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하지 않아도 각인되는 순간이 있다. 처음으로 혼자 기차를 탈 때 느낀 두근거림, 무언가를 이뤄 낸 후 밀려오는 성취감, 그리고 사랑하는 이가 곁을 떠난 슬픔. 사람이 하는 일 중 가장 끔찍한 것은 전쟁이다. 사랑하는 이뿐 아니라 동료가, 이웃이, 길에서 어쩌다 마주쳤던 이들이 원래 없던 존재인 양 사라진다. 숨 쉬는 동안 행복하기도 바쁜데 지구 저편에서는 아직도 누군가의 생명을 앗기 위해 총을 겨눈다.
1950년, 한국도 같은 비극을 겪었다. 포탄 터지는 소리와 총성, 비명이 이 땅을 울렸다.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종전이 아닌 휴전 중이란 사실을 떠올리며 사는 이는 많지 않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평온하기 때문일까. 어쩌면 너무 쓰라려서 외면해 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여전히 과거의 상흔을 품은 공간은 존재한다.
전쟁이 남긴 흔적을 찾아서
수도권 전철 1호선 도봉산역 1-1번 출구로 나오자마자 네모난 건물이 보인다. 입구를 찾으려 건물을 살피는데, 드문드문 콘크리트 벽이 그대로 드러난 채다. 공사가 덜 끝난 것인지 궁금하던 찰나 ‘평화문화진지’라는 간판을 마주한다. 이 공간은 ‘시민’ ‘창작’ ‘문화’ ‘예술’ ‘평화’까지 총 다섯 개 동과 평화광장으로 이루어진다. 겉을 나무로 꾸며서 ‘진지’라는 이름과 다르게 아늑한 분위기다.
발걸음은 ‘상설 전시관’ 팻말이 붙은 예술동으로 향한다. 공간에 들어서자 전시장 대신 작은 도서관이 나타난다. 도서관 이름은 평화문화진지에서 이름을 딴 ‘진지한 책방’. 그림책, 소설책 등이 꽂힌 책장을 둘러보다 벽 한 귀퉁이에 난 통로를 발견한다. 이곳이 전시장 입구다. 동과 동 사이를 잇는 통로를 전시관으로 만든 것이다. 전시 시작점에 서자 긴장감이 느껴진다. 따뜻한 느낌이 드는 도서관과 다르게 전시관은 회색 콘크리트로 가득하다. 한 발씩 디딜 때마다 소리가 쿵 하고 울리는 통로를 천천히 걷는다.
평화문화진지의 정체는 대전차 방호시설로, 전차가 침입하는 것을 저지하는 방공 구조물이다. 방공 구조물이 왜 이곳에 있는지 알려면 조선 시대부터 차근차근 살펴야 한다. 이 장소는 예부터 수도와 북쪽을 잇는 주요한 길목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관리나 행인에게 숙박을 제공하던 누원도 있었다. 현재도 의정부와 서울을 잇는 3번 국도가 근처를 지난다. 6․25전쟁 당시 적이 3번 국도를 따라 서울로 내려올 정도였으니, 가장 효율적인 길임이 증명된 셈이다. 1953년 휴전협정이 이뤄졌지만 전쟁의 기운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1968년, 무장간첩이 서울 청와대 근처까지 침투한 이른바 ‘김신조 사건’이 발발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서울의 보안과 병력을 더욱 강화하는데, 그 여파로 1970년 도봉구에 대전차 방호시설을 짓는다. 적이 침입했을 때 건물 자체를 폭파해 잔해로 길을 막을 목적이었다.
특이한 점은 군사시설 위에 시에서 지은 시민 아파트가 들어섰다는 것이다. 1층은 군사시설, 2층부터 4층까지는 실제로 180세대가 거주하는 아파트였다. 다행히 방호시설이 제 역할을 할 일은 없었다. 시민 아파트 건립 20년이 되던 1997년, 아파트는 건물안전진단 위험 수준인 E등급을 받고 2004년 철거된다.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방법
1층의 대전차 방호시설은 역사적 가치가 있다는 이유로 철거는 면했으나, 이후 10년 동안 방치된다. 폐허처럼 변한 장소는 주민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2017년 문화 예술 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예술가에게 작업실을 대여하거나 전시를 열고, 누구나 참여 가능한 버스킹 공연을 펼친다. 건물 분위기는 따뜻하고 활기차게 바꾸되, 구조와 대전차 방호시설 흔적 등을 최대한 보존했다. 그 덕분에 전쟁을 모르는 세대도 옛 시간을 잠시나마 짐작한다. 차가운 벽면을 살며시 손으로 쓸자 시멘트 가루가 묻어난다. 벽에는 못과 철근이 박혔던 흔적이 선연하다. 누군가는 잊었을지 몰라도 상처는 아직 그대로다. 손끝에 남은 서늘함이 가슴까지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다.
전시관을 나와 전차 모형 뒤 우뚝 선 전망대에 오른다. 여기저기 부서진 방호시설을 20미터 위에서 내려다보다가 도봉산, 중랑천과도 눈을 맞춘다. 안전한 환경에서 평온하게 경치를 감상하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스레 감사한 마음이 든다. 이번에는 평화문화진지 2층의 옥상 휴게 공간으로 간다. 다섯 개 동을 잇는 공중 통로에서 특이한 표지판을 발견한다. 발 딛고 선 장소를 기준으로 독일 베를린, 독도 등까지의 거리를 적어 놓은 것이다. 눈에 가장 먼저 띄는 표지판은 ‘평양 186km’. 서울과 부산 사이보다 훨씬 짧은 거리이나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전쟁이 없는 세상으로 갈 길은 멀었지만, 과거를 기억한다면 어려운 일은 아니다. 같은 아픔을 겪는 이가 나타나지 않도록 우리는 새겨야 한다. 평화는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야 하는 것임을.
+ 평화문화진지에서 체험해 보세요
평화문화진지는 교육, 체험, 전시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방문객을 기다린다. 매주 일요일 평화문화진지 일대에서 6월 4일까지 2023 평화 버스킹을 연다. 4동 예술동에서는 체험 프로그램 ‘나의 나무 깎기’를 12월까지 진행한다. 목공 기계와 도구로 나무를 조각해 나만의 작품을 만든다. 체험은 홈페이지에서 신청 가능하다.
문의 culturebunke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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