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이 남긴 강렬한 기억 중 하나는 장관을 이루던 풍선 물결이다. 브라운관 속 춤추고 노래하는 가수, 그리고 그들 앞으로 흔들리는 풍선이 마치 파도처럼 보였다. 무대에 오르는 가수에 따라 풍선의 빛깔도 바뀌곤 했다. 가령 H.O.T. 팬은 흰색, 젝스키스는 노란색, 핑클과 신화는 각각 펄 레드와 주황색 풍선을 들었다. 풍선은 한국 아이돌 시장 초창기 응원 도구였고, 풍선 색깔이 곧 내 가수를 상징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응원하는 방법도 풍선과 ‘떼창’에서 더욱 실질적인 영향력 행사로 달라진다.
최근 방탄소년단, 블랙핑크 등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는 가수들이 출현했고 덩달아 팬클럽의 위상도 높아졌다. 그저 아이돌을 좋아하는 집단을 넘어 팬클럽 이름과 활동이 여러 나라에 전파를 타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스타 이름을 내건 숲 조성 사업이다. 지난 2012년 신화의 팬클럽 신화창조가 서울 달터공원에 ‘신화숲’을 만든 것이 K팝 팬덤의 숲 조성 시초다. 이후 다양한 스타의 숲이 생겨났다. 올해 3월에는 NCT 멤버 도영의 팬들이 서울 난지한강공원에 나무 783그루를 직접 심어 ‘도영숲’을 만들었다. 스타의 이름을 딴 숲은 환경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데다, 가수와 팬을 비롯한 모두의 휴식처도 된다. K팝 팬덤이 조성한 숲은 국내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아시아·아프리카·남아메리카·오세아니아 등 여러 대륙에 걸쳐 속속 생겨나고 있다. K팝 팬덤 커뮤니티 ‘케이팝포플래닛’이 집계한 바에 따르면, 현재까지 K팝 팬덤이 가꾼 숲이 저감한 탄소량은 2만 8000톤에 달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숲 입양’ 개념도 등장했다. 반려동물을 입양하듯이 팬덤이 직간접적으로 숲을 가꾸는 일이다. 식재한 나무가 숲을 이루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이미 존재하는 숲을 입양해 잘 관리하면 그곳에 서식하는 동식물을 보호하는 것은 물론, 벌채도 막을 수 있다.
팬들의 의식은 나날이 높아진다. 앨범을 구매한 뒤 포토 카드만 챙기고 CD를 버리는 행동을 반성하거나, 디지털 음원 재생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 배출을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스트리밍 업체에 재생에너지 사용을 요구하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한다. 이 같은 민심에 엔터테인먼트 업계에도 변화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 YG엔터테인먼트는 자회사 포레스트팩토리를 설립해 친환경 소재 앨범을 발매한다. 또 하이브는 지난해 7월 방탄소년단 제이홉의 솔로 앨범을 시작으로 플랫폼 앨범을 출시한다. CD 대신 QR코드를 인식해 앱으로 음악을 감상하는 방식이다. SM엔터테인먼트는 SMini라는 이름의 NFC 미니 앨범을 도입했다. 사이즈가 작은 데다 키링으로도 사용 가능해 호응을 얻고 있다. CJ제일제당은 햇반 용기를 재가공해 지난해 ‘2022 마마어워즈’ 공식 응원봉을 제작하기도 했다. 이처럼 폐소재를 활용한 응원 도구와 굿즈도 다양해진다. 팬들은 새 응원 도구를 구매하는 대신 고쳐 쓰기도 한다.
아티스트의 이름을 높이기 위한 팬덤의 노력은 나날이 다양한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 방탄소년단 멤버 진의 중국 팬들은 어린이가 이용할 수 있는 ‘김석진 공공복지도서관’을 건립했고, 샤이니 온유 팬들은 캄보디아에 우물을 만들었다. 가수 아이유와 팬덤인 유애나는 주거니 받거니 서로의 이름으로 기부하며 소통하기도 한다. K팝 팬덤 문화는 단순한 응원에서 내 가수와 함께 더 나은 세상 만들기로 확장 중이다. 나도 좋고 내 가수도 좋고 모두가 좋은 날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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