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올려다본 하늘이 자꾸만 높아진다. 발꿈치를 들고 힘껏 손을 뻗어 봐도 아득하다. 뽀얀 구름은 하늘 여기저기에 자리를 잡았다. 멍하니 위로 향했던 시선을 거둔다. 기차를 타고 목포역에서 내렸지만 아직 갈 길이 남았다. 우리의 목적지는 이 보다 남쪽이다. 하늘을 수놓은 구름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달린다. 서서히 월출산이 모습을 드러낸다. 계절에 깊이 잠긴 전남 강진에 닿았다.
차향을 전하다, 백운차실
예부터 명산으로 불린 월출산은 차 재배지로도 유명했다. 강진으로 유배를 온 다산 정약용이 이곳의 차 맛이 좋아 자주 즐겼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월출산은 일교차가 크고 햇빛을 막아 주는 안개가 종종 끼어 야생 차나무가 자라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을 지녔다. 그런 월출산 아래에 전통차를 연구하고 그 맥을 잇는 찻집 백운차실이 있다. 백운차실은 지금도 야생 찻잎으로 차를 만든다. 차실에 앉으니 안온한 분위기에 마음이 차분해진다. “한국 차 문화가 가장 융성한 시기가 언제인지 아세요?” 이현정 원장이 월산떡차를 우리며 운을 뗀다. “고려 시대예요. 좋은 차가 나는 월출산, 불교, 고려청자. 차 문화의 삼박자를 갖춘 곳이 바로 강진이었죠. 그리고 조선 후기, 다산 정약용 선생이 이곳으로 오고 이야기가 더 깊어집니다.”
1801년에 유배를 온 정약용은 강진에서 제자들과 함께 공부도 하고 차도 마셨다. 18년 후, 해배를 맞아 떠나는 정약용에게 제자들은 ‘다신계’라는 약속을 한다. 봄이 오면 1년간 공부한 글과 직접 만든 차를 스승인 다산에게 보내겠다는 약속이었다. 제자 중 한 명인 이시헌과 후손들은 그 뜻을 받들어 무려 100년 넘게 대를 이어 약속을 지킨다. 스승을 위하는 마음을 정성스럽게 차에 불어넣은 것이다. 시간이 흘러 조선에 일제강점기라는 어둠이 내린다. 다신계를 이어오던 이한영은 일본이 조선에서 차나무를 기르고, 이를 수확해 일본식 이름을 붙여 유통하는 것을 심각하게 여겼다. 우리 땅에서, 우리 백성의 노동력으로 탄생한 차가 일본 이름을 달고 수출되다니 당치 않은 일이었다. 그는 연구 끝에 백운옥판차와 금릉월산차를 만들어 한국 최초의 차 상표를 제작한다. 그것이 백운차실의 시작이자 뿌리였다.
그들의 후손인 이현정 원장은 차가 단순 기호 음료가 아니라 문화라고 말한다. “차를 제작하는 사람들은 ‘마신다’라는 표현보다는 ‘차를 한다’라는 말을 써요. 차를 마시기까지의 모든 과정에 문화가 깃든다고 믿기 때문이지요. 차 문화가 더 꽃피도록 차에 집중하고, 차를 오롯이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게 제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얼굴에 차향처럼 은은한 미소가 퍼진다. 백운차실이 있는 한 전통차 문화는 시나브로 퍼져 나갈 것이다. 마음에 차의 온기가 내려앉아 따뜻하다. 월출산이 보이는 한옥 마루에 앉아 차를 몇 번 더 홀짝여 본다.
월출산 아랫자락의 찻집 백운차실은 지금도 야생 찻잎으로 차를 만든다.
차실에 앉으니 안온한 분위기에 마음이 차분해진다.
