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위에 떠 있어 사람은 밑바닥만 보는 것, 비행기 같은 수단을 이용하지 않고는 그저 아래에서 고개 들고 모양만 가늠하는 것. 구름은 손에 쥔 이가 없으되 아득하고 신비로워, 사람은 땅에서 그만큼 좋은 곳에 구름이란 글자를 넣곤 했다. 고창 아산면 운곡리 이름도 구름에서 따 왔다. 다섯 개 봉우리가 품어 안은 땅에 구름이 내려앉은 듯 안개가 짙었다 했다. 하늘에 뜬 구름은 구름이고, 사람은 입에 무언가를 넣어야 사니 오래전부터 주민은 거기서 농사를 지었고 어느 날 세상 사정에 따라 터전을 비워 달라 했을 때 떠났다. 이후 약 30년. 잊힌 땅이, 바랜 지명이 다시 돌아왔다. 구름처럼 신비로운 풍경을 안고.
유네스코 세계유산과 람사르습지를 함께
1981년 전남 영광에 원자력발전소를 세우기로 결정하고, 냉각수를 공급하기 위해 고창에 운곡저수지를 조성한다. 산자락을 층층이 다져 다랑논을 일구어 살아가던 운곡리와 용계리의 9개 마을 150여 가구가 정든 땅을 등졌다. 발전소까지 거리, 이주 가구 수 등 여러 요소를 고려한 결정이었겠다만 누군가에겐 서러웠을 일이다. 원자력발전소가 뉴스에 종종 나오고, 이주민은 새로운 터에 적응하느라 종종거리는 동안 저수지 이름으로만 남은 운곡은 관심에서 멀어졌다.
그렇게 약 30년이 흘러 2009년 운곡이라는 지명이 다시 등장한다. 사람 손을 타지 않은 땅은 완전히 자연으로 돌아가 있었다. 환경 전문 공무원 출신인 당시 부군수가 고창 구석구석을 둘러보다 우연히 습지를 발견한다. 수개월 조사를 거쳐 2011년 3월 습지보호지역에 지정되고, 4월 람사르습지로 등록된다. 숨 가쁜 움직임이 운곡습지의 엄청난 가치를 증명한다. 고창의 보물이자 지구의 자산인 습지를 지키려는 군과 주민의 노력도 이어져, 약 182만 제곱미터(55만 평) 땅에 무려 860여 종의 생물종이 살게 되었다. 논밭 시절엔 상상도 못 할 수치다. 자연을 자연답게 두었을 때 자연의 생명력은 이토록 왕성하게 피어났다.
드넓은 습지를 탐방하는 코스는 총 4개다. 1코스 출발점인 탐방안내소에서 여정을 시작한다. 뜻밖에 눈에 들어오는 건 야트막한 산자락에 점점이 놓인 고인돌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바로 그 고인돌 447기 가운데 상당수가 이곳에 있다. 무심한 눈으로는 그냥 돌이지만,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에 여기 살던 이들의 흔적이다. 문자가 없어 그들의 존재를 기록하진 못했으나 이로써 확실한 자취를 남겼다. 탁자식, 바둑판식 등 다양한 형태의 고인돌이 혼재해 역사적으로 더욱 의미가 큰데, 이는 그만큼 오랜 세월, 여러 부족이 거쳐 갔음을 보여 준다. 20여 년 전만 해도 주민이 이 돌 사이사이로 집 짓고 농사했을 생각을 하니, 한편으론 애틋하고 한편으론 신기하다. 누군가는 돌이 너무 많다고 푸념했을 테고, 아이들에겐 놀이터였을 것이다. 지금은 세계유산으로 세계가 보호하는 고인돌. 양지바른 언덕에 햇볕 받고 누운 옛 무덤이 풀과 나무, 들꽃과 그림처럼 어우러진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풍경이 이토록 아름답다.
그들의 낙원, 운곡습지
드디어 습지에 발을 들인다. 초입은 과거 주민이 이용한 산길이다가 이내 폭 80센티미터 좁은 나무 덱이 등장한다. 습지 훼손을 막으려 너비를 줄이고, 바닥에서 충분한 공간을 띄워 설치했다. 이 외에 인공물은 전혀 없다. 온통 자연, 자연, 자연뿐. 연두에서 초록으로 변해 가는 잎사귀가 세상 무엇보다 어여쁘다. 내가 뿌리박을 몇 뼘 땅이면 충분히 자립할 수 있다며 제 삶을 꾸려 나가는 나무와 풀이 당당하다. 담쟁이는 이웃 잎이 볕을 공평하게 받도록 나란히 자란다. 온갖 새가 노래하건만 ‘까막귀’라 구분을 못해 아쉽다. 바닥에 찰랑찰랑 고인 물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동식물이 서식하는지, 지금 함께 있으면서 결국 모르고 지나간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다만 바깥 세계에서 온 무지한 여행자가 860여 종 어느 동식물에도 상처를 입히지 않기만 바라며 조심히 걷는다.
