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칵, 탁, 드르르. 서울 용산구 남영역 근방, 손기정 선수 옛집의 기와지붕이 훤히 내다보이는 카페 ‘식캣사인’에서 익숙하고도 다정한 파열음을 듣는다. 주인장 김정엽이 매만진 음향 기기의 정체는 빈티지 내셔널 카세트덱. 동시대적 감각으로 꾸민 인테리어와는 제법 시차가 있어 보이는 물건이다. “선곡은 날씨에 좌우되는 편이에요. 롤러코스터의 1999년 앨범, 그리고 영화 <유브 갓 메일>의 사운드트랙을 즐겨 틀어요.” 서울 종로의 빈티지 숍 ‘레몬 서울’에 놓여 있던 카세트 플레이어의 디자인에 매료됐다는 그는 카페에 고가 스피커를 놓는 대신 붐 박스 두 대를 들이기로 했다. 오묘한 푸른빛이 감도는 붐 박스에서 경쾌한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투박하고 나직한 카세트테이프의 음색이 기억 저장소의 재생 버튼을 툭, 하고 눌러 버린다.
물론 지금 여기서 자질구레한 옛이야기를 불러 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카세트테이프는 이미 우리 앞에 불쑥 돌아와 있다. 부흥의 양상은 LP보다 느리고 잔잔하지만, 추억을 불러내는 힘은 훨씬 더 강력해 보인다. 당장 몇 가지 떠오르는 장면을 꼽아 보아야겠다. 후드 집업 재킷 주머니에 소니 워크맨을 꽂고 헤드셋을 낀 채 공중 부양하는 소녀의 모습. 지난여름 공개된 넷플릭스 시리즈 <기묘한 이야기> 시즌 4에서 맥스는 자신이 평상시 좋아하던 곡인 케이트 부시의 ‘러닝 업 댓 힐(Running Up That Hill)’을 듣는 것으로 악령 베크나를 떨쳐 냈다. 얼마 전 공개된 영화 <서울대작전>의 긴박한 자동차 경주 신, 지난봄 종영한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수많은 장면에서 카세트테이프는 시대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도구를 넘어 이야기의 촉매로 활약했다. 이런 흐름의 맨 앞엔 2014년 작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가 놓여야 마땅할 것이다. 영화 속에 등장한 믹스테이프는 그와 똑같은 물성을 지닌 사운드트랙으로 발매되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동면에서 깨어난 카세트테이프는 어느덧 당대와 발맞춰 걷기 시작한다. 방탄소년단, 블랙핑크, 빌리 아일리시, FKA 트위그스가 앞다퉈 카세트테이프로 새 앨범을 출시했고, 지난 2월 출시된 〈듀스 포에버〉 한정판처럼 추억의 명반을 소환해 재발매하는 이채로운 현상도 일어났다. 눈 밝고 발 빠른 기업에서도 카세트테이프 마케팅을 펼쳤다. 지난해 KT는 카세트 플레이어 ‘카세트(Kassette)’와 함께 카세트테이프 앨범 〈리와인드: 블로섬〉을, 오비맥주의 카스는 서브컬처 기반 브랜드 발란사와 협업해 카세트 플레이어와 디자인 굿즈를 선보였다. 커피와 빵을 만드는 프릳츠 커피 컴퍼니에서는 매거진 〈BGM〉과 함께 카세트테이프 외관을 닮은 플레이리스트 북 〈BGM Mix Vol. 1 워크 송(Work Song)〉을 출간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마침내 카세트테이프를 두 손에 넣고 싶다는 열망으로 몸이 달았다. 서울 용산 전자상가를 무턱대고 찾아갔다. 전자랜드 신관 2층에 자리한 레코드 숍 ‘필레코드’의 벽장 한편에서 <조동진 골든 앨범> 카세트테이프를 발견하고 눈이 동그래졌다. 아세아레코드에서 1983년 5월 25일에 발매한 것이다. 반가운 마음에 집어 들었더니 날아오는 한마디. “그건 미개봉이라 1만 5000원이에요.” 오래된 물건이라고 값이 헐하진 않다. “그건 꽤 저렴한 편이에요. 신중현, 김추자, 김정미 초반은 5만 원도 훌쩍 넘는걸요.” 1982년부터 레코드 숍을 운영해 온 김원식 대표는 요즘 들어 카세트테이프를 찾는 손님이 부쩍 늘었다고 했다. “편안하잖아요, 음색이. 일단 한번 카세트테이프의 매력에 빠지면 자꾸 듣고 싶어지죠.” 값을 치르고 나와 한동안 카세트테이프를 만지작거렸다. 온전히 내 것이 된 음악과 시간. 오랜 방황 끝에 되찾은 이 작고 소중한 안도감 속에 한동안 머물고 싶다.
➜ 떠나요, 카세트테이프 탐험
서울 마포구에는 카세트테이프 애호가를 위한 공간이 밀집해 있으니 도프레코드, 김밥레코즈, 방레코드, 데이토나레코즈, 사운즈굿을 차례로 순례하며 ‘디깅’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서울레코드와 종로음악사를 위시한 종로3가의 음반상, 세운상가에서 동묘까지 이어지는 점포들도 이 목록에서 빼놓을 수 없다. 흥이 남다른 도시 부산에도 아이러브뮤직, 명성레코드, 선미레코드, 정음사 등 근사한 레코드 숍이 모여 있다. 그런가 하면 광주의 선경비디오상사(선경미디어), 대구의 성음레코드, 경북 안동의 아름드리레코드, 강원도 삼척의 성원음악사와 강릉의 동부열쇠, 춘천의 명곡사, 전북 군산의 뮤직랜드와 익산의 원음악사가 굳건히 지역을 지킨다. 지면에 미처 소개하지 못한 보석 같은 공간이 많으니, 부디 발견의 기쁨을 누리시길.
<KTX매거진>의 모든 기사의 사진과 텍스트는 상업적인 용도로 일부 혹은 전체를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링크를 걸거나 SNS 퍼가기 버튼으로 공유해주세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