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이라는 정체 모를 제목이 붙은 전시장. 텔레비전 열세 대가 아무렇게나 놓였고, 브라운관에서는 방송 사고가 난 듯 기괴한 화면이 나왔다. 어느 텔레비전 앞에는 마이크를 두어 관람객이 말할 때 영상이 반응했고, 다른 텔레비전은 자석을 가져다 놓아 관람객이 자석을 옮기면 화면이 변화했다. 이것은 텔레비전인가? ‘음악의 전시’라는 제목답게 피아노도 네 대 설치했다. 속옷, 전구, 깡통, 괘종시계를 붙인 피아노는 관람객 누구나 만지고 칠 수 있었다. 이것은 피아노인가? 무엇보다, 이것은 전시인가?
이전의 예술은 예술가와 관객의 역할이 분명했다. 작가는 제작하고, 연주자는 들려주고, 관객은 감상한다. 1963년 3월 독일의 소도시 부퍼탈에서 열린 전시는 이 경계를 무너뜨렸다. 텔레비전이 예술의 도구가 되었고, 관객이 작품에 참여했으며, 전시 리플릿 또한 매끈한 종이가 아닌 경향신문에 찍었다. 4·19혁명 이후 복간한 1960년 4월과 1961년 3월 신문이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새롭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그냥 전체가 완전히 신선한 시도. 야심만만한 서른둘 청년 예술가 백남준의 첫 개인전은 세계 최초 비디오 전시로 역사에 남았다.
세계를 유목한, 세계 시민으로서 예술가 백남준은 1932년 7월 20일 서울의 부유한 집안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사업을 이어받기 원하는 아버지 뜻을 거스르고 그가 일찌감치 관심을 가진 것이 예술이었다. 일본 도쿄대에 진학해 미학을 전공하고 현대 음악가 쇤베르크를 주제로 졸업논문을 쓴 뒤 독일 유학을 떠난다. 마냥 아름다운 고전음악은 그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왜 정해진 음으로만 음악을 해야 하는가? 피아노 두 대를 일부러 음이 어긋나게 조율해 음과 음 사이, 기존에 없던 음을 찾았다. 질서, 규칙은 지배 계층의 논리다. 그 극단적 예가 세계대전이다. 지배층이 고상한 음악을 듣고 박수 친 손으로 전쟁 서류에 사인해, 콘서트홀은 구경도 잘 못 가 본 이들이 전장에서 사망했다.
백남준은 기존 질서를 넘어 모두가 자유롭게 소통하는 예술을 기획했다. 공연 도중 객석에 뛰어들어 관람객의 넥타이를 자르는 퍼포먼스, 상류층 예술을 상징하는 피아노를 부수는 퍼포먼스 등을 펼쳐 충격을 주었다. 점잖게 앉아 순응하라 강요하는 세상, 사람들을 어떻게 놀게 하고 서로 속내를 꺼내게 할까 궁리하던 그의 시야에 텔레비전이 들어왔다. 독일을 떠나 1964년 자리 잡은 미국에는 바야흐로 텔레비전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한 방송국이 송출한 프로그램을 수만, 수십만이 동시에 시청했다. 그는 축제와 소통을 위해 텔레비전과 비디오를 이용하기로 했다. 전자공학 책을 공부하고 기술자를 만나 배웠다. 비싼 텔레비전값을 감당하느라 허리가 휘었으나 새로운 도구로 새로운 예술을 개척하는 일은 외로운 이상으로 즐거워 그는 언제나 따뜻한 웃음과 재치를 잃지 않았다. 마침내 1984년,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의 그날에 그는 최초 전 세계 인공위성 생방송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내놓는다. 차갑고 무섭다던 기술로 우리는 이렇게 소통하고, 잘 놀고 있다고. 세계가 그의 기획에 열광하고 스케일에 놀랐다.
2006년 사망하기까지 백남준은 음악과 미술, 몸과 악기, 사람과 기계, 예술과 과학, 동양과 서양을 넘나들면서 세상을 축제장으로 만들었다. 그의 예언처럼 미디어 아트는 어엿한 예술 장르가 되었고, 사람들은 이것으로 경계를 허물고 서로 어우러지며 예술을 향유한다. 기술은 차갑지 않다. 따뜻한 사람이 만들고 만지고 누리는 한.
특별전 <바로크 백남준 Baroque Nam June Paik>
백남준아트센터가 백남준 탄생 90주년을 맞아 특별전을 연다. 백남준의 대형 미디어 작업을 통해 그의 예술적 도전이 선사하는 무한한 즐거움을 보여 주는 전시다. 레이저를 사용한 대표작 ‘삼원소’(1999),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설치했던 대규모 프로젝션 작품 ‘시스틴 성당’(1993, 울산시립미술관 소장) 등을 공개한다. 기간은 7월 20일부터 2023년 1월 24일까지. 문의 031-201-8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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