계절이 여름을 향하는 지금 습지는 생명력이 팽팽히 부풀어 올라 있다. 나무가 숨 쉬는 소리를 들었다고, 착각 아니라고 누구든 붙잡고 말하고 싶었다. 태풍 같은 요인으로 쓰러진 나무도 군데군데 보인다. 물을 좋아하는 나무는 대부분 뿌리가 깊지 않아 바람에 잘 넘어진다 한다. 이 또한 자연의 이치라 생을 다한 나무는 거름이 되고 다른 동식물의 터전이 된다. 인공 소음과 조명 없는 ‘그들만의 낙원’에서 살다 갔으니 괜찮은 생이었다 하려나. 마을이고 논밭이던 곳을 30년 가까이 스스로 복원한 자연은 압도적이다. 사람이 보기 좋게 계획하고 가꾼 공원과는 차원이 다른 풍경 앞에서 태고의 신비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사람은 생각의 중심에 버릇처럼 사람을 놓지만, 지구에 사람이 존재한 시간보다 존재하지 않은 시간이 훨씬 길다. 겨우 30년만 주어져도 자연의 회복력은 거대하다. 눈으로 코로 밀어닥치는 풍경과 향기의 감동이 벅차서 걸음을 자꾸 멈추어야 했다.
싱그러운 생명의 합창을 들으며
운곡저수지를 따라 산책하다 조류관찰대에서 새를 관찰하고 발길을 돌렸다. 물속에 사는 침수식물, 물 위에 떠서 사는 부유식물, 뿌리는 물밑 흙에 두고 잎은 물 위에 뜬 채 사는 부엽식물이 공존하는 생태연못을 지났다. ‘생물 다양성’의 교과서와 같다는 설명이 아니라면 이 자그마한 연못이 얼마나 건강하고 소중한지 모른 채 그저 예쁘다고 사진이나 찍고 갔을 텐데, 습지를 안내받고 나니 물 한 방울이 달리 다가온다. 붉은배새매, 담비, 산제비나비, 수달, 진노랑상사화…, 이곳의 주민이고 주인인 이들의 이름을 속으로 불러 본다. 여름엔 노랑어리연꽃이 만발하고, 애반딧불이가 6월 밤을 수놓는다. 이 습지는 자연이 인간의 손길에서 벗어나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마음껏 펼치는 축제장이다. 축제에 잠시나마 초대받아 함께 생명력을 누리는 시간이 황송했다. 구름 속, 꿈결 속을 다녀온 기분이다.
특별하고 신비로운 갯벌에 해수욕장까지
고창은 대한민국의 군 가운데 하나지만 세계가 관심 기울이는 고장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고인돌, 세계자연유산인 갯벌, 인류무형유산인 농악과 판소리를 보유했으며 유네스코가 군 전체를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이번엔 고창의 또 다른 세계유산이자 지난 5월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지정된 갯벌로 간다.
광활한 갯벌은 습지만큼이나 왕성한 생명력이 피어나는 현장이다. 작은 존재들이 손톱만 한 구멍을 드나들면서 최선을 다해 생을 살아간다. 멀리서는 커다란 타원을 그리며 새 떼가 날았다 몸을 낮췄다 한다. 바닷바람에 떠밀린 나무들은 몸을 뒤로 물린 채 뿌리로 버티고 섰다. 저만치 바다와 갯벌 사이에 이곳의 자랑이라는 셰니에가 눈에 들어온다. 총길이 1.3킬로미터, 폭 40~200미터에 이르는 셰니에는 무려 1800년 전부터 모래나 조개 등이 퇴적되어 만들어진 ‘움직이는 섬’으로, 세계에서도 희귀한 지형이다. 물과 달과 시간의 합작품. 새가 거기 앉는 모습이 익숙한 것이 셰니에가 오랫동안 쉼터 역할을 했나 보다. 역시 자연은 누구에게나 휴식을 선사한다. 갯벌 근처에 동호해수욕장이 있다. 일자로 쭉 뻗은 모래사장을 따라 소나무가 나란히 자라 볕을 피하기 좋다. ‘차박’을 즐기는 이도 종종 보인다. 서해라 해 질 무렵 풍경은 더 말할 나위 없겠다.
자연이 안아 준, 자연과 대화한 시간
세계유산과 하루를 보냈다. 자연에 폭 파묻힌 하루였다. 눈앞의 풍경에 감탄하고, 뒤에 두고 온 풍경이 아쉬워 계속 돌아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작은 존재인 사람을 거대한 자연의 기운이 감싸고 안아 주었다. 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했다. 멸종 위기종인 진노랑상사화 한 송이를, 물기 머금고 잔뜩 싱그러운 버드나무 한 그루를 키우려면? 온 지구가 필요하다. 그들이 사는 지구가 지구다. 갯벌이 건강해야 사람도 건강하다. 지구는 흙과 나무와 물이고, 오늘 여행은 지구와 나눈 대화였다. 지구를 좀 더 알 것 같다. 충만한 하루가 저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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