗어나 근교로 떠납니다. 남은 하루는 제가 가꾸는 경기도 군포 농장에서 필요한 허브를 수확하고, 매장에 가서 다음 날 쓸 재료를 손질하면서 일상을 재정비합니다. 몸과 마음이 온전해야 건강한 요리를 만드니까요. 요즘 꽂힌 관심사는 명상입니다. 알람을 맞춰 놓고 하루 다섯 번, 짧게 명상을 합니다. 너무 바빠서 눈 깜빡일 새도 없을 땐, 일을 하는 동시에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데 집중하는 시간을 보내지요.
# 환경에 대해 말할 때 사실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환경을 논하기가 부끄럽습니다. 아껴 쓴다고 해도 버려지는 음식물, 위생 때문에 사용하는 일회용 장갑 등 쓰레기가 참 많기도 많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페스코 베지테리언을 지향하는 삶을 통해 탄소 발자국을 최대한 줄이고, 식재료 일부를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는 것뿐이죠.
# 여름, 맛이 영그는 식탁 토마토를 주재료로 한 애피타이저, 하지감자로 만든 퓌레를 곁들인 농어 스테이크, 게우(전복 내장을 뜻하는 제주 방언) 소스를 올린 전복 등으로 여름 코스를 구성했습니다. 여름은 하지감자와 토마토의 계절이에요. 하지감자란 1년 중 해가 가장 긴 절기인 하지 전후로 나는 햇감자를 일컫는 말입니다. 토마토는 늘 볼 수 있지만, 맛이 가장 좋을 땐 지금이죠. 한창 살이 오른 전복과 농어도요. 모든 제철 음식은 식재료가 싱싱하기 때문에, 특별한 조리법을 더하기보다는 삶거나 구울 때 가장 맛있습니다.
허진석 셰프가 추천하는 미식 공간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자주 갔던 서울 양재동의 임병주산동칼국수를 추천합니다. 30여 년 세월 동안 수많은 이가 허기를 달랜 공간이죠. 요즘 농장에 다니면서 알게 된 경기도 광주의 엄지매운탕도 빼놓으면 아쉬울 거예요. 얼큰한 매운탕과 깔끔한 밑반찬이 두루 훌륭합니다. 제주에 머물 때 자주 찾았던 서귀포의 공천포식당도 떠오르네요. 발효한 콩 내음, 차가운 국물, 어육의 촉감이 잘 어우러지는 된장 물회를 좋아합니다.
맛의 본질에 충실한 르오뇽의 메뉴
껍질을 벗긴 토마토에 마스카르포네 치즈와 파슬리, 아몬드 크럼블과 모스카토 와인 젤리 등을 토핑해 환대하는 마음을 담은 애피타이저 ‘토마토’를 냅니다. 향을 물씬 느낄 수 있도록 서브하면서 토마토 매리네이드 원액을 부어 드리죠. ‘전복’은 페코리노 치즈를 더해 맛을 돋운 콜리플라워 케이크에 수비드한 전복 살을 올리고 전복 내장 퓌레를 끼얹어 만드는데, 산뜻함을 더하기 위해 샐러드와 미역 튀일을 덮어 완성합니다. 튀일은 마지막에 토치로 그을려 풍미를 극대화합니다. 전복을 저온 조리하고, 미역을 퓌레에서 튀일로 굳히는 과정에 많은 정성이 들어가죠. 크림과 우유 푸딩으로 구성한 ‘바바루아’가 코스의 대미를 장식합니다. 판나코타에 파인애플 소르베를 곁들이고 라임 제스트, 초콜릿 크럼블을 더해 달걀 모양으로 꾸민 시원한 여름 디저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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