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탄생과 동시에 스크린의 주인공으로 출연한 것은 다름 아닌 기차였다. 정거장에 들어서는 기차의 거대한 움직임을 촬영한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이 그랬듯, 현존하는 한국 영화 중 가장 오래된 작품 <청춘의 십자로> 또한 기차역을 이야기 무대로 공들여 담았다. 철로를 따라 경의선 열차가 달리는 모습부터 1930년대의 복닥복닥한 경성역 광장 풍경까지, 당대의 첨단 문명과 도회적 정취를 보여 주는 수단으로 철도를 활용한 것이다.
그러니까 한국 철도의 구심점, 서울역으로 대변되는 기차역이란 공간은 시절을 불문하고 한 인간이 내던져진 세상이자 생애의 한 장이 시작하는 순간으로 표상된다. 1950년대 작품 <어느 여대생의 고백> 주인공 소영부터 1970년대를 풍미한 <별들의 고향>의 애달픈 연인 경아를 지나 2000년대 <친절한 금자씨>에서 막 출소한 금자에 이르기까지, 실제로 수많은 승객의 시발점이자 종착점이기도 한 서울역은 인물이 의미심장한 걸음을 떼는 무대로 등장하곤 했다.
공교롭게도 KTX가 개통한 2004년 전후 몇 년간을 흔히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기’라 부른다. 새 시대의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하기 시작한 까닭에 철도는 이전보다 다양한 역할을 도맡았다.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기찻길 장면이 만들어진 것도 바로 이 시기다. <박하사탕>의 영호가 “나 돌아갈래”를 외치는 순간은 충북 충주 삼탄역과 제천 공전역 사이 터널에서, <살인의 추억> 마지막을 장식하는 추격과 격투 신은 경남 진주 개양역과 사천 사천역 사이 터널에서 촬영한 결과물이며,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두 주인공의 운명을 주관하는 결절점은 현재 사라진 서울 용산역 구 역사다. 이처럼 철길과 기차역이 얄궂은 삶을 은유하는 예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런가 하면 기차가 지닌 압도적인 속도감이 이야기를 추동하기도 한다. 영화 <라이터를 켜라>는 ‘기차 액션’을 표방한 활극이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열차 안에서 오합지졸 사내들이 라이터 하나 때문에 벌이는 소동을 그린다. 주인공 일당은 천안역에서 들이닥친 경찰에게 진압되는데, 실제로는 울산역을 천안역으로 꾸며 촬영했다고 한다. 좀비 영화 <부산행>은 서울과 부산을 잇는 철로 442킬로미터 길이만큼이나 압도적 스릴을 선사한다. 대전역에서 좀비들이 쏟아져 나오는 장면은 실제로 부산 부산진구 부전역에서, 기차가 동대구역에 닿아 가는 모습은 부산철도차량정비단에서 촬영했다는 뒷얘기도 영화만큼이나 흥미진진하다. 때론 배경을 넘어 배역까지 수행하고, 다른 역인 양 시침 뚝 연기까지 해내는, 영화 속 놀라운 기차역의 목록은 다음 장에서 펼친다.
이곳에서 촬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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