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 시간을 더하면 계절이 된다. 흘러가는 시간에 몸을 맡긴 채 살아가는 생명들은 계절에 맞춰 새 잎을 틔우고 꽃을 피워 내며 열매를 맺는다. 손종원 셰프는 그런 흐름을 유심히 지켜보는 이다. 언제 무엇이 가장 싱싱한지, 어떤 맛을 품고 있는지를 살펴 요리한다. 그에게 요리와 메뉴 개발은 자연을 연구하는 과정이다. 비취색 인테리어가 단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타닉 가든에서 손종원 헤드 셰프의 연구를 엿보았다.
# 익숙함에서 새로움을 찾다 ‘이타닉 가든’을 한글로 풀면 식(食)물원이에요. ‘심을 식’이 아닌 ‘먹을 식’을 씁니다. 이곳은 늘 새로운 한식을 추구합니다. 그 과정에서 잊힌 한식 문화를 끌어내 다시 세상에 내놓고 소개하기도 해요. 한국 사람은 당연히 한식을 먹고 삽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 이상 찾지 않는 한식도 많아요. 예시로 신선로를 들어 볼게요. 한국의 대표적인 궁중 음식이고 다른 나라에 한식을 알릴 때도 종종 등장하지만, 한국인이 실제로 신선로를 먹을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일상에서 자주 보는 음식이 아닐뿐더러, 먹은 적이 없으니 몰라서 찾는 이가 많지 않으니까요. 저는 이런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기록 속에 잠든 한식을 발굴해서 발전시키고 한국인, 외국인 할 것 없이 맛보게 하고 싶어요. 과거의 요리라 할지라도 그 음식을 한 번도 먹어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충분히 새로우니까요.
# 진심으로 하고 싶은 것 처음부터 셰프라는 직업을 목표로 공부하지는 않았어요. 원래 토목학을 전공했습니다. 대학에서 여러 번 시험을 거친 후 깨달았어요. 단순히 노력만 하는 사람은 진심을 다해 즐기는 사람에게 역부족이라는 것을요. 그러다 대학교 4학년 때 우연히 미국 뉴욕의 CIA 요리학교에 방문할 기회가 생겼어요. 그곳을 보고 가슴이 설렜죠. 교육과정도 훌륭했지만, 학생들 표정이 행복해 보였어요. 그 후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건 뭔지 고심했어요. 답은 요리였습니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요리의 길을 걷기 시작해 여기까지 왔네요. 처음엔 많이 힘들었어요. 늦게 시작했다는 사실이 콤플렉스이기도 했고요. 그래도 제가 도달하고 싶은 목적지는 하나였습니다. 바로 한식이에요. 2018년에 오픈한 컨템퍼러리 레스토랑 ‘라망 시크레’에서 헤드 셰프를 맡았을 때도 한식을 계속 공부했어요. 궁중음식연구원에 다니고, 강의가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가서 들었습니다. 현재는 이타닉 가든 헤드 셰프를 맡은 덕분에 한식을 더 본격적으로 연구 하는 중입니다.
손종원 셰프가 추천하는 미식 공간
세계 각국의 음식·외식 전문가가 투표로 선정하는 ‘2023 아시아 50 베스트 레스토랑’ 15위에 오른 서울의 양식 레스토랑 모수를 추천합니다. 안성재 셰프님이 펼치는 우엉 요리가 입소문 난 곳이죠. 프랑스 가정식을 소개하는 서울 메종조는 맛있는 음식을 편안하게 먹고 싶을 때 즐겨 찾는 공간입니다. 샤르퀴트리와 빵의 조화가 그만이에요.
# 음식에 계절을 담다 5월 말까지 선보이는 봄 코스에는 생명력을 담았습니다. 꽃향기, 풀 내음 등 봄에 느껴지는 향이 두드러지도록 레시피를 구성했지요. 메인 요리는 죽순을 주제로 만들었는데, 솟아나는 죽순의 이미지가 봄과 잘 어울리지 않나요? 코스 메뉴를 구성할 때는 이런 순서를 거칩니다. 그 계절에 한국에서 나는 맛있는 식재료가 무엇인지 떠올려 보고, 재료를 어떻게, 어떤 것과 조합할지 고민합니다. 예를 들면 여름 과일인 참외를 사용할 때 해산물과 조합해 냉채처럼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상상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종이에 메뉴가 완성된 모습을 대략적으로 그린 뒤, 큰 보드판에 붙여 놓습니다. 이타닉 가든의 메뉴 이름은 대부분 식재료입니다. 그만큼 식재료가 요리에서 중요하다는 뜻이지요. 이타닉 가든과 라망 시크레, 두 레스토랑 모두 계절마다 메뉴를 리뉴얼해서 늘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곤 해요. 풍부하고 새로운 맛의 음식을 만들고 싶다는 열망은 모든 셰프가 느낄 거예요. 최근에는 여름 메뉴에 쓸 재료를 선정 중이에요. 이 과정도 거의 끝나 갑니다. 6월부터 선보일 여름 코스를 기대해 주세요.
# 함께 성장하는 주방 주방에는 약속이 많습니다. 레시피, 손님에게 요리가 나가는 방식 등이지요. 엄청나게 특별한 것은 아니지만, 함께 일하는 모두가 약속 앞에서 타협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저는 팀원들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방의 치열함을 축구 경기에 곧잘 비유하곤 하는데, 감독이 전략에 뛰어나거나 실력이 월등한 선수가 한 명 있다고 해서 무조건 경기를 이기는 것은 아니지요. 감독과 모든 선수가 손발을 맞춰 골을 넣듯, 주방도 재료 손질부터 손님상에 요리를 내기까지 모든 팀원의 손발이 맞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팀원들과 같이 성장하고 싶어요. 어제보다 오늘 더, 한 걸음이라도 전진하고 싶습니다.
재료가 주인공인 음식, 콩과 두릅
사찰 음식점 ‘두수고방’의 순두부에서 영감을 받은 ‘콩’이 나오면 모두 생김새를 보고 감탄합니다. 우선 콩물을 훈연해서 콩물 커드를 만들어요. 여기에 발효한 표고버섯과 영양부추를 넣고, 달걀을 이용해 수묵화처럼 그림을 그린 뒤 마지막으로 국내산 캐비아를 얹습니다. 짭조름한 캐비아와 부드러운 콩물 커드가 훌륭한 조화를 이루지요. ‘두릅’은 냉채로 표현했어요. 데친 두릅과 새우 위에 갑오징어, 엔다이브, 사과, 미나리 절임 등을 말 듯이 얹고, 그 위에 빻은 잣과 고소한 소스를 곁들입니다. 두릅 향과 소스의 고소함이 기분을 끌어올려 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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