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왜 만들었는가
#성종 #대비님을 편안히
보통은 왕이 승하하고 다음 왕이 즉위하지만, 생전에 왕위를 물려주는 경우가 있었다. “18년 동안 호랑이를 탔으니, 또한 이미 족하다.” 조선 제3대 왕 태종이 이 말과 함께 아들에게 양위하자, 효심 지극한 아들 세종은 아버지가 거처하실 궁을 마련한다. 이곳이 수강궁이었고, 세종의 증손자인 제9대 왕 성종이 세월 속에 쇠락한 수강궁 터에 창경궁을 새로 짓는다. 왕실의 어르신인 대비가 당시에 세 분이었으니 세조의 비 정희왕후, 덕종(의경세자)의 비 소혜왕후,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다. 쉽게 풀어서 말하면 할머니, 어머니, 숙모다. 이분들을 편안히 모시기 위해 창덕궁 바로 옆에 1483년 궁궐을 조성한 것이다. 왕이 집무하고 거주하는 공간이 아니었기에 중심 건물이 남쪽 대신 동쪽을 바라보게 했고, 궁 바깥에서 정전으로 가는 데 세 개 문을 통과하는 경복궁·창덕궁과 달리 두 개 문만 두었다.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에는 담장 높이까지 왕이 직접 지정하거나 외부 시야 차단용으로 버드나무를 심으라 하는 장면이 나오고, 점필재 김종직이 상량문을 썼으며 사가정 서거정이 전각의 이름을 정했다고 밝힌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탄생 #화재 #여론조사
500년 넘는 역사 속에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났겠는가. 정조·순조·헌종 등이 태어났고, 중종이 승하해 인종이 즉위했으며,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정문인 홍화문 남쪽의 작은 문 선인문으로 쫓겨났다. 임진왜란, 이괄의 난 때를 비롯해 화재 피해도 여러 번 입었다. 경복궁·창덕궁 역시 임진왜란 당시 화마를 피하지 못했기에 먼저 복원한 창덕궁과 창경궁은 조선 중반 이후 역사 무대의 중심이 된다. 사도세자의 비극이 벌어진 곳, 장희빈이 사약을 받은 곳도 창경궁이다. 정조는 아버지를 모신 사당 경모궁이 보이는 높은 지대에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머무를 자경전을 지었고, 혜경궁 홍씨는 자경전과 경춘전에서 <한중록>을 집필한다. 물론 훈훈한 이야기도 전한다. <조선왕조실록> ‘중종실록’에는 중종이 양인과 천인을 아우르는 양로연에 이어, 여성 어르신에게도 따로 날을 잡아 잔치를 베풀었다고 기록했다. 영조는 홍화문에 나가 백성에게 균역법에 대한 의견을 몸소 묻기도 했다. 이런 사연을 생각하며 거니는 궁궐은 더욱 의미 깊게 다가온다.
어떻게 훼손되고 복원했는가
#강제 개명 #복원 또 복원 #완전하지 않으나 그래도 아름다워
핑계는 좋았다. 순종이 부왕인 고종과 떨어져 살아야 할 운명이라 우울해한다면서 일제는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 박물관을 조성하자고 한다. 창경궁은 1911년 창경원으로 명칭이 바뀌고 놀이 시설이 되었다. 왕이 농사를 체험하며 백성의 어려움을 헤아린 내농포라는 논을 파 연못으로 만들었으니, 오늘날의 춘당지다. 춘당지에서 사람들은 보트를 타고 그 위에는 케이블카가 지나다녔다. 조명이 사치이던 시절 창경원에는 20만 와트 조명이 불야성을 이루었다. 1983년에 이르러서야 창경궁 복원 작업이 시작된다. 동물은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이주시키고 벚나무는 여의도로 옮겨 심는 등 대공사 끝에 1986년 재개방한다. 올해 7월에는 창경궁과 종묘 연결 공사를 마쳤다. 일제가 도로를 내 끊어 놓은 창경궁과 종묘가 90년 만에 이어졌다. 이렇게 이야기가, 역사가 공간을 타고 다시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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