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론, 하고 가만히 부르니 저 멀리서 물기 어린 바람이 불어온다. 섬강과 성미천이 남한강과 만나는 곳, 강원도 원주 부론면 흥원창 쉼터에 닿았다. 부론이라는 쓸쓸하고도 아름다운 지명, 쉴 새 없이 미곡을 실어 나르던 흥원창의 아득한 옛일을 되새기면서 느릿느릿 흘러가는 물길을 바라보았다. 예부터 드나드는 객이 많은 만큼 오가는 말(論)이 많아(富) 그리 부른다던가. 드넓은 벌과 논이 여럿이라 ‘벌논’, 보를 막아 논을 일궜다고 해서 ‘보논’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만 모두 확실하지는 않다. 그저 바람, 벼랑, 보름을 닮은 발음이 좋아서 자꾸 불러 본다. 부론, 하고.
나무가 견뎠을 긴긴 세월을 헤아려 본다.
물머리에서 폐사지까지
어디든 느닷없이 떠나고 싶었다. 물론 ‘어디든’이 아닌 물 맑고 산 좋은 고장이기를, ‘느닷없이’가 아닌 화창한 가을날이기를 내심 바랐다. 산과 들, 물과 길이 고요히 교차하는 고장인 원주는 오랜 시간 고이 품어 온 가을 여행지였다. 어느 아침, 서울 청량리역에서 서원주역 가는 기차를 잡아탔다. 설악산에 첫눈 내렸다는 소식이 등을 떠밀었다.
여정은 흥원창에서 세물머리를 바라보는 데서 시작해야 했다. 그러고는 곧장 강을 끼고 내리닫는다. 원주굽이길 9코스 흥원창길을 따라가다가, 종점인 법천소공원에 닿은 뒤엔 10코스 천년사지길로 갈아탄다. 남한강 변의 눈부신 두 폐사지인 법천사지와 거돈사지를 아우르는 길이다. 법천교, 서원교 지점을 지나자 시야가 넓어지면서 너른 들녘이 펼쳐진다. 조금 더 나아간다. 헤집어 놓은 흙과 돌부리, 아름드리 노거수, 제멋대로 피어난 구절초가 저마다 눈길을 잡아끈다. 어느덧 법천사지 한복판이다.
부처님 말씀이 샘처럼 솟는 곳, 법천사. 약 18만 제곱미터(5만여 평)의 빈터에는 한때 휘황한 불보살상과 전각이 그득했으리라. 통일신라시대에 창건해 임진왜란 이후 폐사하기까지 내내 융성했으나 모든 게 스러진 지금은 우뚝 선 두 기의 당간지주뿐, 중문과 회랑 두 탑은 터만 남았다. 절터 옆에 야트막하게 솟은 언덕바지는 지광국사 부도전 터다. 고려 문종이 존경해 마지않은 스승 지광국사가 이곳에서 입적하고 15년이 흐른 뒤, 잘생긴 해주석을 깎아 지광국사탑비를 세웠다. 탑비 옆자리를 오랫동안 비운 지광국사탑은 현재 거취를 논의 중이다. 6·25전쟁 때 산산조각난 탑은 한동안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귀속되었다가 2016년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처리센터에서 대수술을 받고는 귀향을 앞두었다만, 법천사지 유적전시관 내부에 보존하느냐, 본래 있던 자리에 비치하느냐를 두고 갑론을박이 가파르다. 부디 지광국사탑에 평화가 깃들기를. 합장하고 눈을 감는다.
거돈사지에는 오늘날 법천사지에서 볼 수 없는 것이 있다. 탑이다. 하나는 외로운 꽃나무처럼 우두커니 선 삼층석탑이고, 다른 하나는 국립중앙박물관 마당까지 흘러 들어간 원공국사탑의 빼어난 복제품이다. 그래서일까, 소슬한 공기가 고인 법천사지에 비하면 이곳엔 어딘가 포근하고 아늑한 정취가 감돈다. 천년을 살았다고 전하는 느티나무의 존재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둘레가 7미터를 훌쩍 넘는 나무로, 1982년 11월에 보호수로 지정되었으니 올해로 꼭 40년을 맞는다. 나무가 견뎠을 긴긴 세월을 헤아려 본다. 원공국사가 열반에 들고, 거돈사가 무너지는 가운데서도 꼿꼿했을 이 나무의 모든 시절을.
