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7년 7월 11일, 좌의정 정광필 등 대신들이 창경궁에서 창덕궁으로 돌아가자고 간청하자 중종 임금은 대번에 거절한다. “창덕궁은 습하다. 창경궁은 트였으므로 이곳에서 더위를 피하는 것이다. 처서를 지나 한랭해질 때 창덕궁으로 가겠다.” 그렇게 중종은 ‘더위를 피해 시원한 곳으로 옮김’이라는 피서(避暑)의 의미를 성실히 실천했다. 승정원 같은 국가기관이 멀어 불편하다는 신하와 더위 때문에 안 돌아간다는 임금의 밀고 당기기 현장은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기계가 더위를 식히는 오늘날과 달리 과거에는 거처를 옮긴 중종처럼 뭐라도 해야 했다. 예를 들어 다산 정약용은 1824년 더위를 피하는 여덟 가지 방법 ‘소서팔사’를 읊었다. 그중 몇몇을 소개하자면 ‘허각투호(虛閣投壺)’ ‘서지상하(西池賞荷)’ ‘동림청선(東林聽蟬)’. 빈 누각에서 투호 놀이를 하고, 서쪽 못에 핀 연꽃을 감상하고, 동쪽 숲에서 매미 소리를 듣는다. 그래 봤자 얼마나 시원해지겠느냐는 의구심은 거두고 상상한다. 홀로 선 누각이 고요한데 연꽃은 아리따우며 매미 소리 청량하다. 더위를 멀리한다기보다 더위 속에 파고들어 운치로 승화하는 정신이 고상하다. 피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지혜, 불평하지 않겠다 결심하는 기백, 즐길 줄 아는 격조가 멋스럽게 어우러진 피서법이다.
그래도 땀은 흐른다. 더위가 운치로 변모되길 기다리는 동안 더위 먹는 경우야 비일비재했을 터. 선조들은 승화 과정을 과감하게 생략한 직관적인 피서법도 개발했다. 기역 자도 모른다 하려거든 낫부터 놓아야 하듯, 당최 더위가 무엇이냐 말하기 위해선 도구가 필요하다. 부채와 죽부인, 모시나 삼베 옷을 비롯해 등나무 줄기를 엮어 적삼 밑에 착용하는 등등거리와 등토시를 만들어 몸에 바람이 잘 닿도록 했다.
도구로 통풍은 해결했고 다음은 물놀이. 음력 6월 보름은 ‘동류수두목욕(東流水頭沐浴)’의 약자인 유두절이다. 신라 시대부터 사람들은 이날 가족과 함께 시내와 계곡을 찾아 온종일 몸을 담그고 과일을 나누어 먹었다. 강에 들어가 헤엄치고 물고기를 잡으면서 진탕 놀다 강가에서 매운탕을 끓여 먹는 천렵(川獵) 역시 주로 서민이 행하던 물놀이였다. 첨벙 빠져 같이 놀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양반은 발만 살짝 물에 넣는 탁족(濯足)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그래도 성에 차지 않을 땐? 아무도 없는 깊숙한 산에 올라 상투를 풀고 옷을 모두 벗었다. 바람결에 목욕하는 풍즐거풍(風櫛擧風)이라는 은밀한 풍속이었다.
가만히 앉아 리모컨만 누르면 더위가 식는 시대에 선조들의 피서법은 싱겁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굳이 나가서 홀로 감상하거나 함께 뛰노는 동안 옛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적신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알아야 할 진짜 피서법은 아닐는지. 이 계절이 끝나기 전에 그것을 찾아 밖으로 나가 보자. 홀로여서 좋고 함께여서 또 좋은 더위 속으로, 이토록 신나는 여름 속으로 뛰어들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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