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히기 쉬운 것들을 식탁 위로 불러내어 맛보고 즐기고 보존하는 일. 어떻게 조리해야 좋을지 몰라 사 먹지 못하는 온갖 식재료와, 명맥이 끊길지도 모를 전통 조리법을 활용해 미식의 다양성을 수호하는 길. 코리안 노르딕 퀴진을 지향하는 ‘B3713’의 정혜민 헤드 셰프가 생각하는 자신의 목표이자 책무다. 서울 청담동 한복판에서 몸소 허브를 기르고 발효를 연구하며, 때때로 장을 담그거나 술 빚는 여행을 떠나는 이유다.
# 코리안 노르딕이라는 정체성 한국 식문화와 식재료를 뉴노르딕 퀴진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계승하는 것이 제가 추구하는 코리안 노르딕입니다. 덴마크의 레스토랑 ‘노마’에서 메뉴 개발팀 일원으로 머물며 배운 노르딕 퀴진의 미덕은 재료와 생산자를 대하는 겸손한 자세, 그리고 식문화 유산을 발전시키려는 올곧은 의지예요. 노르딕 퀴진과 한국 식문화의 접점은 발효와 전통입니다. 예컨대 한국에서 소금∙물∙콩으로 장을 담글 때, 노르딕 퀴진은 소금과 식초로 그라블락스(연어 절임)나 청어 절임 등 어패류의 보존 기간을 늘리는 요리법을 적용하죠. B3713은 발효와 전통을 매개로 두 퀴진을 아우르면서 여러 가지 시도를 하는 중입니다.
# B주방과 B멤버 B3713의 주방을 ‘B주방’, 구성원을 ‘B멤버’라고 부릅니다. B주방은 오픈 키친 형태라 쿰쿰한 발효취가 조리대를 넘어 이따금 매장 전체를 가득 메우곤 해요. 들어오는 순간부터 ‘발효를 제대로 하는 공간이구나!’라고 느낄 만큼요. B멤버들은 손 기술을 드러내는 음식에 그치지 않고 사유하고 감각할 거리가 있는 요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발효도 그런 노력 중 하나죠. 무엇보다 B주방에서는 ‘자연스러운’ 재료의 사용을 지향해요. 바꿔 말하면, 한국에서 나지 않거나 제철이 아닌 식재료를 가급적 쓰지 않으려 해요. B멤버들은 재료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만큼 상대를 배려하는 데도 능숙해요. B주방의 미래가 밝은 건 B멤버들 덕분입니다.
# 청년 셰프로 산다는 것 요식업계 여성 전문가 인터뷰집 <요리가 전부는 아니지만>에서도 이야기했듯, 셰프는 이야기와 문화를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이상에 부합하는 셰프가 되기 위해선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배우려는 자세가 중요해요. 체력을 유지하며 주방 구성원의 사기를 북돋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아야겠죠. 저와 구성원의 일상을 단단하게 하는 루틴에 충실한 이유예요. 재료를 살피고, 허브에 물을 주고, 오픈 준비를 할 때 싸이의 ‘예술이야’를 함께 듣고, 노래가 끝나는 타이밍에 맞춰 브리핑을 하고, 서비스 이후엔 식사를 만들어 먹으면서요. 청년이라 좋은 점은 크고 작은 일에 에너지를 투자하고도 다시 일어서는 회복 탄력성이 높다는 것!
# 여행이란, 감동 경험과 이야기를 쌓기 위해 식재료 여행을 떠납니다. 최근엔 전남 담양의 기순도 전통장을 찾았어요. 서울 강남에 위치한 다이닝 ‘에빗’의 알렉산더 헤드 셰프님, 인도 뭄바이 ‘시퀄’과 ‘눈’의 베니카 셰프님과 동행했죠. 긴 세월, 여러 세대를 거친 장을 맛보는 일은 놀라움의 연속이었어요. 감칠맛이 어찌나 대단하던지 어떤 재료와도 비교할 수 없겠더라고요. 전남 해남 보해매실농원에서 보낸 시간도 뜻깊었습니다. 한국의 매실주, 매실청을 잘 활용해서 ‘plum’만큼 ‘maesil’이란 이름을 널리 알려야겠다고 결심했죠. 강원도 양구 펀치볼에 있는 사과 농장 ‘애플카인드’도 꽃이 피었다기에 다녀왔어요. 사과 한 그루 한 그루가 온전히 자라도록 구축한 작농법에 새삼 감탄했습니다. 사과꽃으로 음식을 만들면 어떨까 상상하기도 했죠. 많은 것이 변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이 생겨나는데도 불구하고 뚝심 있게 자신의 것을 지켜 나가는 농부님, 명인님을 만날 때마다 깊은 감동을 느껴요.