생명의 노래, 강진만 생태공원
월출산의 품을 벗어나 이번엔 바다 쪽으로 향한다. 시야가 탁 트이더니 일순간 주변이 고요해진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에 괜히 킁킁거린다. 방금 전 산에서 느껴지던 풀 내음, 흙냄새에 물 특유의 시원한 냄새가 더해졌다. 앞쪽으로 가자 갯벌이 드넓게 펼쳐진다. 물이 빠지는 간조 때여서 펄이 훤하게 드러났다. 갯벌 반대편 저 멀리에는 나지막한 산세가 공간을 채웠다. 한 폭의 그림 속에 들어온 것 같다.
하수 종말 처리장이 있던 곳이 2014년, 66만 1157제곱미터(약 20만 평)에 달하는 강진만 생태공원으로 변모했다. 생태공원이 조성되고 큰고니, 청둥오리 등 철새들이 겨울마다 이곳을 찾았다. 짱뚱어, 붉은발말똥게, 수달, 삵 등 다양한 생물도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장흥에서 흘러오는 탐진강과 강진만이 만나 생태 자원이 풍부하다는 특징 때문이다. 퐁당, 스르륵, 꼬로록, 꾸구국…. 고요한 것이 아니었다. 가만히 서서 귀를 기울여 본다. 다채로운 소리가 들려온다. 갯벌이 숨 쉬는 소리. 갯벌에 마음속으로 인사를 건넨다. 사람에겐 그저 자연의 일부일 뿐인 갯벌은 수많은 생물의 집이고, 어떨 땐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생명이 되기도 한다. 언제나 생명력이 움트는 곳. 그 강렬한 힘을 상상하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들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조심조심 걷는다.
은갈빛 갈대의 향연
물풀과 펄이 가득한 공간을 지나 우거진 갈대밭으로 들어간다. 갈대는 담수와 해수 모두를 필요로 하는 식물이다. 담수인 탐진강과 해수인 강진만 바닷물이 만나는 강진만 생태공원은 갈대가 자라기에 안성맞춤인 셈이다. 마침 불어온 바람이 갈대를 흩트리고, 솨 소리가 나며 주변이 일렁인다. 갈대밭에 파묻힐 정도로 낮은 길이 보인다. 생태공원은 간조와 만조에 맞춰 물이 빠졌다가 밀려드는데, 만조 땐 당연히 이 길도 물에 잠긴다. 물이 빠지고 난 후에는 펄이 남아 미끄럽지만, 길이 낮은 덕에 자연과 같은 눈높이에 서서 갈대와 키를 맞추어 보고 갯벌도 더 자세히 살핀다. 생태공원 속 존재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어 더욱 매력적이다.
윤문숙 문화관광해설사가 읊조리듯 말한다. “여긴 무한한 생명력과 가능성을 지닌 곳이에요. 걷고 있으면 마음이 치유되는 것 같아요.” 생태공원 곳곳의 생명들이 방문객에게 위로를 건네는 것이 아닐까. 어느새 노을 진 강진만 생태공원의 풍경이 묵묵히 우리를 토닥인다. 다시 힘차게 걸어 나간다. 종일 걸었어도 지치지 않을 힘을 강진에서 얻었다.
퐁당, 스르륵, 꼬로록, 꾸구국…. 가만히 서서 귀를 기울여 본다.
다채로운 소리가 들려온다. 갯벌이 숨 쉬는 소리.
갯벌에 마음속으로 인사를 건넨다.
농촌에서 살다, 강진 푸소 체험
강진을 온몸으로 즐기는 또 다른 방법을 소개한다. ‘푸소(FU-SO)’ 체험으로 농촌의 훈훈한 정서와 감성을 경험한다. 푸소는 ‘필링 업, 스트레스 오프(Feeling Up, Stress Off)’의 줄임말이자 전라도 사투리로 ‘덜어내다’란 뜻이다. 농가에서 하룻밤 머물며 텃밭 체험, 소 먹이 주기 체험, 찻잎 따기 체험 등으로 농촌의 생기를 느낀다. 자연과 하나 되어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특별한 추억도 만들 수 있어 일석이조다. 농가마다 다른 체험 프로그램을 갖추었으니 취향에 맞게 선택하자. 강진에서 일주일 살기, 강진 푸소 시티투어 등에도 참여 가능하다. 문의 061-430-3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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