숲을 내어 준 마을에 감사하며 발을 디딘다.
한낮의 하얀 햇살이 도로를 달군다. 좁다란 길엔 우리가 탄 트랙터만이 탈탈거리며 달린다. 운전대를 잡은 민억기 이장은 객차를 연결한 이 트랙터를 두고 ‘꽃마차’라 부른다. 그는 몸소 꽃마차에 객을 실어 나르는 환대를 아끼지 않는다. 점차 속도를 줄이던 트랙터가 어느새 굳게 닫힌 문 앞에 멈춘다. 금줄을 축 늘어트린 문 양쪽엔 울타리가 늘어섰다. 민 이장의 손이 능란하게 자물쇠를 푼다. 숲이 열리는 순간이다.
신들의 숲을 디딜 때
신림(神林)면, 신령한 숲이라는 뜻을 간직한 이 마을에 천연기념물로 보존해 온 성황림이 있다. 치악산 성황신을 모신 성황당이 여기 자리한다. 본래 숲은 윗당숲과 아랫당숲으로 나뉠 만큼 드넓었지만, 1970년대와 1990년대에 일어난 큰 홍수에 아랫당숲이 쓸리다시피 망가졌다. 우리가 발 딛고 선 곳은 윗당숲이고, 지금은 이 숲만을 성황림이라 부른다. 해마다 음력 4월과 9월이 되면 성황림 성황당에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성황제를 지낸다.
성황림은 한동안 성황제가 열릴 때를 제외하고는 출입을 금했다. 그 덕에 숲은 원림에 가까운 모습을 유지해 왔지만, 마을 사람들은 더 많은 이와 숲의 아름다움을 나누고자 했다. 2020년부터 숲 체험 프로그램을 꾸리고 빗장을 푼 까닭이다. 숲을 내어 준 마을에 감사하며 조심스레 발을 디딘다. 이내 맑고 서늘한 바람이 밀려온다. 붉게 물든 복자기나무 잎이 바람결에 팔랑거리며 춤춘다. 황홀한 광경이다.
숲길은 온갖 식물의 표본을 늘어놓은 박물관처럼 호화스럽다. 중부 지역 온대림의 고유한 특성을 간직한 이곳은 다채로운 식생을 품고 있다. 말채나무, 졸참나무, 층층나무, 피나무, 다래나무, 쪽동백나무, 박쥐나무, 노박덩굴, 으름덩굴···. 봄에는 복수초가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한겨울에도 얼지 않는 냇가엔 푸른 이끼가 자라난다. 할 수만 있다면 철마다 옷을 갈아입는 성황림의 모습을 만나고 싶다.
성황당 주변은 온통 영묘한 기운에 휩싸인 채다. 건물 한편엔 여서낭 음나무, 다른 한편엔 남서낭 전나무가 우뚝 서 있다. 과연 성황당과 이 숲을 주관할 만한 위용이다. 몇 해 전 벼락을 맞아 깊은 병이 들었던 전나무는 지난 7월 치료를 받고 회복 중이라는데, 속사정을 모르는 이에겐 높이 29미터에 지름 1.3미터를 자랑하는 풍채가 여전히 늠름하게 느껴질 것이다. 아무리 고개를 치켜들어도 나무 꼭대기는 하늘에 닿을 듯 아득하기만 하다.
건물을 멀찌감치 에워싼 나무 몇 그루엔 금줄을 쳐 놓았다. 자세히 살피니 금줄 가닥 사이에 종이가 끼워져 있다. 간절히 이루고자 하는 바를 적어 둔 소원지다. 숲을 찾은 이방인에게도 흰 종이가 하나씩 주어졌다. 손에 들린 종이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망연해졌다. 소원이라니. 단순하고 원초적인 욕구가 아닌, 사심 없이 순수한 소망을 그려 본 일이 언제였나. 장고 끝에 써 내린 소원은 성황림의 안녕이다. 마을이 숲을 지킨 것처럼 숲도 오래도록 마을을 돌봤으니, 앞으로는 더 많은 소원이 성황림을 수호하게 해 달라고 빌었다. 마음이 풀빛으로 젖는 기분이다.