# 논알코올과 제로 웨이스트 요즘 저의 관심사는 논알코올 음료예요. 한식에서 국이나 찌개를 중요하게 여기듯, 덴마크에서는 주스나 와인 페어링을 일상적으로 즐겨요. 여름이 다가올수록 달콤한 과일이 많이 나오는데, 음식뿐 아니라 음료로도 계절감을 전하기 위해 심재현 소믈리에와 논알코올 음료 페어링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제로 웨이스트를 실천하는 일도 저를 사로잡은 것 중 하나예요. 요리 과정에서 제로 웨이스트를 지향할 순 없을까 고민하다가 바 ‘제스트’와 협업해 버려지는 재료로 음식과 음료를 선보인 ‘크로스 폴리네이션(Cross Pollination, 타가수분)’ 팝업 행사를 꾸며 보았어요. 지금 제가 맛보고 느끼는 모든 것을 잘 보존해 다음 세대에 전달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요.
# 초여름의 맛 레스토랑 테라스 가든에 있는 허브가 어느새 숲을 이루어서, 이것을 메뉴로 옮겨 볼 계획이에요. 머지않아 산딸기와 오디, 복숭아와 자두도 나올 텐데, 이 붉은 열매들을 음료나 차가운 디시 혹은 메인 디시의 가니시로 활용할 구상도 하고 있어요. 제철 재료인 조선호박, 초당옥수수, 키조개도 놓칠 수 없겠네요. 맛이 차오르는 여름을 기대해 주세요.
정혜민 셰프가 추천하는 미식 공간
강원도 정선의 전영진 어가는 조만간 방문할 계획이라 꼭 소개하고 싶어요. 향어백숙과 송어비빔회로 유명한 곳인데, 쌀과 작물을 직접 기르는 것은 물론 장과 젓갈에 이곳만의 독특한 맛을 간직하고 있어요. 그리고 경남 창원 마산합포구의 돈대박 돼지국밥 24시, 전남 순천의 대원식당, 서울 동대문구 경동시장의 안동집 손칼국시, 서울 종로의 온지음까지 전국 방방곡곡에 좋아하는 식당이 많아서 몇 곳만 추리기가 어렵습니다.
싱그러운 계절을 담은 B3713의 메뉴
‘맛조개’는 전남 순천에서 공수한 맛조개를 채수에 데치듯 익힌 뒤 곰피장아찌와 소금에 절인 견과를 얇게 잘라 켜켜이 두르고, 발효한 토마토 오미자 브로스와 어수리 오일로 마무리해 만들었습니다. 이 계절의 풍미가 흐드러지죠. 강원도 양구 사과를 저며 발효 포도 드레싱에 절이고 얇게 썬 콜라비를 쌓은 후, 소금에 절인 매실과 간장에 절인 인삼꽃을 곁들인 ‘사과 콜라비 샐러드’는 싱그러움으로 가득해요. ‘돈 살치살 스테이크’는 약불로 천천히 익혀 육즙을 가둔 돼지갈비 덧살에 5년간 숙성한 진석화젓갈로 만든 소스를 곁들여 완성했습니다. 삼겹살이나 목살 말고도 맛있는 부위가 많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어요. 맛조개에는 ‘양구 애플펀치 드링크’를, 스테이크에는 ‘블루베리 타르트 주스’를 페어링합니다. 주스의 산미가 침샘을 자극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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