저무는 계절처럼, 해가 뉘엿뉘엿 떨어진다. 노을빛 내려앉은 삼산천 수면이 파르르 떤다. 바람 불 때마다 윤슬이 찰랑거리고, 가슴은 울렁거린다. 해발고도 220미터 스카이타워 아래로 뻗어 난 장쾌한 구조물 앞에서 연신 가쁜 숨을 몰아쉰다. 간현관광지의 새로운 이정표, 소금산 울렁다리를 마주하고 있다.
장엄한 대자연 속에서 출렁거리고 울렁거리는 마음을
신나게 가로지르도록 설계한 놀이터다.
섬강은 어드메오, 간현이 여기로다
장엄한 대자연 속에서 출렁거리고 울렁거리는 마음을 간신히 가눈다. 소금산 그랜드밸리는 신이 공들여 빚은 산천을 마음껏 오르내리고, 신나게 가로지르도록 설계한 놀이터다. 384미터의 간현봉, 343미터의 소금산과 어깨를 견줄 만큼 압도적 스케일을 자랑하는 구조물을 적재적소에 설치해 신선의 눈으로만 볼 수 있던 유려한 풍광을 발아래 두고 감상한다. 탐방로는 순환형 코스로 이어진다. 매표소에서 출발해 간현교, 삼산천교를 건너 578개 계단으로 이루어진 나무 덱 산책로를 지나면 분기점에 다다른다. 이 지점에서 길은 하늘바람길과 출렁다리로 갈라진다. 출렁다리를 건널 땐 드론 비행을 하는 듯한 짜릿함을, 하늘바람길을 거닐 땐 출렁다리의 기묘한 모습을 마주하는 행운을 경험한다. 그러니 어떤 길을 골라도 후회할 일은 없다.
소금산 출렁다리는 한동안 원주의 얼굴이었다. 길이 200미터에 폭 1.5미터 규모로 지어 올린 다리로, 2018년 1월 11일 개장한 뒤 3개월 만에 방문객이 100만 명 이상 다녀갔을 만큼 놀라운 흥행을 기록했다. 간현역과 판대역을 잇는 레일바이크와 글램핑장 등 간현관광지 전체가 여행 명소로 주목받은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원주시는 이에 안주하지 않았다. 간현관광지가 품은 볼거리와 즐길 거리를 극대화하기로 한다. 출렁다리가 끝나는 지점에 알록달록한 꽃을 식재해 하늘정원을 조성하는 중이고, 덱 산책로를 소금산 벼랑에 얽어 353미터 길이의 소금잔도를 설치했다. 소금잔도를 걷는 동안엔 세필로 그린 듯 절묘한 절벽과 탁 트인 간현관광지를 파노라마 전망으로 누리니, 높이 나는 새가 더 이상 부럽지 않다.
잔도가 끝나는 곳부터 스카이워크다. 말 그대로 하늘을 걷는 기분을 선사하는 전망대다. 이왕 스카이워크 전망대에 섰다면 바닥을 잘 살피는 것이 좋다. 다섯 손가락을 활짝 편 모양으로 패널을 이어 붙였기 때문이다. 문득 그것이 누구의 손일까 가늠해 보았다. 유유히 흐르는 삼산천, KTX 중앙선이 지나는 철길, 완연한 황금빛으로 물든 논밭이 두 눈 가득 펼쳐진 순간, 아무래도 그 손은 신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울렁다리를 밟을 차례다. 소금산 그랜드밸리의 하이라이트는 이제 출렁다리에서 울렁다리로 옮겨 간 모양이다. 거대한 V자 철골 구조물이 올라 선 다리 입구든, 유리 바닥으로 이루어진 다리 중턱이든 404미터 길이의 현수교는 어디랄 것 없이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방문객으로 붐빈다. 당연하다. 이 웅장한 장면 앞에 서면 누구라도 기록하고자 하는 욕구,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충천할 것이다.
간현에 어둠이 찾아든다. 간현암에서 삼산천교 방향으로 휘도는 나무 덱 산책로를 지나면 앞서 출렁다리로 진입했던 길과 겹친다. 어느덧 간현교에 선다. 섬강과 삼산천이 맞닿는 곳이다. “섬강은 어드메오, 치악이 여기로다.” ‘관동별곡’의 한 대목이다. 강원도 관찰사로 임명된 송강 정철은 오늘날의 남양주에서 말을 갈아타고 양평군으로 돌아 들어가 원주 땅에 이르는데, 그때 이렇게 노래했다고 한다. “섬강은 어드메오, 간현이 여기로다.” 달큼한 저녁 공기에 취하기라도 한 걸까, 시심이 솟고 콧노래가 흘러나온다.
<KTX매거진>×MBC 라디오 <노중훈의 여행의 맛>
강원도 원주에 다녀온 <KTX매거진>이 MBC 표준FM <노중훈의 여행의 맛>을 통해 독자, 청취자 여러분과 만납니다. 기자의 생생한 목소리로 취재 뒷이야기, 지면에 미처 소개하지 못한 여행 정보를 함께 들려 드립니다.
본방송 2022년 11월 5일 오전 6시 5분(수도권 95.9MHz)
원주의 즐길 거리&먹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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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엄 산
원주에는 소금산만큼 아름다운 산이 하나 더 있다. 뮤지엄 산이다. 자연에 폭 안긴 것처럼 유려한 건물은 물과 빛의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작품이다. 산책하듯 천천히 걷다 보면 웰컴센터, 플라워가든과 워터가든, 본관과 명상관, 스톤가든과 제임스터렐관을 차례로 만난다. 하이라이트는 제임스터렐관이다. 설치 미술가 제임스 터렐이 선사하는 명상적인 기운은 이곳 고유의 건축미와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주변 풍광을 마주하는 ‘카페 테라스’에 앉아 감상의 여운을 되새겨도 좋겠다.
문의 033-730-9000 -
박경리 문학공원
“원주를 사랑한다는 것은 산천을 사랑한다는 얘기다.” 소설가 박경리가 쓴 이 문장은 원주를 여행한 이라면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말이다. 그가 역작 <토지>의 대단원을 집필한 원주 단구동 작업실과 집을 보존해 일대를 공원으로 꾸몄다. <토지>의 배경을 가져와 평사리 마당, 홍이 동산, 용두레벌 등 구역별로 테마를 부여했다. 앞뜰엔 작가가 기르던 고양이, 즐겨 사용하던 호미가 작가의 모습과 함께 동상으로 남아 있다. 공원 옆 건물 ‘박경리 문학의 집’은 전시실과 북 카페로 꾸몄다.
문의 033-762-6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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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월양조장
원주 토토미로 좋은 술을 빚는 것. 협동조합 모월의 설립 목표는 이토록 소박했으나, 출범 6년 만인 2020년에 이르러 증류식 소주 ‘모월 인’(41도)으로 우리술 품평회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최근에는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둔 ‘원소주’의 제조 및 개발에 기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어느 때보다도 애주가가 주목하는 양조장으로 꼽히고 있다. 향이 그윽한 모월의 술은 마실 때도, 마시고 나서도 깔끔한 것이 특징이다. 대표 제품인 모월 인은 치악산 한우와 페어링하기 좋다. 모월은 치악산의 옛 이름이다.
문의 033-748-8008 -
깨 로스터리 옥희방앗간
깨를 볶고, 사람들을 모으니 이보다 충실한 방앗간이 또 있을까. 3대째 방앗간을 운영하는 문지연 대표는 이곳에서 저온 압착 방식으로 생산한 참기름과 들기름을 선보인다. 볶는 정도에 따른 선택지(‘연하게’와 ‘균형 있게’)를 마련한 것이 인상적인데, 과연 풍미와 질감이 남다르다. 집에서 요리할 여유가 없는 이라면 자리에 앉아 음료를 주문한다. 강원도 들깨를 첨가한 크림 들깨 라테, 들기름·들깻가루·깻잎을 올려 내는 들깨 벌꿀 아이스크림의 고소함이 혀끝에 오래 남는다.
문의 0507-1302-9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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